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디자인 품과 격』(편석훈 저, 윤디자인그룹, 2020) 내용 일부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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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을 강조한 본문용 돋움체, 민국체
앞선 대한체에 이은 두 번째 서체 민국체는 대한체와 네 살 터울이다. ‘온 국민이 함께 쓰는 본문용 돋움체’를 표방하며 2018년 무료 배포되었다. 대한체의 메시지가 ‘화합’이었다면, 민국체는 ‘소통’을 강조했다. 대중을 향한 메시지 전개가 화합에서 소통으로 흐른 셈이다. 광복을 통해 한국민이자 한 국민으로서 화합하였으니, 이제 그 공동체 안에서 서로 소통해보자는 맥락이다.
디자인 콘셉트 역시 소통이라는 주제를 따랐다. 먼저, 각 자소의 크기와 속공간이 큼직하게 설계되었다. 줄글을 적었을 때 자소들이 빽빽이 군집해 와글거리는 모양새가 아니라, 저마다 얼마간의 여백을 품은 채 가지런할 수 있도록 고려한 디자인이다. 우리 국민 개개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생활 환경에 따라 생각도 말씨도 천차만별이겠지만, 타인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내면의 속공간’을 크게 열어두자는 시각 메시지인 것이다.
또한, 본문용 돋움체 민국체는 본문용 바탕체 대한체와 조화를 이룬다. 대한체에 적용된 자폭, 높이, 글줄 시각중심선이 민국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문학 작품이나 인문학 서적의 경우, 바탕체 본문 중간중간 특정 단어나 인용구 등을 돋움체로 강조하기도 하는데, 더러는 바탕체와 돋움체의 통일성 결여로 인해 시각중심선이 훼손된다. 이런 용례에서 대한체와 민국체는 시각적으로 서로 ‘화합’하고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의지를 표명한 제목용 서체, 독립체
2019년에는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독립체와 만세체가 선을 보였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독립체는 2013년 최초 기획 시에는 없던 서체다.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추가된 구성이다.
대한체·민국체·만세체 3종은 기획 및 개발 기간을 충분히 확보한 상태로 시작할 수 있었지만, 독립체는 그렇지 못했다. 내부 직원들끼리 머리를 맞대는 데 한계가 따랐다. 나머지 서체들의 개발 기한을 맞추면서 동시에 독립체를 기획·제작한다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하여, 조력자를 섭외하기로 했고, 그렇게 도움을 구하게 된 분이 동아일보 국제부장과 프레시안 편집국장을 지낸 김창희 작가였다.
그는 언론계 용어로 ‘데스크’ 출신이면서, 『오래된 서울』이라는 역사 에세이를 쓴 인물이다. 윤디자인그룹과도 인연이 있어서, 회사의 언론홍보 전략이나 보도 자료 구성 등에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서체의 기획 자문역으로서 김창희 작가는 적임자였다.
나와 직원들이 잡아두었던 대략의 방향성은 이러했다. 대한체와 민국체가 본문체였으니 독립체, 만세체를 제목체로 구성해 ‘본문용 대한·민국, 제목용 독립·만세’의 균형을 이뤄보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독립체와 만세체는 대한·민국에 비해 강렬하고 힘 있는 장식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김창희 작가의 접근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했다. 이름이 독립체인 만큼, 독립신문의 제호로 서체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독립신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알린 민족지였으니, 서체 발표 해인 3.1 운동 100주년 2019년도의 상징성과도 맞아떨어진다는 의견이었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 1919년 8월 21일에는 이른바 ‘상해판 독립신문’도 발간됐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약상과 요인(要人)들의 동향을 지속적으로 전파하는 기관지 역할을 했다. 이 역사적인 독립신문의 한글 제호를 복원한 결과물이 바로 독립체다.
독립신문의 제호는 종서(縱書)인데, 이 원형을 고스란히 담아 독립체 역시 세로쓰기용 제목체로 설계되었다. 또한, 오늘날의 사용성을 고려해 가로쓰기 호환도 더했다. 두 가지 쓰기 구조를 모두 포용한 셈인데, 여기에는 나름의 의도가 있다.
대한체가 화합을, 민국체가 화합을 기반으로 한 소통을 부각했다면, 독립체는 화합과 소통에의 ‘의지’를 표명한 서체다. 가로쓰기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후손들을, 세로쓰기는 그 옛날 독립신문을 만들었던 분들을 상징한다. 독립투사들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 그분들의 의열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후손들이 화합하고 소통하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민초들의 외침’ 제목용 캘리그래피 서체, 만세체
독립체가 독립신문을 만든 독립투사들의 글씨라면, 만세체는 독립신문의 독자들, 즉 굳센 민초들의 글씨다. 만세체의 디자인 콘셉트는 다름 아닌 3.1 운동이다. 거리에서 만세를 외치던 민초들의 절절함을 한 글자 한 글자마다 담았다. 붓글씨에는 세 가지 서법이 있는데, 궁체·판본체·민체가 바로 그것이다.
궁체와 판본체가 정법에 속한다면, 민체는 명칭 그대로 ‘민중의 글씨’다. 양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목소리(외침)의 집합체다. 3.1 운동의 함성을 서체로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적합한 스타일이 있을까 싶다.
만세체는 제목용 캘리그래피 서체다. 우리말·우리글 사용이 제한된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거리에 모였을 민초들. 글을 몰랐던 계층부터 식자층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불문 처절히 한 목소리를 냈던 그날의 민중. 이 모두가 만세체의 자소 하나하나마다 살아 숨쉰다. 그래서 한 글자, 한 글자가 서로 다른 구조를 지니며 여러 필법이 혼재한다. 그러면서도 서체로서의 기본 기능, 즉 가독성에 충실하기 위해 글줄 시각중심선이 가운데로 설정돼 있다.
1919년 3월 1일의 결의, 열정, 투박함, 간절함 등을 획의 표현과 질감으로 담았고, 획 굵기와 자소 형태, 기울기, 무게중심, 크기감 또한 의도적으로 다양화시켰다. 통일성 유지 못지않게 다양성 부각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각계각층 민초들의 글씨라는 디자인 콘셉트에 따라, 만세체는 동일 계열의 모임꼴(‘걸·널·덜·멀’ 등) 및 초성꼴(‘따·때·떠·떼’ 등) 모아쓰기 시에도 형태상 중복이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어떤 글자를 쓰든 3.1 운동의 만세 소리가 배어나도록 의도한 시각 구성이다.
대한체의 ‘화합’, 민국체의 ‘소통’, 독립체의 ‘의지’, 그리고 만세체의 ‘외침’. 대한민국독립만세 프로젝트는 7년(2013~2019)에 걸쳐 우리 민족의 역사의식을 고양하는 4종의 서체, 네 가지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했다. 거꾸로 말해보면, 화합·소통·의지·외침이라는 네 가지 가치가 4종 서체에 각각 배치/조합됨으로써, 존재 자체로 그 가치를 빛내는 ‘역사 서체 시리즈’가 탄생한 것이다.(대한민국독립만세 서체 사이트 바로 가기)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