닫기

문의





    검색

    닫기
    t mode
    s mode
    지금 읽고 계신 글

    로컬 타이포 브랜딩: 개항로 서체 개발기 #한글파생

    한글 2,350자라는 만선의 꿈을 좇는 항해


    글. 이찬솔

    발행일. 2023년 07월 28일

    로컬 타이포 브랜딩: 개항로 서체 개발기 #한글파생

    [개항로 프로젝트]는 2018년 시작된 민간 주도 도시 재생 사업이다. 이 사업을 기획하고 지금까지 지속해 오고 있는 이들(개항로 노포 상인들, 브랜딩 전문가, 쉐프 등 10~20명이 협업한다)의 단체명이기도 하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인천 구도심(중구 동인천역 일대)의 낙후한 건물들을 리모델링하고,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킨 노포들에 브랜딩이라는 새 숨을 불어넣기 위해 기획되었다.
    
    19세기 말 이 지역, 그러니까 제물포항(지금의 인천항) 일대는 이른바 ‘개항’[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부산, 원산, 인천 등 3개 항구도시들이 차례로 대외 무역의 문을 열며 개항장(開港場)으로 불렸다. 이 시기가 이른바 ‘개항기’다.]과 함께 외래 신문물이 유입되면서 근대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정확히는 발전을 ‘당했다’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지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문장으로 부연할 수 있다. “제물포 개항은 인천 지역 사회에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에서도 그러하였지만, 그보다는 일본이 원인천을 한국 식민지 경영의 발판으로 삼은 데 있었다.”
    
    시절의 명암이야 어떻든, 당시 개항의 격랑을 살아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오랜 살아냄, 혹은 이겨냄의 흔적들이 지금껏 거리 곳곳에 남아 있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그 흔적들에 다시금 빛을 비추는, 그곳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사람들을 밝히는 작업이다. [개항로 프로젝트]의 발단과 전개를 기획한 이들은 이창길(경영 컨설턴트)과 권순만(브랜드 디렉터). 두 사람은 ‘플레이스랩’이라는 법인을 공동 설립하여 개항로 로컬 브랜딩을 지속·지원하고 있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23년 초 [개항로 서체] 개발 사업도 시작되었다.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 디자이너들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은 이 [개항로 서체] 개발 과정을 초창기부터 최종 공개 시점(8월 예정)까지 순차적으로 소개하는 시리즈를 매달 한 회씩 연재한다. 개발 담당 디자이너들이 일종의 일기체로 기록하는 에세이 연작이다. 이들은 이번 작업을 ‘로컬 타이포 브랜딩’이라 명명했다. 단순히 주목도 높은 서체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글자 디자인으로써 도시 재생에 기여하는 사례를 기록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목적이다.

    만선을 이끌고 귀항하는 것보다 간절한 꿈이 어부에게 있을까? 서체 디자이너 이정은 ‘선장님’이 이끌고 있는 [개항로 서체] 프로젝트도 만선이 되기 위해선 한글 파생이라는 큰 물고기를 잡아야 했다.

    처음 [개항로 서체]를 개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글 파생은 ‘꼭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구 디자이너 출신으로 목간판을 작업해본 경험도 있고, 13년째 글씨(캘리그라피)를 쓰고 있어 붓글씨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 그 누구보다 잘 만들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정은 선장님께 한글 파생이라는 물고기를 잡아보겠노라고 나의 의지를 피력했고, 결국 [개항로 서체] 프로젝트에 승선하게 되었다. 만선을 향한 운명의 연장선이 내 앞에 드리워진 순간이었다.

    선원으로서의 첫 임무, 불씨 아니 ‘글씨 지피기’

    “전종원 사장님께서 2G 피처폰을 쓰셔서 원도 사진 찍어주신 게 많이 없어. 조금 인상이 다르지만 추가로 써주신 글씨도 있고, 목간판 사진들 있으니 보면서 제작해야 할 것 같아.”

    만선의 꿈을 품고 출항을 준비하던 내게 짙은 안개가 몰려왔다. ‘원도’가 베이스가 되는 서체에 ‘원도’가 많이 없다는 것은 배가 나아가기 위한 동력원이 부족한 것과 같다. 성급하게 노를 젓기보다는 충분한 연료의 공급이 우선이었다. 선원으로서 첫 임무는 [개항로 서체] 원도에 불씨를 지피는 것이었다.

    그동안 원도를 기반으로 하여 여러 서체를 개발해왔다. 직접 쓴 글씨를 원도로 삼은 적도, 다른 작가의 글씨를 원도로 삼아 서체를 개발한 적도 있다. 다른 작가의 원도에 기반해 서체를 개발할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그 작가가 되어보는 것’이다. 직접 그 작가가 된 듯한 상상을 하며 어떤 붓으로 어떻게 글씨를 쓰고, 획을 어떻게 끝맺음 하는지 등 큰 덩어리부터 디테일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관찰하고 느껴본다.

    이 경험을 살려 이번엔 전원공예사 전종원 사장님께 빙의(?)해 직접 글씨를 쓰고, 목간판에 새기고, 다시 먹으로 칠하는 상상을 했다. 머릿속으로 아스라이 원도에 없는 글씨들이 그려졌다.

    [개항로 서체]의 원도가 되는 글씨는 큰 붓으로 힘 있게 써 내려간 ‘서간체’이다. 글씨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우상향하는 획으로 강렬한 인상을 전한다. 그리고 표현 방법에 재밌는 요소가 하나 있는데, 보통의 글씨는 ‘쓰기’만 하는 것에 비해 이 글씨는 ‘쓰기’와 ‘그리기’가 합쳐져 있다.

    대부분 글씨를 쓸 땐 획을 ‘선’으로 인식해 그어나간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멋을 낼 수 있는 대신 글씨가 정립될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개항로 서체] 원도 글씨의 경우, 목판에 새겨질 것을 고려해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글씨가 덧입혀진다. ‘선’이 아니라 ‘면’으로 인식하는 글씨인데, 공교롭게도 이 방법은 글씨를 표현함에 있어 굉장히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글씨의 외곽 라인을 눈에 익히고 쓰기 때문에 글씨를 바라보는 관찰력을 높이고 흔들림 없이 탄탄한 글씨를 만들어낼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색칠 놀이를 하는 이유 중 한 가지인 ‘물체의 인지성’을 키우는 것과 같다.)

    전원공예사의 목간판들

    목재는 크게 내장재와 외장재로 구분이 되는데, 목간판에는 수축과 팽창이 적고 내후성이 좋은 외장재가 많이 쓰인다. 조각하기에 용이해야 하기에 결이 고르고 깎기 쉬우며 나이테와 색이 고른 것이 좋다. 전원공예사의 목간판들은 목재의 결과 색으로 보아 밤나무와 소나무(국내 전국 각지에 널리 퍼져있어 가장 많이 쓰인다.), 부빙가(동남아 지역에서 주로 자라며, 조각에 많이 사용된다.)의 목재가 많이 보였고, 구하기 어려운 향나무도 보였다.

    목간판에 원도를 붙이고 조각칼로 다시 파내는 과정에서 글씨의 부드러운 획이 다소 거친 질감으로 변환된다. 이 점이 보통의 붓글씨 서체와 다른 [개항로 서체]만의 개성인데, 한글을 파생하는 과정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 중 하나이다.

    출항! 원도 노 젓기 한 번, 사용성 노 젓기 한 번

    동력원 준비를 마치고 [개항로 서체]가 드디어 바다로 나섰다. 한글은 이정은 선장님께서 파생해둔 250여 자의 기본 글자를 불씨로 2,350자까지 꾸준히 장작을 넣어주면 된다. 가로쓰기용으로 우선 파생하고, 추후에 무게중심과 형태 등을 다듬어 세로쓰기용으로도 출시할 예정이다.

    이정은 디자이너가 파생한 250여 자의 기본자

    만선을 꿈꾸며 조업을 나간 어부가 항구에 다다르기 직전까지 마지막 힘을 다해 그물을 끌어 올리듯, 서체 디자이너도 서체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까지 파생과 검수, 수정과 보완 작업을 거친다. 특히 [개항로 서체]처럼 원도가 있는 서체의 경우 ‘원도의 형태’와 ‘사용성을 고려한 시각보정’ 사이의 간극을 맞추는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서체를 통해 로컬 브랜딩을 확립해나가고 있는 만큼 더 치밀하고 세밀하게 파생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파생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은 바다에 나가 [ㅁ]꼴을 건져 올렸고, 내일은 [ㄷ]꼴을 건져 올릴 것이다. 배가 기울지 않도록 좌현과 우현을 번갈아 가며 노질을 하고 차곡차곡 한글을 쌓아 올려야만 한다. [개항로 서체]만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낼 수 있는 노질 한 번, 사용자 입장에서 가독성을 위해 시각보정을 하는 노질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배가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순항해 나아가는 과정은 이렇다.

    획의 형태 비교
    체크 표시된 것이 최종 채택된 글자이다.

    원도 트레이싱(스캔 후 다듬는 일) 과정을 거친 개발 초기의 서체는 붓으로 쓴 느낌이 강했다. 획의 시작과 끝, 곁줄기 등이 둥글고 부드럽게 그려졌다. 앞서 설명했듯 [개항로 서체]가 보통의 붓글씨 서체와 다른 점 중 하나는 ‘목판에 새겨진’ 서체라는 점이고, 목간판에 쓰인 글씨는 붓글씨 서체보다 다소 직선적이고 깎인 인상을 준다. 원도의 인상을 적극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부드럽게 그려진 기본 뼈대 글자에 직선적이고 꺾여있는 획을 추가해 [개항로 서체]만의 정체성을 부여했다.

    자소의 형태 비교

    글자의 질감과 더불어 자소의 형태에서도 원도의 형태를 최대한 유지했다. 원도의 [ㄲ]은 오른쪽 [ㄱ]의 크기가 더 작다. 보통의 서체는 가독성, 다른 자소와의 관계를 고려해 비슷한 크기감과 높이로 맞춘다. 사용성을 위해 원도의 형태를 바꿀지, 서체의 정체성을 위해 원도를 유지할지 두 글자를 놓고 수 시간 동안 조판 테스트를 진행했다. 우리가 택한 쪽은 결국 원도였다. 개성 강한 자소의 형태 하나가 로컬 브랜딩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글자의 기울기 비교

    글자의 기울기 또한 마지막까지 고민한 요소였다. 글씨가 글씨로만 남으면 기울기가 크게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지만, 서체가 된다면 가독에 지장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보통 서체 디자이너들은 똑바로 서 있게 하기 위해 톤을 조절해 무게중심을 맞춘다. [개항로 서체]의 원도 역시 좌측으로 약간 기울어 있었고, 보완하기 위해 똑바로 세우는 작업을 진행했다. 기울기를 다듬은 글자가 확실히 읽기에는 더 편안했지만, 정형화된 인상을 전하며 손맛이 다소 줄어든 느낌을 받았다. 글씨를 쓴 느낌을 전하고 싶었던 우리는 원도의 개성과 가독성을 모두 잡기 위해 강한 인상을 전할 수 있는 민글자에서는 원도에 맞춰 기울기를 남기고, 종성까지 있어 더 기울어져 보일 수 있는 받침글자는 기울기를 조정했다.

    시각보정 비교

    시각보정을 위한 노질의 시작은 자소의 형태와 방향성, 공간감 조절이었다. 원도의 [마]는 기울기가 완만하고 톤이 옅으며 초성과 중성 간의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개선된 서체 [마]에서는 전체적으로 우상향하는 방향성을 고려해 기울기를 더 강하게 하고 톤과 공간을 조절해 주목도가 높도록 설정했다.

    민글자 세로모임 [스]의 글줄 비교

    글줄의 무게중심은 원도보단 사용성을 고려해 수정했다. 민글자 세로모임 [스]는 다른 글자들에 비해 아래로 뚝 떨어져 있어 문장을 읽을 때 시각적 불편함이 느껴졌다. 세로모임 글자의 초성과 중성을 붙여 중앙으로 가지런하게 정렬될 수 있도록 조정해 가독성을 향상시켰다.

    허획 수정 전후 비교

    붓글씨를 쓰며 생기는 허획(실제 글자를 구성하는 획이 아닌, 글씨를 쓰는 과정에서 생기는 잔상 같은 획)처럼 오독의 여지를 불러일으키는 글자들은 과감히 수정했다. [타]의 [ㅌ]이 대표적이었는데, 첫 획에 연결된 허획이 두 번째 가로획과 이어지면서 [ㄹ]로 읽히기도 했다. 명확한 구분을 위해 허획을 과감히 줄여 [라]가 아닌 [타]로 읽힐 수 있도록 했다.

    섞임모임꼴 파생

    한글은 그 구조상 가로모임(마, 미, 맘 등)과 세로모임(모, 무, 몸 등) 그리고 가로와 세로가 혼합된 섞임모임꼴이 있다. 섞임모임꼴은 타 꼴에 비해 사용 빈도가 낮아 낯설지만, 한 벌의 한글이 완성되기 위해선 꼭 필요하기 때문에 원도 작가들에게 요청하는 편이다. 하지만, 서두에 언급했듯 [개항로 서체]는 원도가 현저히 부족했고 섞임모임꼴은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동력원(원도)이 부족함을 이 과정에서 가장 체감했고, 기존 꼴과 한 벌이 될 수 있도록 가장 신경을 많이 썼다. 세로모임꼴과 가로모임꼴의 형태와 우상향하는 획의 방향성, 먹의 양 등을 고려해 섞임모임꼴 450여 자를 파생했다.

    선명해진 개항로를 향해 만선은 기적을 울리고

    아득하기만 했던 개항로에 운명처럼 엮인 [개항로 서체]가 어느덧 다다랐음을 느낀다. 시리즈가 연재되면서 서체는 ‘프로젝트의 시작과 기획, 제안, 파생의 과정’을 통해 점점 또렷해졌고 이제 곧 세상에 나오게 될 것이다.

    [로컬 타이포 브랜딩: 개항로 서체 개발기]를 읽던 ‘독자’였던 내가 한글 파생을 통해 ‘필자’가 되어 글을 쓰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로컬 브랜딩에 서체가 정말 큰 힘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서체가 ‘개항로’를 넘어 더 너른 세상까지 순풍에 돛 단 듯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글 파생의 기회를 준 ‘선장’ 이정은 디자이너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 (다음 연재에서 계속)

    이찬솔
    ‘글자의지(LetterWollen)’를 풀어내는 폰트 디자이너. 빙그레 [싸만코체], 현대카드 [YouandiNew KR], 〈미르M〉 게임서체 개발에 참여했다. 폰트와 캘리그라피, 레터링, 가구, 소품 등 ‘글자’를 활용한 다양한 장르에 전방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soulxluos

    Popular Series

    인기 시리즈

    New Series

    최신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