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의 압박, 계속되는 회의, 끊임없는 수정 등의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한 벌의 폰트는 완성된다. 이렇게 부화한 글자들이 세상 곳곳에서 제 위치를 찾아 활용되는 모습은, 그 글자들을 잉태했던 폰트 개발자들에게 남다를 것이다. 윤디자인연구소의 [올레체] 개발팀 멤버인 김우리 팀장과 김태희 주임은 그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안다. 소녀처럼 앳된 외모의 두 사람이 “산고(産苦)”라는 단어를 말할 정도이니.
『타이포그래피 서울』(이하 TS)
두 분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우리
저는 [올레체] 라틴 알파벳 폰트를 개발한 김우리입니다. 이렇게 간단히 소개해도 되는 건가? 너무 짧지 않아요?
김태희
저는 [올레체] 한글 폰트를 개발한 김태희입니다. 따로 소개 멘트라도 준비할 걸 그랬나 봐요.
TS
괜찮아요. 다음에 뵐 때는 아이돌 그룹들이 하는 것처럼 소개해주세요. ‘우리는 OO입니다!’ 이렇게.
김우리
그것도 재미있겠다.
5년차 팀장과 2년차 주임의 대형 프로젝트
TS
[올레체]가 ‘iF 디자인 어워드’ 수상했을 때 엄청 뿌듯했겠어요.
김우리
그랬죠. 내가 낳은 자식이 세계무대에 나가서 장한 일을 해준 기분이랄까?
김태희
맞아요. 특히나 [올레체]는 만들 때 하도 고생을 해서.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텐데’라는 후회도 들고. [올레체] 개발을 맡았을 때 제가 2년차라서 배울 부분들이 많았거든요. 조금 헤매기도 했고. 5년차였던 김우리 팀장님은 엄청 노련하셨죠.
TS
2년차 디자이너로서는 꽤 거대한 프로젝트를 맡은 셈이군요?
김태희
그랬죠. 보통 첫 2년간은 웹 폰트나 모바일 폰트를 먼저 개발하거든요. 기업 전용서체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2년차 디자이너가 맡는 일은 드물죠. [올레체] 개발팀이 꾸려질 시기에는 회사 인원이 지금처럼 많지 않아서 제가 담당자가 된 거예요. 박윤정 이사님(윤디자인연구소 서체 디자인팀 수장)이 잘할 수 있을 테니까 한번 맡아보라고 하셔서 자신감을 얻었어요. 저한테는 버겁기도 했지만, 그만큼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아요.
TS
기획 단계 때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김태희
개발팀을 이끄셨던 박 이사님이 당시에 유럽으로 출장을 가셨어요. KT에 보여줘야 할 시안을 이사님께 이메일로 승인 받기로 돼 있었죠. 그런데 이사님이 이메일 수신을 안 하시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현지 인터넷 사정이 안 좋아서 이메일 확인 자체가 불가능했대요. 시안이 자꾸 늦어지니까 KT 쪽에서 불만을 터뜨렸죠. 저한테 독촉 메일을 보냈는데,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무섭기도 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걱정도 되고. 결국 사장님(편석훈 윤디자인연구소 대표)이 직접 KT 관계자들을 만나서 마무리를 지으셨죠.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김우리
맞아요. 진짜 힘들었지(웃음). [올레체]는 아이데이션 기간도 다른 폰트에 비해 엄청 오래 걸렸어요. KT 쪽에서 가독성보다는 유니크한 이미지가 더 강조되기를 원했는데, 개발자 입장에서는 가독성을 아예 배제할 수가 없으니까. 확 튀면서도 어느 정도 가독성까지 갖춘 이미지를 생각해내야 했죠.
김태희
그때 사장님은 파격적인 디자인을 원하셨거든요. 한글 폰트를 세벌체로 디자인하자고 제안하셨죠. 그런데 저는 안정적인 디자인이 좋다고 생각해서 사장님이랑 맞짱을 뜨기로 했어요(웃음). 실제로 그랬다는 건 아니고, 제 의견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김우리
최종 완성된 [올레체]가 약간 탈네모꼴 구조잖아요. 파격적이면서 안정감도 있고. 사장님과의 의견이 절충된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김태희
그렇죠. 사장님이랑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합일점을 찾아나가는 과정도 무척 생산적이었던 것 같아요.
이탤릭체 개발과 힌팅 작업의 어려움
TS
[올레체]가 한글 폰트로는 처음으로 국제 디자인상을 받은 거잖아요. 수상 이유에 대해 자평한다면?
김우리
[올레체]의 가장 큰 특징은 한글과 라틴 알파벳 폰트의 디자인적 통일성이라고 생각해요. 두 개의 다른 언어가 디자인적으로 괴리감 없이 느껴지는 거죠. 또 외국의 폰트 개발자들은 알파벳 디자인은 익숙해도 한글 디자인은 생소할 테니까 [올레체]가 새롭게 느껴졌을 것 같아요.
김태희
맞아요. 그리고 [올레체]는 직선과 곡선이 50대 50으로 적절히 배합된 것 같아요. 부드러우면서도 곧은 이미지랄까. 친근하고 신뢰감을 주는 인상이죠.
김우리
이번 수상이 외국인들에게 한글의 다양한 서체들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직까지 외국인들은 한글을 고딕체나 궁서체로만 접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일부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글 궁서체가 ‘닌자체’로 불린대요.
TS
라틴 알파벳과 한글 폰트 각각의 개발 과정은 어땠어요?
김우리
보통 국내에서는 한글 폰트 작업이 마무리된 뒤에 그걸 바탕으로 라틴 알파벳 폰트를 제작해요. [올레체]의 경우는 일단 KT라는 기업의 전용 서체였고, 세계 시장을 염두에 둬야 하는 기업적 성격이 있어서 라틴 알파벳 폰트에도 꽤 심혈을 기울였어요. 특히 KT 쪽 클라이언트가 굉장히 디테일한 스타일이라 아주 사소한 생각들까지 개발팀과 공유하고 싶어 했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한글 위주의 서체 작업이 익숙했던 터라 해외 라틴 알파벳 폰트들을 샅샅이 훑어보면서 트렌드도 익히고, 유사한 서체가 없는지 조사했죠. 영어에 그렇게 고통스럽게 매진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웃음)
김태희
[올레체]는 당시 기업 전용 서체로는 드물게 힌팅이 도입되었어요. 폰트에 힌팅을 하면 다양한 디바이스에서 구현이 가능해 확장성이 높아지거든요. 개발 과정에서 아웃라인과 힌팅을 함께하니까 작업량이 다른 폰트에 비해 다소 많아지게 되죠. 저는 주말도 없이 일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작업량이 많았다기보다는 저 자신이 완전히 [올레체]에 몰입된 상태였던 것 같아요. 몸은 좀 힘들었는데 재미있게 일했거든요. 그 덕분에 몸도 골골해지고 여드름도 나기 시작했지만.
김우리
왠지 짠하네. 라틴 알파벳 폰트는 그래도 한글보다는 덜 힘들었던 것 같아요.
김태희
아무래도 팀장님은 노련하시니까.(웃음)
김우리
[올레체]는 기업 전용 서체들 중 최초로 이탤릭체 작업까지 진행됐거든요. 글자를 강제로 기울이면 획 모양이 달라지니까, KT 쪽에서 처음부터 이탤릭체도 같이 개발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저도 육체적으로는 조금 힘들었는데 재미는 있었죠. ‘최초의 뭔가’를 만든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그리고 사실, 제가 한글 힌팅을 해봐서 아는데, 그에 비하면 라틴 알파벳 힌팅은 쉬운 편이에요.(웃음)
[올레체]가 길거리 간판에 쓰인다고?
TS
[올레체]가 기업 전용 서체 맞죠? 일반인들이 휴대폰이나 웹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던데. 이거 불법 아녜요?
김우리
불법이죠.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들 퍼졌어요. 얼마 전에 홍대 근처에서 한 카페를 발견했는데 간판 글꼴이 [올레체]였어요. KT에서 운영하는 카페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웃음).
김태희
KT가 [올레체]를 디폴트 서체로 모바일 기기에 탑재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몇몇 사용자들에 의해서 외부로 퍼져나간 거예요. 지금은 대학 도록이나 길거리 간판에서도 [올레체]를 만날 수 있죠(웃음).
김우리
그게 또 그냥 사용되는 게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형태의 볼드체나 입체 글꼴로 변형이 돼요. 전문 폰트 개발자가 아닌 사람들이 그렇게 모양을 바꾸는 거죠.
TS
[올레체] 엄마 입장에서는 속상하지 않아요?
김우리
처음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냥 웃겨요.
서체 디자이너 김우리·김태희의 꿈
TS
지금 상용되고 있는 [올레체]는 2.0 버전이죠? 일종의 업그레이드 버전인가요?
김태희
그렇죠. KT는 다른 기업들에 비해 전용서체 활용을 굉장히 잘하는 것 같아요. 전용서체를 개발만 해놓고 그냥 방치해두는 업체들도 있거든요. KT는 [올레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면서 계속 문제점들과 보완해야 할 점들을 짚어내요. 그래서 2.0 버전도 나온 거죠. 개발자에게는 일이 더 늘어나겠지만, 그만큼 우리가 만든 폰트를 발전시킨다는 의미라서 좋아요.
김우리
내 자식을 사랑해주는 기분이랄까? 폰트 한 벌에는 개발자의 산고가 그대로 녹아 있거든요. 그 산고를 보상받는 느낌이죠.
TS
긴 시간 동안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해요. 마지막으로 각자 이루고 싶은 꿈을 이야기해주세요.
김우리
제 성격이 워낙 활동적이라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아요. 우선, 다양한 언어권의 글자들을 포함한 하나의 서체를 개발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드리고 싶어요. 제 이름처럼 ‘우리’ 모두가 널리 이롭게 사용할 수 있게요. 그렇게 만든 서체를 1인 홍보 방식으로 광고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또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한글을 알리고 싶어요.
김태희
저는 서체 디자인 외에도 자신들만의 글을 갖지 못한 땅끝 소수 민족들에게 문자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어요. 영어나 한글 같은 기존의 언어들을 차용하는 게 아니라, 진정 그들의 삶과 전통에 맞는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일이죠. 실제로 오지 부족들과 직접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문자를 만들어주는 분들이 계세요. 저도 언젠가 그분들과 합류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