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얼마나 많은 디자이너가 있을까? 삼청동으로 가는 길목에 줄줄이 늘어서 있는 크고 작은 가게들을 보면서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디자이너의 현실’이라고 단순히 정리하기엔 너무 복잡한 현실이라는 생각도. 10년 이상을 디자인 현장에서 버티는 힘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리라. 예나 지금이나 뚝심 있는 작업을 하는 제너럴그래픽스 문장현 대표를 만났다.
오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독립을 하셨는데 최근 근황은 어떠세요?
디자인 쪽의 유행이 있잖아요. 전 그런 건 잘 몰랐고 회사에서 주어진 일을 해온 편이라, 예전의 전형적인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어요. 원래 사무실을 차리면서 콘텐츠를 다루는 디자인을 하고 싶었는데 계획했던 일들은 아직 못 하고 있어요. 한 회사를 10년 정도 다니다가 변화가 필요해서 독립했는데 뚜렷한 방향은 찾지 못했고 방황 중입니다(웃음).
작업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어떤 건가요?
음식에 관심이 있어요. 하지만 생각뿐이지 진전된 건 없고요. 자체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하려면 워밍업을 해야 하니까 최근엔 간단한 일들을 조금씩 벌이고 있는데, 막상 해보니까 문제가 많더라고요(웃음).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좋은 필자를 찾는 것도 한 방법인 것 같아요. 양질의 정보를 아주 디테일하게 만들어서 지식이 제대로 전달이 되는 작업, 궁극적으로는 퍼블리싱을 하고 싶어요.
독립하고 난 이후에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요?
생활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고요, 판단을 스스로 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네요. 회사에 있을 때도 부서의 장이었으니까 판단이 주된 업무였지만 부담은 지금보다 덜 했죠. 일본이나 우리나라의 탁월한 디자이너들이 기획 전시를 하는 걸 보면 자극을 많이 받아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현란하거나 의미가 모호한 것에 대해선 반감이 생기기도 하고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디자인이라는 한 씬에서 오래 머문 분들께는 저절로 존경심이 생겨요.
필드에서 클라이언트 잡을 전문적으로 하는 분이 많은데 디자인 매체들이 골고루 다루지는 않는 것 같아요. 매체 내부에 전문가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슬쩍 하게 되고요(웃음). 바람이 있다면 자기 작업을 하시는 분들뿐만 아니라 기업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하는 베테랑 디자이너들도 균형 있게 다루면 좋겠어요.
그는 섣부른 긍정과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언뜻 시니컬한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본질이란 무엇일까?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그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일을 해오셨는데 가장 어려울 땐 언제인가요?
작업하면서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데, 기준이 모호할 때 문제가 생기거나 서로가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이 생기는 것 같아요. 실무자와 결정권자가 다를 때 대부분 실무선에서 결정을 하긴 힘드니까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하죠. 실무자가 책임을 지는 구조가 아니니까 그땐 허탈해져요. 피로도도 높아지고요. 하지만 마케팅의 중요성 등 여러 가지 변수가 있다는 것도 아니까 무조건 고집할 수만은 없죠. 그리고 클라이언트 중에서도 굉장히 전문적인 분들이 있어요. 좀 더 나은 쪽으로 결과물이 나오면 같이 성장한다는 느낌도 들고 보람 있죠.
요즘 디자인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제가 무슨 자격이 있는 게 아니라서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여전히 어떤 ‘쏠림’ 현상은 있는 것 같아요. 뭘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좋아 보이는 걸 따라 하는 게 아닐까 싶고요. 스스로 설 힘이 없을 때 무언가, 자극도 쉽게 받잖아요. 매체가 주도한 면도 있죠. 핫한 소식을 전하다 보면 재생산되는 구조가 만들어지기도 하니까요. 확 쏠리는 대신 금방 가라앉는 현상이 예전보다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것 같아요.
작업의 방향이 조금씩 변해왔을 것 같은데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강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없어요(웃음). 단점만 있는 것 같아요. 성질도 잘 내고(웃음). 예전엔 그래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성품이 좋으신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그런 걸 다 넘으신 분들을 보면 참 멋있어요. 작업도 방향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었어요. 방법적인 면에선 스타일을 구축하고 어느 정도는 포맷을 염두에 두지만, 그런 것 외에는 지향하는 바를 뚜렷하게 정하진 못했죠. 자기 개성을 발휘하는 게 디자이너의 덕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굳이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자기 작업을 하는 경우엔 개성이 드러나는 게 당연하겠지만 의뢰받은 일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최근 했던 작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떤 건가요?
모 통신회사 작업인데 라운드값을 일정하게 만든 제품의 형태를 콘셉트로 하는 인쇄물이었어요. 애초에는 클라이언트가 일방적으로 제시한 밑그림대로 완성도를 높여달라는 의뢰였는데, 그렇다면 굳이 저희가 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을 했죠. 나중에 다시 전적으로 맡긴다는 요청이 와서 진행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형태라는 주제로 풀었어요. 이제 와 돌이켜보니 기교를 너무 많이 부린 것 같네요.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겸손하게 손사래를 치면서도 눈빛은 반짝반짝 빛난다. 역시 자신이 하는 일을 참 좋아한다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디자인의 방향을 결정하고 어떤 메시지를 담을 것인가부터 무슨 종이를 쓰고 테크닉은 또 어떻게 구사하는지 궁금한 게 많아진다.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얻으시나요?
제가 특별히 창조적인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창조는 정말 자신의 독창적인 작업물을 내놓거나 방법론을 만드는 분들께 붙여야죠. 이해를 제대로 하기만 해도 작업의 질은 달라져요. 글로벌 기업인 N회사와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인상적이었던 게, 디자인 정책을 주관하는 마케팅 책임자가 올 한 해의 디자인 방향과 기준을 다 설명해요. 로컬에서도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게 하고, 좋은 경우 그걸 지침으로 삼아 로컬에 뿌리기도 하고요. 일할 때 확실한 근거가 생기니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런 새로운 경험들을 할 때 많이 배우죠.
어떤 작업을 할 때 가장 즐거우세요?
마음에 드는 콘텐츠가 있어요. 먹을 거(웃음). 그런데 아직 본격적으로 다뤄보진 못했고요. 예전에 회사에서 박물관이라든가 문화적 베이스를 바탕으로 둔 일을 했는데 하다 보니 매력이 있더라고요. 한창 실무를 할 때는 출장을 많이 다녔어요. 소쇄원, 독락당 같은 전통건축을 다뤘던 잡지 작업과 유네스코 등재를 예비하면서 사인작업을 했던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은 기억에 많이 남아요. 그 뒤로 해인사나 서산삼존마애불 등 문화재 사인 작업을 꽤 했는데 아주 즐거웠어요.
정말 꼼꼼하게 작업을 하시는 것 같아요.
작업에 따라 다른데 특히 문화재 관련 작업은 모르는 것이 많아서 항상 긴장했어요. 궁궐 같은 경우 표지판 하나를 세워도 많은 면을 고려해야 해서 타 분야의 전문가나 외부 디자이너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스스로 꼼꼼하기보다는 일의 환경이 여러 가지를 고려하게 하는 것 같아요.
오는 9월 26일(금) 더티&강쇼 강연자이기도 하신데, 하고 싶은 말씀 한마디 해주세요.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웃음), 상업적인 성공이나 돈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작업을 하는 의미로 폰트를 만드는 디자이너들이 있거든요. 전문 서체디자인 회사에서 그런 젊은 디자이너들이 좀 더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후원하거나 보호를 해주면 좋겠어요. 당장 비용이 좀 들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장을 만들어 주면 분야가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