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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훈의 글자발견 #13 현대사 속 희로애락, 목포

    시리즈의 마지막 여행지, 항구 도시 목포


    글·사진. 한동훈

    발행일. 2023년 03월 30일

    한동훈의 글자발견 #13 현대사 속 희로애락, 목포

    한반도 서남쪽,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전라남도 땅 끝자락에 위치한 목포(木浦). 1897년 개항한 이래 오랫동안 한국의 주요 도시로 꼽힌 곳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지형상 이점을 살린 목포항의 발전으로 전국 6대 도시의 위상을 가질 정도로 크게 번성했다.

    그러나 이후 산업화 속에서 다른 도시에 밀려 발전이 정체되며 지금은 인천이나 부산에 비할 수 있었던 예전만은 못하게 되었다. 다만 그 덕분에 전성기의 건축이나 시각 유산들이 유실되지 않고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목원동, 유달동, 만호동 일부를 아우르는 목포 원도심에는 근대 격동기 속에서 형성된 고유의 문화 자산이 적지 않다.

    「목포의 눈물」과 해태 타이거즈

    목포역 근처에 있는 ‘목포 대중음악의 전당’ 건물은 그 전체가 문화재다. 건립 당시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으로 쓰였던 이곳은 목포에 남은 유일한 근대 금융 부문 건축물이다. 2002년 국가등록문화재 29호로 지정됐고 2022년 9월부터 대중음악의 전당 건물로 쓰이고 있다.

    구 호남은행은 1920년 일제 자본에 대항해 호남 지역 주요 인사들이 민족 자본을 모아 설립한 은행. 목포지점은 9년 후인 1929년 세워졌다. 원래 건물의 요소를 그대로 활용한 현관에는 ‘株式會社 朝興銀行 木浦支店(주식회사 조흥은행 목포지점)’이란 한자가 석재에 음각되어 있다.

    ‘朝興(조흥)’ 부분은 원래 ‘湖南(호남)’이었다가 나중에 이름이 바뀌면서 부분적으로 교체한 것이다. 힘을 주체하기 어려운 ‘行(행)’에서 보이듯, 전체적으로 활달하게 대지를 누비는 먹의 기상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한 인상이다. ‘浦(포)’에는 원래 찍혀 있어야 하는 오른쪽 위의 점이 없는데,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공통된 것은 ‘나중에 찍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유가 어찌 됐든 간판 글자는 점이 생략된 채로 지금까지 남았다.

    대중음악은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나 있기 마련인데 이곳만이 가진 특별함은 무엇일까? 그 특색을 만들어 주는 인물이 있다. 목포가 낳은 가수 이난영(1916~1965)과 김시스터즈다. 이난영은 당대 주류와 다른 모던 재즈풍 음악을 일찍부터 구사하여 한국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 받는 원로 가수다.

    이난영이 주로 활동한 일제 강점기는 현대적인 레코드판 유통 환경을 포함한 대중음악 시장의 여명기였다. 1934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공모전에서 목포 출신 시인 문일석이 쓴 「목포의 눈물」이 당선됐다. 메이저 음반사였던 오케레코드는 여기에 작곡가 손목인의 곡을 붙였고, 이를 이난영이 취입하여 노래가 완성됐다.

    애절한 가사와 보컬이 돋보이는 「목포의 눈물」은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100년 가까운 노래 제목이 지금까지 회자된다는 점에서 그 파급력을 알 수 있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제목이 가진 어딘지 모를 아련함과 암암리에 존재했던 호남 차별이 더해져 1980년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 널리 불렸다고 한다. 더군다나 타이거즈는 80년대 비교 대상이 없는 대한민국 프로 야구(KBO) 최강팀으로 군림했기에, 관중은 타이거즈의 승리와 함께 울려퍼지는 「목포의 눈물」에 더욱 특별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삼학도, 유달산 등 목포 지명이 대거 등장하는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에서 군사 정권기까지 시대를 넘어 차별 받는 대중의 심리를 자극하고 또 치유하는 역할을 했다. 노래 한 곡, 사진 한 장, 또는 그림 한 장. 하나하나는 미미하게 느껴질 수 있어도 대중을 상대로 호소력을 갖게 되는 순간 그 파급력이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의식 있는 디자이너라면 이처럼 많은 이들에게 쓰이고 회자되는 작업물을 내놓고 싶은 소망을 품고 살아갈 법하다.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거나 같은 필드에서 활동하는 2세들이 적지 않다. 남편 김해송과의 사이에서 난 이난영의 두 딸도 가수의 길을 걸었다. 자매 김숙자·김애자, 조카 이민자는 1950년대 초 김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그룹을 결성해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다양한 무대에서 활동했다. 김시스터즈는 한국 걸그룹의 효시로 평가 받기도 한다.

    ‘동척에 폭탄을 던져라!’

    근대 유적이 밀집해 있어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된 원도심 일대 거리를 걷다 보면 목포근대역사관 2개 동과 만나게 된다.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붉은 외관 건물이 1관, 평지에 위치한 흰색 건물이 2관이다.

    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목포근대역사관 1관은 목포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알려져 있다. 클래식한 외관으로 드라마 〈호텔 델루나〉(2019)의 촬영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1900년 목포일본영사관으로 처음 지어졌고, 일제에 의해 목포 부청사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 1947년에는 목포시청 건물로, 시청이 이전한 1974년 이후에는 목포문화원 등으로 쓰이다가 2014년 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 목포 시가지와 생활상을 보여주는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새단장했다.

    입구 계단에 올라 문득 뒤를 돌아보니 탁 트인 원도심 너머로 바다까지 한눈에 조망이 가능하다. 2층 규모에 조선 시대 목포진 설치부터 동본원사, 양동교회, 일본인 가옥 등 건축 설명에 이르기까지 7개 렌즈로 근대 목포를 들여다볼 수 있다. 건물 뒤편에는 목포 부청사 시절 쓰이던 서고와 태평양 전쟁 말기 폭격을 피하기 위해 지어진 방공호가 있다. 1944~1945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외투를 입기엔 무더운 완연한 봄 날씨였지만 유달산 자락 암반을 파서 만든 방공호 안은 피부로 느낄 정도로 서늘했다. 철 지난 제국주의 추종자들이 벌인 의미 없는 전쟁은 많은 이들을 고통 속에 빠뜨렸다. 그런 한(恨)이 한기로 승화된 느낌이다.

    언덕을 내려와 3분가량 걸으면 만날 수 있는 2관은 1920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목포지점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1관과 마찬가지로 해방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무난하게 보존되어 온 1관과 달리, 이 건물을 쓰던 해군 헌병대가 영암으로 이전한 1989년 이후 사용 기관이 없어 철거론이 대두되기도 했었다. 다행히 1999년 철거 직전 시민들의 반대 의견이 받아들여져 위기를 넘겼다. 내부 보수를 거쳐 2006년부터 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다룬 콘텐츠를 주의깊게 봤다면 ‘동척’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접했을 법하다. 동척은 한일 병합(경술국치) 직전인 1908년, 일제가 향후 일본 농민의 한반도 이주를 돕고 한반도에서 나는 자원(주로 농업 자원)을 체계적으로 수탈하려는 목적으로 대한제국에 설립한 회사다. 영국이 식민지 인도에 세운 동인도회사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장사가 잘 됐는지 나중에는 농업 관련 금융 업무까지 소화하는 거대 기업이 되었다. 군대부터 건축 양식에 이르기까지 서구 열강의 모든 것을 모방하려 했던 일제가 행한 벤치마킹의 결정판인 셈이다.

    목포는 전라도의 풍부한 수확물을 일본 열도로 실어 가는 최전선의 항구였다. 그런 만큼 동척 목포지점 설치는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동척 최전성기에도 한반도 내 지점은 10개에 불과했는데, 그중 하나가 목포에 있었다는 점에서 과거 목포의 위상이 새삼 실감난다.

    팸플릿, 화폐, 농기구, 쌀포대 등 각종 전시물 가운데 1층 한구석에 있는 ‘동척에 폭탄을 던져라!’라는 게임 부스가 눈에 띄었다. 비치된 콩 주머니를 던져 스크린 속에 나타난 동척 건물을 제한 시간 내 폭파하면 된다. 의열단 소속 나석주 열사가 행한 동척 폭탄 테러(1926)에서 영감을 얻은 설치물로 보인다. 2층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그 뒤를 이은 노동운동, 독재 반대 투쟁을 다루는 등 전반적으로 불합리한 기득권에 저항했던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관람객 참여형 게임 ‘동척에 폭탄을 던져라!’

    근대역사관 2관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해군 헌병대가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민주화 운동 목포 사적지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 뒤편에는 1960년 4·19 혁명의 목포 지역 희생자를 기리는 ‘사월혁명학생기념비’도 서 있다. 방치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요성이 적지 않을 유적인데 검색 시 관련 정보를 찾기 어려운 점은 아쉽다. 다양한 사람들이 엮어 온 현대사 속 희로애락을 잠깐의 관람으로 체감하긴 부족하지만 최소한 그 무게만큼은 느껴졌다.

    동척 목포지점을 지나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의 서쪽 끝을 장식하는, 지붕이 유난히 높아 보이는 근대 유적이 있다. 구 목포공립심상소학교 강당이다. 옛 사진을 보면 교실 동과 강당이 일렬로 붙어 있다. 현재 교실 자리는 목포 유달초등학교 교사(校舍)로 대체됐지만, 강당만은 1929년 건립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황토색, 짙은 갈색과 격자형 창문으로 이루어진 외관이 고전적이다. 지금은 따로 쓰이고 있지는 않아 출입이 불가능하지만 내부가 보여 들여다보니 폐쇄 직전까지 초등 교육 용도로 쓰인 교실 형태를 변형 없이 간직하고 있다. 가치 높은 유적인 만큼 이렇게 두기보다 본래 가치를 살린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영화 〈1987〉 촬영지, 서산동 시화골목

    목포 고지대를 걷다 보면 낭떠러지 앞에 대문만 서 있는 듯한 시설물과 만나게 된다. 문을 열고 급경사를 내려가면 집이 나온다. 1980년대 이후 목포시 관내 평평한 간척지에 생긴 신도시 기준으로는 낯설지만, 유달산 자락의 고저 차가 큰 원도심에선 보기 어렵지 않은 광경이다.

    목포 고지대의 대문들

    이런 독특한 풍경과 언덕에 빼곡히 붙은 집들 사이 골목길을 지나 반대편 사면으로 넘어가면 서산동 일대에 조성된 시화골목이 나온다. 벽화가 많은 서산동 시화골목은 1980년대를 다룬 영화 〈1987〉(2017)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80년대 산동네 주택가 풍경이 잘 보존되어 있고, 시나리오 작가가 목포 출신이라 익숙하게 묘사할 수 있어 낙점됐다 한다.

    서산동 시화골목

    이곳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소는 아마 초입의 ‘연희네슈퍼’일 것이다. 연희네슈퍼는 〈1987〉에 등장하는 주인공 연희(김태리 분)네가 운영하는 가게다. 간판 형태는 바탕의 수직 홈 패턴부터 해태 제품 취급을 의미하는 왼쪽 해태 심벌, 네모 틀에 꽉 찬 제목용 폰트로 제작한 돌출 사인까지 나름 시대를 재현하려 했다. 그래도 고증이 2프로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연희네슈퍼’ 글자 아래쪽 숫자도 지나치게 세련되어 위화감이 든다. 이런 자리라면 세련된 고딕보다 네모 틀 안에 꽉 채워 잘라 만든 투박한 숫자가 제격이다.

    그러나 단 하나, 슈퍼 전면 구석에 붙은 ‘월드컵 운동화’ 광고는 오리지널로 보인다. 과거와의 싱크로율은 간판보다는 미닫이 창문에 붙인 사인 쪽이 더 높다. 그 근본은 디지털 서체인 [타이포_쌍문동], [배달의민족 한나체]지만 적당히 허름하게 처리해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르게 해 놓았다. 슈퍼 오른쪽 벽면에는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도 붙여 놓았다. 〈1987〉 개봉 이후 풍화가 일어난 것인지 원래 빛바랜 포스터를 붙인 것인지 몰라도 나름 신경쓴 모습이다.

    목포진에서 삼학도를 내려다보며

    다시 높은 곳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더 오래전 유적이다. 목포 역사의 시작이라 불리는 목포진은 조선 시대 수군이 주둔했던 진영(鎭營)이며 목포대라고도 불렸다. 목포진이 올라앉은 일대는 경치도 좋지만 그만큼 주변 감제(瞰制)가 유리한 땅이다. 따라서 이곳은 일찍부터 군사 용도로 활용되어 왔다. 바다 가까이 고지대에 자리한 목포진의 모습이, 동시대 유적인 여수 진남관을 생각나게 한다.

    2미터가량 높이의 성벽이 세워지고 시설이 어느 정도 갖춰진 때는 1502년(연산군 8년). 그 후 목포진은 수백 년간 조선 수군의 중요 거점으로 여겨졌지만, 근대 해군 전술이 대세가 되고 있던 1895년 고종 칙령에 의해 폐진됐다. 관리 부족으로 거의 멸실된 목포진은 2014년 홍살문과 객사를 포함한 현재의 ‘목포진역사공원’으로 새롭게 복원되어 관람객을 맞고 있다.

    공원 옆 민가에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이 소년 시절 꿈을 키운 공부방이 보존되어 있으니 함께 둘러봐도 좋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친이 운영했던 옛 영신여관 건물 전체를 그를 기리는 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1924년 신안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1936년 가족과 함께 목포로 옮겨와 1945년까지 9년에 이르는 기간을 여기서 보냈다. 시내부터 목포항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그는 어떤 심정으로 공부했을까? 한쪽 구석의 책상에 앉으면 멀리 삼학도가 보인다. 정치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의 기초가 아마 이곳에서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년 김대중 공부방

    지금도 그에 대한 평가는 진영에 따라 극과 극으로 갈리지만, 사상적 대립을 떠나 20세기 한국의 중요 변곡점을 좌우했던 거목 중 한 명임엔 틀림없다. 삼학도에 있는 ‘김대중 노벨평화상기념관’에서 그의 발자취를 더 자세히 살필 수 있다.

    밤의 목포항 일대는 멀리 삼학도에 조성된 포차 거리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조용한 풍경을 보여준다. 바닷바람만이 여기가 항구라는 사실을 일깨울 뿐이다. 근처 목포종합수산시장 가판대는 기성 폰트 일색인 듯 보이나, 고개를 숙여 원래 건물을 보면 새 간판 뒤에 붙은 원래 간판이 보이고, 만호동 거리에도 옛 글자로 된 간판과 디지털 서체를 써서 정비한 간판이 공존하고 있다.

    유달산 철거민탑 위로 케이블카가 지나고

    유달산은 목포 관내 여러 동에 걸쳐 있는 바위산이자 한반도 서남쪽으로 뻗은 노령산맥의 마지막 봉우리다. 해발 228미터에 불과한 어찌 보면 아담한 산이다. 하지만 위치로 보나 문화로 보나 명실상부한 목포의 주산(主山)이다. 근처에 유달산보다 높은 산이 없기도 하다.

    유달산은 높이에 비해 기암괴석과 절벽이 많아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 유달산 둘레길을 통해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고 노적봉, 관운각, 이순신 동상, 이난영 노래비, 이등바위, 삼등바위 등 랜드마크가 있다. 그렇다면 유달산 정상의 이름은? 퀴즈 치고는 긴장감이 안 느껴진다면 제대로 유추한 것이다. 정상은 ‘일등바위’라 불리며 이곳에 정상석이 있다. 단순히 정상에 오르려는 목적이 아니면 산자락 곳곳 볼거리를 품은 유달산을 모두 돌아보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살기 어려웠던 시절, 유적이나 국립공원 안까지 터를 가리지 않고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울 풍납토성·몽촌토성이나 경주 왕릉도 본격 조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민가가 있었고 심지어 그 위에서 놀거나 농사를 짓기도 했다. 지금은 나무와 벤치뿐인 창경궁 돈화문 옆 삼각형 대지에 자리한 공원도 원래는 주택으로 들어찬 생활 구역이었다.

    예전 유달산 자락에도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한두 세대에 불과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약 600세대에 달하는 시민들이 거주하게 됐다. 그들을 유달산 공원화 사업의 일환으로 모두 이주시키고 철거한 가옥의 자재로 쌓은 것이 1979년 12월 건립된 유달산 철거민탑 두 기다. 탑은 달성사 인근에 하나가 있고 자생식물원 앞에 또 하나가 있다.

    철거민탑 위로 북항스테이션에서 반달섬 고하도 사이를 오가는 목포해상케이블카가 지나간다. 케이블카에 탄 관광객들은 탑이 내려다 보일까. 위에서는 다른 자연 지형과 별로 차이 없이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철거민탑은 태산같이 거대해 보인다. 삼각형 모양으로 쌓아 날카로운 각 모서리가 그대로 돌출된 투박한 디자인과 그 사이로 빽빽하게 자라난 식물, 비가 추적추적 오는 흐린 날씨는 탑이 지닌 오묘하면서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가중시킨다. 공원 조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떠나간 이들이 새 터에서 더욱 대성했기를 바라 본다.

    ‘신안선’의 글자들, 역사를 밝히다

    항구 도시답게 목포시 용해동에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소속 ‘목포해양유물전시관’이 있다. 건물 전면 오른쪽에는 2000년대 이전 경향의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레터링이, 왼쪽에는 2015년 개발된 정부 상징 서체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라 써 있는 부분이 그 자체로 시대별 변천사를 보여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목포해양유물전시관

    목포해양유물전시관을 둘러싼 이야기는 1975년 여름 한 우연한 발견으로부터 시작된다. 신안 섬마을 어부의 그물에 중국 도자기가 걸려 올라온 것이다. 이를 계기로 신안 앞바다 20미터 깊이 갯벌 속에 잠든 고대 선박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시작됐다. 1970년대는 무령왕릉 발굴, 경주 천마총·황남대총 발굴 등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유적에 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 한국 최초의 수중 발굴 조사로 수중 고고학의 효시가 된 일명 ‘신안선(신안해저선)’ 역시 많은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해군 해난구조전대까지 참여하여 9년간 단계적으로 진행된 조사 끝에 신안선은 안전하게 인양됐다. 그 결과물은 1994년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개관으로 결실을 맺었다. 전시품 중 해저 유물 운반 상자 표면에 찍힌 ‘문화재관리국’ 레터링이 눈에 띈다. 세로로 긴 장방형 틀에 글자면을 꽉 채우고 가로세로 획 두께 대비를 크게 만든 모습이 요즘 폰트로 만들어 출시해도 어필할 것 같다.

    고려 시대 중국과 일본 등지를 오가며 중계 무역을 행하던 신안선은 알 수 없는 해난 사고에 의해 침몰했다. 그 사고가 무엇인지 명확히 단정할 수는 없으나, 옛 기록을 종합했을 때 태풍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바다에 가라앉은 신안선을 수백 년간 보호한 것은 두터운 갯벌층이었다고 한다. 그런 보호막이 아니었다면 선박 내 유물들은 수심이 깊고 물살이 거센 인근 바닷속에서 파손되어 진즉 드넓은 해저로 쓸려 내려가 버렸을 것이다.

    비교적 온전히 발견된 신안선이지만 물건만으로 모든 사실을 규명하기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신안선 비밀 해독의 열쇠가 된 것은 역시 ‘글자’였다. 신안선에서는 문자를 새기거나 적어놓은 나무 조각인 목간(木簡)이 대량 출토되었다. 약 360점에 달하는 목간 안에는 물품의 이름과 수량, 날짜, 화물주 등이 적혀 있었다. 이것으로 화물의 종류와 탑승자, 항해 시기 등 중요 정보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

    신안선에서 출토된 목간들

    마치 어제 역사 교보재의 일환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양호한 먹 상태를 자랑하는 목간들이 전시실 안에서 빛나고 있다. 신안선에 실렸던 고급 향나무인 자단목에 새겨진 글자도 사실 확인에 도움이 되었다 한다. 이외에도 글로 다 옮기기 어려운 일본, 중국, 고려의 생활 유물이 대량으로 전시되어 있으니 기회가 되면 필수로 들러보길 권한다.

    타이포그래퍼인 필자에게 탐나는 유물을 꼽아보라면 청동 용 모양 붓걸이, 각종 벼루, 오리 모양 청자 연적 같은 문구류를 들겠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구와 함께라면 글씨도 좋아질 것 같은 기분이니 시대를 초월한 ‘장비병’을 어찌할까.

    전시관 가까운 곳에는 ‘진짜 해양 유물’도 있다. 전시관 속 유물이 인공적이라면 이 유물은 자연이 만든 작품이다. 해안가 파도와 암석이 만나는 곳에 풍화 작용으로 형성된 ‘목포 갓바위’가 그 주인공이다. 파도로 인한 수분과 바닷물 속 염분이 암석 내부에 스며들어 균열이 발생했는데 하필 그 작용 방향이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오늘날의 형태가 됐다.

    목포 갓바위는 조형성을 인정 받아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지정되었다. 바다를 향해 있어 원래는 배에 타야 진면목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보행교가 완공되어 걸어서 편하게 볼 수 있게 됐다. 머리 위에 쓰는 것 하면 ‘갓’이 1순위로 연상되던 시대라 이름이 갓바위가 된 듯한데, 요즘 관점으로 보면 군용 철모나 야구 선수들이 쓰는 헬멧에 더 가까워 보이는 모습. 침식된 2개의 거석이 오묘한 각도로 서 있는 게 서로 대화를 나누는 형상 같기도 하고 하여튼 장관이다.

    목포 갓바위

    여느 천연기념물이 그렇듯 목포 갓바위에도 전설이 존재한다. 부모에게 효를 다하지 못한 아들이 큰 갓을 쓰고 자숙하다가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암석들이 고개를 들었다기보다 숙인 쪽에 가깝고, 사람으로 치면 얼굴에 비유되는 앞부분까지 갓이 덮여 있어 이런 전설이 나온 게 아닐까. 모르긴 몰라도 하늘을 향해 고개를 꼿꼿이 쳐들었다면 전설이 달라졌으리라⋯. 실없는 상상도 해보게 된다.

    목포문학관에서 만난 ‘목포 문인’ 4인의 숨결

    개인적으로 방문하고 싶었던 ‘목포문학관’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바닷바람에 무심코 넘기기 쉽지만 목포는 타 지역과 견주어도 눌릴 것이 없는 문향(文鄕)이다. 목포문학관은 목포 출신이거나 이곳에 깊은 연고를 가졌던 작가인 차범석, 박화성, 김현, 김우진 총 4인의 삶의 발자취를 정리해 둔 공간이다. 한 사람당 하나씩 총 4개 관으로 꾸며져 있다.

    목포문학관

    목포에서 태어난 극작가 차범석(1924~2006)은 해방 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등 여러 행로를 걷다가 1949년 제1회 전국남녀대학 연극경연대회를 시작으로 오랜 꿈이었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51년 목포문화협회 주최 예술제에서 최초의 연극 〈별은 밤마다〉를 연출한 데 이어 「닭」, 「제4의 벽」, 「풍랑」 등 희곡들을 남겼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밀주」가 가작으로 입선했고, 이듬해엔 「귀향」이 당선되면서 직업 작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는 계기가 됐다.

    차범석의 경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1961년 입사한 문화방송 시절과 비슷한 시기 창단하여 20년간 이끈 극단 ‘산하’일 것이다. 따로 연극 관련 취미가 없는 일반인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작품은 아마 MBC 드라마 〈전원일기〉(1980~2002)가 아닐까. 그는 〈전원일기〉 첫 화의 집필을 맡아 48회까지 이끌었다.

    창작자로 살면 좋은 점은 정년이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약화되기는커녕 세계가 깊고 넓어진다는 것이다. 그가 남긴 방대한 작품 속에서, 무엇보다 다작이 으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낀다. ‘한국 연극사에서 최고의 사실주의 희곡 작가’(월간 『객석』)라는 평가를 받는 차범석은 본업인 희곡 집필 외에도 수필집, 번역서, 자서전, 평론집 등 저작물을 남겼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이를 둘러싼 티켓, 팸플릿, 원고, 각종 증서, 공연 포스터, 기사 스크랩 등 다양한 원본 전시물이 작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소설가 박화성(1904~1988, 본명은 김경순)은 1925년 22세에 등단하여 타계할 때까지 80여 편이 넘는 소설과 희곡, 수필, 평론 등을 남겼다. 보수적이고 불합리한 구조로 여성이 드물었던 당시 문학계에서 ‘여성 최초’를 여러 번 기록한 작가이기도 하다.

    조용한 인상과 달리 박화성이 남긴 작품은 잘 알려진 등단작 「추석전야」, 「하수도 공사」에서 나타나듯 뚜렷한 사상성과 고발성으로 확고한 영역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경력 초창기에 보여준 리얼리즘 소설로 시작해 광복 이후에는 일상을 다룬 대중 소설까지 그 영역을 넓혀 갔다.

    차범석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예술원 소속으로 활동한 박화성의 4남 1녀 역시 모두 문학을 전공했고, 며느리까지 문학과 직업적으로 연을 맺었다. 진정한 문인 가족인 셈. 문학관에는 박화성의 작가 생활 관련 자료가 정리돼 있다 보니 그 시절 출판 계약서도 있는데 어쩐지 남 일 같지 않다. 서명을 만년필로 했는지 두껍게 멍울진 상태로 바래진 잉크의 흔적이 보인다.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의 본명은 김광남이다. 7세에 목포로 이주하여 유년 시절을 보냈고 서울대 문리대와 동 대학원 불문과를 거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유학했다. 1962년 ‘김현’이라는 필명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 1970년 계간 『문학과지성』 창간 주축이 되었다.

    김현은 지병으로 일찍 작고하기 전까지 서울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비평서와 연구서를 냈다. 단독 저서만 20권이 넘고 공저와 번역서를 합치면 지평은 무한대로 넓어진다. 웬만한 문인보다 인지도 높은 평론가인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반가웠다. 다른 목적으로 간 여행에서 궁금했던 인물을 생각지도 못하게 마주친 느낌이다.

    문학관에는 김현이 생전 주고받았던 편지나 영수증, 개인용 컴퓨터 구입 기록, 병원 카드까지 있어 근현대 시각 문화를 살피는 데도 간접적인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시각 디자이너 김진평이 작업한 서울여자대학교 로고타입과 같은 룩으로 그려진 ‘서울내과병원’ 카드를 들 수 있다. 같은 룩을 가진 시각물은 두 기관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암시한다. 김현이 집필한 저서의 실물 북 디자인,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담긴 평소 사진 속 술병 라벨 같은 소소한 시각물에도 눈길이 간다.

    필기구로 전시된 것은 청색 파카45 볼펜·만년필 세트다. 그 시절의 파카는 51, 21, 45, 75 등 라인업을 세계적으로 잇따라 히트시킨 만년필 업계의 대표 주자였다. 고유의 화살 클립은 품질 보증 수표와 같았다. 다만 파카45 볼펜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같은 메이커의 조터 볼펜을 대신 넣어 놓았는데 고인이 원래 그렇게 사용했는지 아니면 고증 오류인지는 알 수 없다.

    극작가 김우진(1897~1926)은 목포에서 해외 우편물이 들어오는 유일한 집에 살았던 대지주 김성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동 김씨 가문 서자였던 김성규는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했으며 서자로서 겪는 불합리한 점을 타파하고자 자신의 호를 써서 초정(草亭) 김씨로 분파하며 종조(宗祖)가 되었다. 그런 자수성가형 인물이었으니 장남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음직하다.

    김우진은 1915년 부친의 뜻에 따라 가업을 잇고자 일본 구마모토농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감수성이 풍부했던 김우진은 일찍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고 자신의 커리어를 두고 집안과 지속적 갈등을 겪었다. 결국 1924년 6월 목포로 귀향한 그는 부친이 운영하던 재산관리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했지만 문학 작품 창작도 게을리하지 않아 「정오」, 「이영녀」, 「난파」, 「산돼지」 등 희곡과 「곡선의 생활」, 「생명력의 고갈」, 「출가」, 「신청권」 등 수필을 남겼다. 워낙 삶이 짧은 만큼 작품량이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경향을 파악하기엔 충분하다. 한자가 가득한 세로쓰기 친필 원고지에서 세월의 무게가 엿보인다.

    김우진의 극적인 최후는 생전에 남긴 작품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유명해졌다. 1926년 8월 3일 밤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부관연락선 도쿠주마루(徳寿丸, 덕수환)에 탄 김우진은 승객들이 잠들어 있던 새벽 어느 시간에, 같은 배에 탑승해 있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함께 실종됐다. 남은 것은 가명으로 남긴 ‘짐을 집으로 보내달라’는 쪽지 한 장. 사람이 사라진 곳에는 검고 푸른 바닷물만 넘실댈 뿐이었다.

    수색 작업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목적지에 내린 사람들은 탑승객 총원보다 두 명이 적었다. 김우진과 윤심덕. 같이 투신했다고는 하나 뜻을 품고 계획된 자살이라면 있기 마련인 유서가 없고 두 사람의 투신 장면을 본 사람도 없었다. 윤심덕 역시 김우진만큼 전도유망한 예술가였기에 언론 입장에서 이보다 더 다루기 좋은 스캔들은 없었다.

    언론은 연인이 불가항력적 요인에 부딪혀 동반 자살을 했다는 뜻의 ‘정사(情死)’로 이 사건을 규정했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젊은 비운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윤심덕이 실종 직전 녹음한 곡 「사의 찬미」가 수록된 레코드는 덧씌워진 비운의 그림자를 등에 업고 전대미문의 판매고를 올렸다.

    ‘정사’는 자극적 헤드라인에 골몰하여 나온 단어에 가깝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모르는 사이까진 아니었지만 서로를 위해 죽음을 택할 만큼 열렬히 사랑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심지어 마주친 횟수도 손에 꼽으며, 연인 관계가 맞는지 불명확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저런 부족한 정황은 사실 두 사람이 다른 곳에 살아 있다는 음모론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이탈리아 생존설을 다룬 조선일보 1928년 1월 10일자 기사가 그 예다. 한편 음악평론가 강헌은 저서 『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 1』에서 돈을 바탕으로 한 타살설에 무게를 싣는데, 정확히는 이 사건을 사전 스토리에 따라 전개된 ‘기획 자살’로 규정했다.

    진상이 무엇이든 김우진과 윤심덕은 도쿠주마루 탑승을 마지막으로 모습을 영원히 감추었다. 조금 옆으로 빠져 보자면, 「사의 찬미」가 본격적으로 열어 젖힌 대중음악계엔 이후 이렇다 할 인기작이나 발전적 계기가 없었다 한다. 그러던 1935년 또 한 노래가 발표되어 전국적 히트를 기록하니 그것이 「목포의 눈물」이다. 이만하면 목포는 문향이자 예향(藝鄕)으로 불릴 만한 정통성이 충분한 셈이다.

    ‘삼화철물’ 간판 글자 해석과 파생

    목포 원도심에 속하는 영해동 골목길 속 철물점인 ‘삼화철물’ 간판 글자는 획 안에 도시의 오랜 역사를 담은 듯한 인상이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오래된 간판 글자가 다채롭지만은 않다. 오히려 표현 수단의 제약으로 인해 오늘날보다 조형이 천편일률적인 경우도 많다. 그러나 ‘삼화철물’ 글자는 해서체에 가까운 한글 명조와 ‘순명조’로 불리는 한자 명조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디자인으로 주변 간판들 중 돋보였다. 위쪽의 ‘철물 보도 농기구 도산매’ 역시 같은 서체로 돼 있다면 좋았겠지만 이 정도도 충분하다. ‘심화철물’ 글자의 주요 DNA를 살펴보자.

    삼화철물 간판

    ▷ 초성 크기가 현 상용 폰트에 비해 큰 편이다.
    ▷ 종성 크기 역시 글자폭 전체와 비슷할 정도로 커서 온자 전체가 꽉 찬 네모 틀이 되었다.
    ▷ 중성 부리의 경사가 타 명조 폰트에 비해 급한 편이다.
    ▷ 초성 [ㅎ]의 꼭지가 서 있으며 [ㅇ] 상투가 투박하다.
    ▷ 종성 [ㅁ]의 아래쪽 가로 획이 오른쪽으로 눈에 띄게 길게 뻗어 있다.
    ▷ [철]과 [물]의 종성 [ㄹ] 꺾임 부분 형상이 미묘하게 다르다.
    ▷ 중성 세로기둥 맺음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로 모이면서 끝난다.
    ▷ [화]에서 초성과 중성의 결합이 아래쪽에서 이뤄져 온자 전체의 무게 중심이 아래로 쏠렸다.
    ▷ 전체적인 획 전개가 급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또박또박 쓴 듯한 인상을 지닌다.
    ▷ 초성 [ㅅ], [ㅊ] 오른쪽 내릿점 모양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자유 곡선에 가깝다.

    DNA를 분석했다면 파생 원리에 의해 다른 온자도 만들 수 있다.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원본 글자를 정제하고 ‘글자의 발견 / 목포는 항구다 / 목포진에 부는 거센 바람’이라는 문자열을 파생해 보았다. 목포의 과거에서 비롯된 일본풍 분위기에서 나온 한자 명조 분위기를 녹여서 다양한 시점이 공존하는 도시 분위기를 표현했다.

    두께는 제목용으로 쓰였을 때 다양한 환경에서도 뭉개지거나 손실되는 부분이 없는 정도로 만들었다. 현재 유통되는 폰트 중 같은 장르에 속한 것을 꼽으라면 [Sandoll 광야]나 [Sandoll 동백꽃]을 들 수 있겠다. 글자폭은 고정폭, 970유닛(Unit)으로 동일하게 설정했다. 주요 온자의 정제와 파생 방법을 설명한다.

    ▷ 원본: [삼], [화], [철]

    [삼]은 종성이 컸던 온자 내 초성·중성·종성의 비율을 정리하여 초성을 키우고 종성을 축소시켰다. 이와 함께 확실하지 않았던 선을 돌출부는 키우고 애매한 곡선은 각을 살려서 확실히 잡아주었다. 온자의 척추 역할을 하는 세로 기둥 부리의 경사가 너무 급하면 온자 전체가 불안정해질 수 있으므로 과하지 않은 선에서 경사를 완화시켰다.

    종성 [ㅁ] 아래쪽 가로획은 특성을 너무 평범하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길이를 줄여 균형을 맞추었다. 초성 [ㅅ]의 내릿점은 성격이 불분명했던 원본에서 벗어나 한자 명조에 가까운 물방울 모양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화] 역시 초성 [ㅎ]이나 중성 [ㅗ]에서 보이는 애매한 곡선을 글자 아이덴티티상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살리고 불필요한 부분은 없앰으로써 정리해 준다. [ㅎ] 꼭지의 기둥 두께는 세로기둥보다 살짝 두껍게 만들어 존재감을 키워준다. 크기가 작아 일체감이 떨어지는 [ㅇ] 꼴은 크기를 키워 온전한 [ㅎ] 한 덩어리로 보이도록 만든다. 애매한 디자인의 원본 [ㅇ] 꼴 상투는 위쪽으로 돌출시키고 외곽선을 다듬어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이와 함께 ‘[ㅎ]+[ㅗ]’ 부분 전체를 위쪽으로 끌어올려 온자의 무게 중심을 중앙보다 살짝 위로 맞춘다.

    [철]의 초성 [ㅊ]은 초성 [ㅅ]과 마찬가지로 왼쪽 빗침과 오른쪽 내릿점에 명쾌한 캐릭터를 부여한다. 세로기둥 위치는 [ㅏ]와 똑같이 맞추면 안 되고 [ㅏ]의 기둥보다 좀더 오른쪽으로 나간 위치로 잡아야 다양한 온자 안에서 글자폭이 균일해 보인다. 종성 [ㄹ]은 마찬가지로 선을 정리해주되 왼쪽 위 시작 부분보다 오른쪽 아래 맺음 부분의 부리가 살짝 크도록 만들어 안정감을 부여한다.

    ▷ 가로모임꼴 민글자: [자], [다], [바]

    [자]의 초성 [ㅈ]은 원본에 없으므로 새로 제작해야 한다. 갈래지읒과 꺾임지읒 중 갈래지읒을 택했다. 세로기둥 위치는 [삼]의 [ㅏ]에 비슷하게 맞춘다.

    [다]의 초성 [ㄷ]은 원본에 없으므로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위쪽과 중간 부분은 기존 자소를 참고하되 아래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획은 [화]의 [ㅗ] 부분을 참고하여 제작한다. 이때 획의 강약이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가져와서 붙이기보다 시안에서 보이듯 비교적 매끄러운 꺾임 형태로 붙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바]의 초성 [ㅂ]은 양쪽 세로기둥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형태로 만들되 변주를 위해 가운데 가로획은 붓의 느낌을 특히 살렸다.

    ▷ 가로모임꼴 받침글자: [항], [진], [람]

    [항]의 초성 [ㅎ]은 [화]를 참고하여 만들되 받침이 없었던 [화]와 달리 받침이 오기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일단 높이를 높여 받침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 준다. 이때 [ㅎ]의 높이는 시각적으로 중성 세로 기둥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 [ㅎ]이 너무 올라오면 온자가 오른쪽으로 비틀려 보인다.

    한글 디자인에서 왼쪽 자소의 위치가 낮은 경우는 오른쪽으로 상승하는 듯한 흐름이 형성되어 독자에게 익숙하지만, 오른쪽 자소가 낮으면 글줄 진행 방향과 시각적 흐름이 역전되어 마치 보행을 막는 턱처럼 거슬리게 된다. 요소나 구조는 조금씩 다르지만 세계의 각 문자 디자인 원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진]의 초성 [ㅈ]은 [자]의 [ㅈ]을 참고하되 위아래 높이를 줄여서 만든다. 종성 [ㄴ]은 중성 세로기둥의 부리와 [ㅁ]의 꺾임, 가로보의 맺음을 참고하여 만들면 된다.

    [람]에서 종성과 중성을 이루는 ‘[ㅏ]+[ㅁ]’은 [삼]에서 가져오되 초성 [ㅅ]보다 [ㄹ]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므로 종성 [ㅁ]을 20유닛가량, 혹은 그 이상 낮춰 준다. 이때 필요하면 가로획 두께도 조금씩 빼 줘야 한다. [ㅁ] 높이를 낮춰 보고 두꺼워졌다 싶을 때 빼주면 된다.

    초성 [ㄹ]은 종성 [ㄹ]을 참고하여 만들되 마지막 획은 초성 [ㄷ]에서 가져와서 오른쪽으로 상승하는 상태로 마감시킨다. 이로써 [ㄷ]과 [ㄹ], 그리고 이음보 [ㅘ]가 시각적 연결(혹은 통일)을 이루었다. 한글 디자인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작업이 시각적 연결 상태를 만들고 강화해 나가는 것이다.

    ▷ 세로모임꼴 민글자: [포], [구], [부]

    [포]의 초성 [ㅍ]은 원본에 없으므로 새로 제작해야 한다. 크게 중간 세로획 2개를 ‘점+기둥’ 형태로 처리하는 것과 기둥 2개로 처리하는 것, 두 가지 형태를 고려할 수 있다. 여기서는 [ㅅ], [ㅈ], [ㅊ] 꼴 내릿점과의 시각적 연결을 위해 점과 기둥이 혼합된 형태로 디자인했다. 온자가 네모 틀에 꽉 찬 콘셉트이므로 가로보 높이를 낮추고 [ㅍ]의 좌우 폭도 늘리는 등 커 보이게 디자인한다. 단 [물], [목], [는] 등 다른 세로모임꼴에 쓰이는 초성과 비교 시 넓거나 좁으면 안 되고 비슷한 폭을 가져야 한다.

    [구]의 초성 [ㄱ] 맺음 부분은 평범하게 중앙으로 모아서 마감하거나 가로보와 연결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이 서체가 가진 멋을 살리고자 한자 명조에서 볼 수 있는 삐침을 써서 왼쪽으로 흘리며 마감해 보았다.

    중성 [ㅜ]의 세로기둥은 [ㅏ], [ㅣ] 등과 같은 두께를 지닐 수도 있지만 허전하다 싶으면 최대 4~5유닛 정도는 더 두껍게 해도 괜찮다.

    [부]의 초성 [ㅂ]은 [바], [발]에서 보여준 [ㅂ] 형태를 따르되 폭이 좁아서 중간 가로획도 짧았던 앞선 경우와 달리 자소가 가로로 넓으므로 중간 가로획을 오른쪽으로 더욱 과감하게 그은 듯한 느낌으로 만들어 준다. [ㅍ], [ㄱ], [ㅂ] 초성 폭을 비교하여 보기에 지나치게 좁거나 넓은 자소가 없도록 한다.

    원본의 요소를 어떻게 해석하여 적용하는가에 따라 여러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이번에는 원본 특징을 살리고 이를 더욱 정제하여 도시 환경에 어울릴 만한 서체를 개발했다. 온자를 가상의 네모 틀에 크게 채우되 개별 자소는 유연한 곡선 위주로 디자인하여 항구 근처 시장 간판에 써도 위화감이 없도록 하였다. 여기서는 명조 형태를 그대로 따랐지만 뼈대는 그대로 두고 고딕 혹은 제삼의 형태로 리디자인도 가능하다. 선택은 디자이너의 몫이다.


    필자 인사말
    [한동훈의 글자발견] 연재를 마치며

    지난 1년간 국내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시각적 가치가 큰 글자를 발견하고 그 과정을 글과 서체로 남겼습니다. 디지털 폰트의 홍수 속에 이미 어디를 가더라도 지역색은 무의미한 수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염려는 염려일 뿐, 찾아간 곳들은 언제나 기대 이상의 것을 제게 전해 주었습니다.

    연재는 일단 막을 내리지만 서체 디자이너로서의 ‘글자발견’은 계속됩니다. 『타이포그래피 서울』과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거리 글자나 무료 폰트를 재료로 한글 디자인 원리를 더 깊이 설명하게 될 새 시리즈(2023년 5월부터 연재)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서체 디자이너.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산돌을 거쳐 ㈜티랩에서 근무했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 등에 글을 기고했으며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 온라인 플랫폼 클래스101, 이도타입에서 서체 디자인을 가르쳤다.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donghoonha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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