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문의





    검색

    닫기
    t mode
    s mode
    지금 읽고 계신 글

    로컬 타이포 브랜딩: 개항로 서체 개발기 #베이직라틴_제작기

    ‘목간판 스타일 라틴 알파벳 서체’라는 미답의 영역


    글. 이가희

    발행일. 2023년 06월 22일

    로컬 타이포 브랜딩: 개항로 서체 개발기 #베이직라틴_제작기

    [개항로 프로젝트]는 2018년 시작된 민간 주도 도시 재생 사업이다. 이 사업을 기획하고 지금까지 지속해 오고 있는 이들(개항로 노포 상인들, 브랜딩 전문가, 쉐프 등 10~20명이 협업한다)의 단체명이기도 하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인천 구도심(중구 동인천역 일대)의 낙후한 건물들을 리모델링하고,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킨 노포들에 브랜딩이라는 새 숨을 불어넣기 위해 기획되었다.
    
    19세기 말 이 지역, 그러니까 제물포항(지금의 인천항) 일대는 이른바 ‘개항’[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부산, 원산, 인천 등 3개 항구도시들이 차례로 대외 무역의 문을 열며 개항장(開港場)으로 불렸다. 이 시기가 이른바 ‘개항기’다.]과 함께 외래 신문물이 유입되면서 근대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정확히는 발전을 ‘당했다’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지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문장으로 부연할 수 있다. “제물포 개항은 인천 지역 사회에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에서도 그러하였지만, 그보다는 일본이 원인천을 한국 식민지 경영의 발판으로 삼은 데 있었다.”
    
    시절의 명암이야 어떻든, 당시 개항의 격랑을 살아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오랜 살아냄, 혹은 이겨냄의 흔적들이 지금껏 거리 곳곳에 남아 있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그 흔적들에 다시금 빛을 비추는, 그곳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사람들을 밝히는 작업이다. [개항로 프로젝트]의 발단과 전개를 기획한 이들은 이창길(경영 컨설턴트)과 권순만(브랜드 디렉터). 두 사람은 ‘플레이스랩’이라는 법인을 공동 설립하여 개항로 로컬 브랜딩을 지속·지원하고 있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23년 초 [개항로 서체] 개발 사업도 시작되었다.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 디자이너들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은 이 [개항로 서체] 개발 과정을 초창기부터 최종 공개 시점(8월 예정)까지 순차적으로 소개하는 시리즈를 매달 한 회씩 연재한다. 개발 담당 디자이너들이 일종의 일기체로 기록하는 에세이 연작이다. 이들은 이번 작업을 ‘로컬 타이포 브랜딩’이라 명명했다. 단순히 주목도 높은 서체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글자 디자인으로써 도시 재생에 기여하는 사례를 기록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목적이다.

    [개항로 서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디자이너로서, 이 프로젝트를 얘기할 때 운명론을 운운하지 않을 수 없다. [로컬 타이포 브랜딩: 개항로 서체 개발기] 시리즈를 첫 회부터 보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운명의 시작은, 본인의 관심사를 늘 기록하고 기회가 되면 발 빠르게 움직이는 서체 디자이너 이정은의 열정이었다. 로컬 문화를 주제로 진행한 타이포그래피 리뷰 스터디 모임에서 인천 개항로에 대해 설명하던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잊을 수 없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 역시 동화되어 ‘이건 누구보다 빨리 시작해야 한다’는 운명적 촉이 발동했다. 이윽고 우리는 당장 개항로에 가보자며 함께 호들갑을 떨었고 결국 진짜로 그곳에 갔다.

    연차까지 내고 처음 개항로를 답사한 때는 2022년 6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이 글의 발행 시점으로 정확히 1년 전이다. 개항로는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과 동인천동을 잇는 거리의 이름이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동인천이었다.

    이정은 디자이너와 달리 내게 동인천은 초행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온 뒤로 내가 가본 인천의 장소는 갑곶 순교 성지, 인천국제공항, 인천문학경기장이 전부였다. 차이나타운과 월미도조차 가본 적이 없었다. 개항로 첫 답사 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동인천의 과거 번성기 흔적들, [개항로 프로젝트]가 만든 다양한 장소들을 방문하는 과정이 그저 즐거웠다.

    동행이 없었던 두 번째 답사 당시에 ‘인천맥주’가 흥미로운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있었다. 차이나타운 인근 호텔 숙박객에게 [개항로 프로젝트] 팀이 엮은 단행본 『개항로 이야기』를 증정하는 것이었다. 책을 너무나 가지고 싶어 또다시 연차를 내고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지금 생각하니 그런 열정이 어디서 나왔나 싶다.)

    그 뒤로도 개항로를 자주 찾았다. [개항로 서체] 원도 작가인 전원공예사 전종원 대표님과의 계약, 전 대표님이 새로 쓰신 원도 인계 등을 위해 다섯 번쯤 방문했다. 그러고 나니 개항로는 더이상 낯선 동네가 아니었다. 나 또한 [개항로 프로젝트]가 이야기하는 ‘개항로 이웃 사람’ 중 한 명이 된 기분이었다.

    ‘목간판 스타일 라틴 알파벳 서체’라는 미답의 영역

    서체 개발 과정을 디자이너가 직접 글로 풀어낼 기회는 드물다. 공식 블로그 ‘윤디자인 M’을 운영하는 윤디자인그룹, 홈페이지에 ‘스토리’라는 아티클 페이지를 둔 산돌처럼 자사 홍보 채널을 보유한 기업의 소속 디자이너라면 좀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그래픽』, 『디자인』, 『CA』 등 디자인 전문지와 『타이포그래피 서울』 같은 온라인 디자인 매체에 기명 칼럼을 기고하거나, 개인 소셜미디어 계정으로 꾸준히 글을 남길 수도 있다.

    이렇게 작업자 스스로 글쓰기 활동을 하지 않는 이상, 서체 개발 과정이 글 한 편에 준하는 서사성을 갖춘 채 실무자들 사이에 기록으로 남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점을 잘 알기에 [개항로 서체] 프로젝트의 내 담당 파트인 라틴 알파벳 서체 제작기를 이렇게 글로 풀어놓는 일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그렇다고 마냥 좋다는 것은 아니다. 내 경우에는 그래도 글을 쓸 일이 제법 많았는데, 그때마다 항상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은 지금 이 글도 미루고 미룬 끝에 어렵사리 나온 결과물임을 밝혀둔다.

    한글과 라틴 알파벳은 탄생도 구조도 판이한 문자다. 이 둘을 서로 어울리게 한다는 일은 사실 굉장히 어렵다. 동그라미의 떨어진 조각 안에 사각형을 채우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개항로 서체]에는 또 하나의 난제가 있었다. 바로 목간판에서 시작했다는 것. 일반적인 고딕 형태도 어려운데,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목간판 스타일 라틴 알파벳 서체를 만들어야 한다니⋯. 목간판에는 일반적으로 한글을 쓰고 라틴은 잘 쓰지 않는다. 게다가 라틴은 가로 쓰기가 기본이라 글자의 흘림도 수평 방향이니, 한글처럼 세로 쓰기 방식을 적용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목간판 스타일 라틴 알파벳 서체’라는 것은 미답의 영역으로 느껴졌다.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할 수밖에⋯.

    발등에 불은 떨어졌고 일단 한글 분석부터 들어갔다. 앞서 언급했듯 [개항로 서체]는 목간판 글씨를 바탕으로 한다. 원도 작가인 전종원 대표님 개인의 손글씨가 아닌, 목간판 특유의 자형(字形)을 폰트화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다. 그래서 원도로부터 글자 뼈대를 발굴하고, 목간판 위에 음각하듯 글자의 살을 입히는 방식으로 제작하기로 했다.

    [개항로 서체] 한글 분석

    한글 폰트에 있는 라틴 알파벳은 예로부터 외면받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다국어 조판이 드물었던 1980~1990년대 폰트들을 보면, 라틴보다는 한글에 비중을 많이 두고 제작된 까닭에 한글 디자인에 비해 알파벳 디자인이 아쉬운 사례가 존재했다. 그래서인지 디자이너들마다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윤고딕 300] 한글에 라틴 알파벳을 조판할 때는 [헬베티카(Helvetica)]를 쓴다, [윤고딕 500]은 [유니버스(Univers)]와 조합한다, 같은 일종의 모범 답안들이 존재했다. 지금도 적잖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한글 폰트 한 벌에 딸린 라틴 폰트를 혼용하기보다, 수많은 기성 라틴 폰트들 중 하나를 골라 한글과 매치하는 편을 선호하는 것으로 안다. 서체 디자이너인 나도 이런 현상에 대해 충분히 공감한다.

    최근 경향은 라틴 알파벳 디자인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라틴 알파벳만 개발하는 디자이너들도 많이 늘었다. 물론 그럼에도 한계는 있다. 정규 교과 과정에서 아무리 영어를 자주 접했다 해도, 한국에서 나고 자란 디자이너들의 눈에 알파벳은 한글만큼 ‘잘 보이기’ 힘들 것이다. 라틴 폰트 디자인 과정에서 미세하게 어색한 부분들을 놓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라틴 알파벳 디자인은 한글 디자인에 버금가는 전문성과 세심함을 요구하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손으로 깎은’, ‘손으로 쓴’, ‘힘이 살아 있는’

    다시 목간판 이야기로 돌아오자. 여느 작업들처럼 의뢰를 받아 진행되는 목간판은 대체로 상호가 많다. 목간판의 특성상 주요 고객층은 고령자인 경우가 많아서 주로 한글이 쓰이고, 라틴 알파벳보다는 한자의 수요가 더 많다.

    [개항로 서체]에 어울리는 목간판 스타일 라틴 알파벳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것이 서체 디자이너로서 나의 최대 고민이었다. [덕온공주체]를 작업할 때도 비슷한 고민을 했었다. 조선 시대 덕온 공주(德溫公主)의 붓글씨를 복원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아무리 서예 전공자라 해도 라틴 알파벳 글자는 따로 배우는 분야가 아니어서 필법을 정립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나는 [개항로 서체] 원도 작가 전종원 선생님의 과거 작업들뿐 아니라 국내의 다종다양한 목간판들, 목판이나 붓글씨 스타일 폰트 등을 수없이 참고한 뒤 이런 결론을 내렸다. ‘결국, 작업자 마음대로’라는 것. 나는 목간판 특유의 ‘손맛’을 최대한 라틴 알파벳 글자에 재현하고자 했고, 손맛이라는 정서를 이렇게 정의해 보았다. 거칠되 미려한, 투박하되 힘이 살아 있는. 내가 구현하고 싶은 이 ‘느낌’의 구상에서 핵심 키워드는 ‘힘’이다. 심미적으로 누군가의 감탄을 자아내지는 못하더라도, 누구나 글자에 실린 힘을 감각할 수 있는 글자. 내가 세운 [개항로 서체]의 디자인 전략이자 방향성이었다.

    이 글자를 서체로 만드는 것은 단순히 개항로의 터줏대감 전종원 사장님의 글자를 디지털 유산으로 남기는 작업이 아니다. 개항로 사람들(이웃 사람, 젊은 사람, 사는 사람)의 삶과 자부심을 글자로 상징화하는 일이다.

    로컬 타이포 브랜딩: 개항로 서체 개발기 #계약성사」 중

    이정은 디자이너의 위 글처럼 [개항로 서체] 프로젝트의 목적은 개인의 글씨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의 물성을 닮은 우직함. 붓의 필법을 연구하고 구현하되 붓의 방향까지는 담지 않는 획의 표현. 이것이 작업의 관건이었다.

    획이 있으면 정리하려 들고, 수평이 안 맞으면 어떻게든 맞춰야 직성이 풀리고, ⋯⋯. 서체 디자이너의 어쩔 수 없는 습성(?)은 [개항로 서체] 개발 때도 여지없이 발현되었다. 투박한 인상과 유려한 획의 연결이 공존하는 형상을 완성할 때까지(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시안 작업을 수차례 거듭했다.

    [개항로 서체] 라틴 알파벳 분석: 원도의 글자를 따라 쓰면서 획과 자소 등의 특징을 파악

    전종원 선생님의 글씨를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펜으로 직접 따라 써 보았다. 소문자 형태 스케치도 여러 장 했다. 어떤 자소에 어떤 특징을 부여해야 [개항로 서체]만의 고유성이 담길까, 라는 고민의 일환들이었다. 라틴 알파벳 펜글씨의 필순도 고려해야 했다. 그래야만 ‘손으로 깎은’, ‘손으로 쓴’ 자연스러운 미감이 온전히 묻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프리실라 존스톤(Priscilla Johnston)의 1959년 저서 『에드워드 존스톤(Edward Johnston)』을 펼쳐 보면서 라틴 알파벳 문자마다의 올바른 쓰기 순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연구했다.

    [개항로 서체]의 원형인 목간판 글씨는 펜촉(nib)이 아니라 붓으로 쓴 뒤, 자형의 윤곽을 따서 안을 파내어 완성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기인하여 나는 라틴 알파벳 글자들에 ‘생략’과 ‘꾸밈’이라는 요소를 넣었다. 예를 들면 [G]의 형태를 모노라인으로 하여 획의 이어짐을 표현한 부분, 직선미를 부각한 [y]의 획 처리 등등이다.

    [C]와 [O] 같은 곡선형 글자들이 두꺼운 획을 갖게 되면 시각적으로 힘이 느껴지기보다 그냥 덩어리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런 글자들을 작업할 때는 기울기 형태에 손을 많이 댔다. 곡선 안에서 ‘각’이 느껴지도록 하는 데에도 신경을 썼다. 이 서체는 ‘손으로 깎아 쓴 글자’니까.

    시안 검수 용지

    최종 시안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보내 피드백을 받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작업자들과 토론을 하며 또 한 차례 디자인 방향성을 맞췄다. 지금은 한글과 라틴 알파벳의 크기 및 두께 차이 보정, 문장 부호 위치와 굴림의 정도 조정 등에 집중하고 있다. 정식 출시(2023년 7~8월 예정) 전까지는 이렇게 계속 다듬고 벼리는 과정이 이어질 것이다. 완성될 모습을 기다려 주시기 바란다. (다음 연재에서 계속)

    이가희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 소속 시니어 디자이너. 넥슨 〈HIT2〉 게임서체, 국립한글박물관 [덕온공주체] 등 다양한 전용서체를 위한 타입을 기획하고 가르친다. 국립한글박물관 연구원으로 일했고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강의했으며 현재 윤디자인그룹 TDC에서 타입 디자인 및 연구, 워크숍 등을 진행하고 있다. @ganada.type

    Popular Series

    인기 시리즈

    New Series

    최신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