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문의





    검색

    닫기
    t mode
    s mode
    지금 읽고 계신 글

    페이퍼 로드, 紙的 想像의 길

    옛날 옛적 아시아의 상인들은 6,400km에 달하는 먼 길을 걸어 서양에 당도했다.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고원을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상인들은 주로 비단을 짊어지고 이 길을 건넜다.


    글. TS 편집팀

    발행일. 2012년 05월 09일

    페이퍼 로드, 紙的 想像의 길

    옛날 옛적 아시아의 상인들은 6,400km에 달하는 먼 길을 걸어 서양에 당도했다.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고원을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상인들은 주로 비단을 짊어지고 이 길을 건넜다. 비단은 동서양 각지에서 온 이웃 상인들에게 팔려갔고, 곧 이 길은 ‘실크로드’라 불리는 동서양 문화 교역로가 되었다.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는 이 실크로드를 여행한 뒤 <동방견문록>을 집필해 당시 동양 문명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취재·글. 임재훈

    지금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페이퍼 로드, 지적(紙的) 상상(想像)의 길>(이하 페이퍼 로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두성종이가 3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전시로 부제는 ‘아시아 문화 교류의 길트기’이다. ‘페이퍼 로드’와 ‘길’이라는 두 단어가 오래전 비단길을 걷던 상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비단길은 종잇길로, 상인들은 디자이너들로 바뀌었을 뿐이다.

    전시 첫날, 개장 시간인 오전 11시에 맞춰 도착한 첫 번째 관객들

    지적 상상의 길을 트기 위해 모인 참여작가들은 한국·중국·일본·대만의 시각디자이너 약 160명. 전시에는 이들의 그래픽디자인 포스터, 북디자인 작품, 종이 문화상품 등 600여 점을 비롯해 일본 종이회사 다케오가 수집하고 타마미술대학이 소장해온 명작 타이포그래피 포스터 100점도 함께 소개되고 있다. 총 700여 점 전시작들의 공통점은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아시아 4국의 문화가 고스란히 새겨진 종이인 셈이다. 이 수백 장의 종이들이 길고 넓은 전시장에 길처럼 놓여 있다.

     제 1, 2관에 전시된 1900년대 명작 타이포그래피 포스터들

    포스터 및 북디자인 작품이 전시된 제1·2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널찍한 통로가 눈에 띈다. 작품들은 낮고 긴 테이블과 벽면에 나뉘어 전시되어 있는데, 이런 구조가 통로를 더 넓게 느껴지도록 한다. 관람객들은 테이블에 놓인 전시작들을 내려다본다.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허리를 숙여야 한다. 그러다가는 벽에 걸린 작품을 쳐다보기도 한다. 길을 걸으며 경치를 감상하듯 넓은 통로를 따라 종이를 관람하게 되는 구조다.

    두껍거나 얇고, 빳빳하거나 연하고, 펴져 있거나 구겨져 있고, 반듯하거나 비뚤어진 가지각색의 종이들은 모두 실용품으로 제작된 것이다. 아시아 각국에서 책 표지, 전시 홍보 및 캠페인 포스터, 리플릿 등으로 사용되었다. 모양과 언어는 다르지만,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한 공통의 목적을 가진 것들이다. 한글·가나·한자 타이포그래피로 쓰여진 종이들이 길게 나열된 모습은 자연스레 전시 부제인 ‘아시아 문화 교류의 길트기’를 연상시킨다.

    소담한 규모인 제3관에는 종이 문화상품만을 따로 소개하는 특별전 ‘페이퍼 프로젝트(Paper Project)’가 마련되었다. 피아노·합시코드·바이올린 등 모형 악기부터 페이퍼백, 달력, 램프 커버, 휴대전화용 스피커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제1·2관의 종이들이 포스터와 책 표지의 형태로 정보를 전달한다면, 제3관의 종이들은 부피와 질감을 가진 오브제로써 감정을 표현한다. 이처럼 <페이퍼 로드>의 전시작들은 평면성과 입체성을 동시에 지닌 종이만의 특징을 눈으로 확인하게 해준다.

    특별전 ‘페이퍼 프로젝트’ 전시작 일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정병철 / 오쿠무라 아키오 / 김치호 / 일본 디자인 회사 ‘굿모닝’의 작품

    이번 전시 참여작가인 한국의 이나미는 종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생각을 담기 위한 최소한의 물리적 조건을 지닌 몸.” 또 다른 참여작가인 중국의 양린칭은 종이와 컴퓨터의 차이를 일러 “정보뿐만 아니라 개인의 감정 혹은 기억까지도 담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두 디자이너의 말을 참고했을 때 <페이퍼 로드>의 주제는 제1·2관에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입구에는 “디지털 미디어가 넘쳐나고 있는 이 시대에 종이라는 아날로그 미디어를 통해 그 문화 교류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자”라고 적혀 있다. 또 출구 가까이에는 하라 켄야의 포스터 작품 ’지평선’이 배치되어 있다. 평면의 종이 위로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의 먼 풍경이 보인다. 이곳은 오래전 실크로드의 거점이었다고 한다. 현대 동방의 페이퍼 로드 역시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아우르는 문화 교역로가 되지 않을까. 물론 그 길은 멀 것이고, 비단 상인들처럼 종이를 실어나르는 이들이 많아야 할 것이다.

    무인양품(無印良品, MUJI)의 캠페인 포스터 ‘지평선’
    2003년 무인양품 아트디렉터였던 하라 켄야가 비움(空)을 주제로 작업했다.

    길, 道, Road를 이은 개막식

    5월 7일 전시장에서 진행된 개막식은 ‘길을 잇다’를 주제로 한 특별 행사로 꾸며졌다. 한국의 강병인과 중국의 칸타이킁이 캘리그래피 퍼포먼스를 펼쳤다. 두 손에 대형 붓을 쥔 두 작가는 긴 화선지 양 끝에 서서 인사를 나눴다. 강병인은 한글로 ‘길’을, 칸타이킁은 한자 ‘道’를 써내려가며 화선지 중앙에서 각자의 획을 하나로 이었다. 맨발로 화선지 위에 오른 강병인은 젊은 관객들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길’과 ‘道’를 이은 강병인과 칸타이킁
    칸타이킁과 강병인의 낙관

    개막식장을 가득 메운 일반 참석자와 참여작가 역시 두성종이에서 준비한 종이를 나눠 갖고 서로의 것과 이었다. 아시아 문화의 교류, 작가와 독자 간 교류의 길을 튼다는 의미였다. 캘리그래피 퍼포먼스가 끝난 화선지는 참석자들을 위한 방명록이 되었다. 붓펜을 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손글씨로 짧은 메시지를 적었다. 화선지는 이내 한글과 한자로 가득 채워졌다. 전시장 안에 묵향이 진해지자 관객들의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한 젊은 서양인이 나이 지긋한 한국인 작가에게 붓펜 사용법을 묻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개막식 참석자와 참여작가들이 함께 남긴 손글씨 메시지

    제3관에서 판매 중이던 도록을 펼쳐보니 이런 글이 적혀 있다. “한·중·일은 더 이상 경쟁의 상대가 아니라 공생의 동반자라는 것을 재인식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길트기, 바로 도통(道通)하는 것이니까요.” 개막식에 서양인 관객들도 다수 참석했던 걸 생각하면, 길·道·Road 세 가지가 통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Popular Review

    인기 리뷰

    New Review

    최신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