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2000년대 초만 해도 종이 잡지 첫머리에는 ‘컨트리뷰터(contributors)’ 소개 지면이 있었다. 우리말로는 ‘도움 주신 분들’ 정도가 적합할 것이다. 잡지사 소속이 아닌 자유기고가, 사진작가, 편집 디자이너, 모델 등 외부 크리에이터들이 당월호 제작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을 때, 잡지는 이들을 컨트리뷰터로 칭하여 감사를 표하는 지면을 마련했다. 과거에 비해 드물기는 하지만 현재 간행되는 잡지들도 컨트리뷰터 호명을 지속하고 있다.
『타이포그래피 서울』(이하 TS)은 2023년부터 컨트리뷰터 제도를 도입한다. 20~30대 대학생, 현업 디자이너 등 100명으로 구성된 크리에이터 그룹 ‘TS 파트너즈’ 중 희망자에 한하여 컨트리뷰터 활동을 제안할 예정이다. 시범 운영 목적으로 올해 11월 TS 파트너즈 미션을 진행했다. ‘지금 이 순간의 캠퍼스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기’라는 일종의 취재 아이템을 제시한 것이다. 마흔여섯 명이 미션에 참여했고, TS 편집팀은 심사를 통해 최우수 1인 및 우수 4인을 선정했다. 이 다섯 명의 글을 [디자인학과 학생들이 기록한 ‘지금’]이라는 시리즈로 엮어 12월 한 달간 매주 연재한다. 각 글의 끝머리에는 TS 편집팀의 심사평을 싣는다.
연재 순서
#1 최우수작 「디자인과 3학년, 우리의 반작용 법칙」, 이은지
#2 우수작 「경희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제31회 졸업전시 취재」, 강혜민
#3 우수작 「부산대학교 디자인 학술동아리 DOBE 워크숍 취재」, 김은수
#4 우수작 「그래피티로 캠퍼스의 자유로움을 표현하다」, 박소현
#5 우수작 「호서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장 정민 교수 인터뷰」, 최라온
디자인과 3학년, 우리의 반작용 법칙
잔뜩 피곤한 낯빛에 커다란 백팩을 멘 채로 학교를 배회하는 이들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아마 틀림없이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일 것이다. 오늘도 역시 밤을 꼬박 새고 불퉁한 표정으로 교내 카페에 둘러앉은 두 친구는 단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 19학번으로, 현재 3학년 2학기 재학 중이다. 내년 4학년을 앞두고 있는 ‘봉투’(가명) 씨와 ‘벤지’(가명) 씨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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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두 분 다 같은 학교, 같은 과이신데, 우리 과만의 자랑거리가 있다면?
봉투
여러 장점이 있지만, 무엇보다 좋은 동기들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촘촘한 커리큘럼이나 좋은 교수님, 편히 작업할 수 있는 환경 같은 것들은 어떤 학과에나 존재할 수 있지만, 이렇게 좋은 자극을 주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동기들은 작업이 막힐 때 새로운 아이디어를 줘서 머릿속을 명료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피드백을 주어 다양한 관점에 대해 느끼게도 해주고, 제 의지가 박약해진 어느 날엔 혼자 훌쩍 앞으로 나아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해서 해이해진 저를 일으켜 세워 주기도 하니까요. 결과만 따져보았을 때에도 동기들은 작업 퀄리티가 높은 편이고, 인턴십이나 대외 활동도 다양하게 잘 하는 편이어서 늘 보고 건강한 자극을 받는 것 같아요.
벤지
앞서 해준 답변처럼 저도 좋은 아웃풋이 가장 큰 장점이자 자랑거리라고 생각해요. 저희 학과는 과동아리가 활성화된 편이라 수업 외 시간에 학생들끼리 함께 작업하면서 서로에게 시너지를 주고, 그러면서 더욱 성장하곤 하거든요. 전반적으로 좋은 아웃풋 역시 서로에게 좋은 자극을 주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두 분은 학교에서 과동아리 활동을 한 적이 있나요?
벤지
저는 광고 동아리와 일러스트 동아리 활동을 했어요. 처음 학교에 입학하면 과동아리 설명회 비슷한 걸 듣게 되는데, 그때 광고 동아리 선배들의 멋진 작업물과 수상 경력을 보고 홀린 듯이 지원했었죠. 저는 이제 막 입학한 새내기였기 때문에 프로그램도 거의 다룰 줄 몰라서, 동아리 가입 후 선배들이 진행했던 OT와 프로그램 세미나를 듣고 툴에 대한 이해도를 키우기 시작했어요.
일러스트 동아리는 제가 그린 그림으로 전시를 해보고 싶어 들어가게 되었어요. 저희 과는 과동아리가 활성화된 만큼, 1년에 한 번 외부 전시장을 대관해 〈딩(Ding)〉이라는 전시를 개최하거든요. ‘딩’이란 단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 디자인 운동을 일컫는 말로, 다양한 우리 학과 동아리들을 통틀어 말하기도 해요. 지금은 비록 광고나 일러스트를 주전공으로 삼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때 과동아리에 속해 많은 관련 경험을 해보고, 그걸로 전시까지 참여한 것이 뿌듯하고, 하길 잘했다 싶어요.
봉투
저는 제 진로 설정을 위해 많은 과동아리를 짧게 짧게 경험해 본 것 같아요. 우선 저도 1학년 때는 광고 동아리를 잠깐 했었고, 1학년 2학기부터 2학년까지는 실영상 동아리를, 휴학 중에는 모션 동아리를 경험했었죠. 사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함께 실영상 동아리를 하자는 친구의 말에 별 기대 없이 가입하게 된 실영상 동아리를 이 중 가장 오래 했어요.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가장 희망 진로와 가까운 쪽도 이 분야고요. 진로에 대해 고등학생부터 고민을 많이 하던 편이라, 다양한 동아리에 속해 짧게나마 경험을 해보니 이 분야가 나와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수월했던 것 같아요.
휴학을 마치고 1년 만에 학교로 돌아왔을 때 겪었던 해프닝과 느꼈던 감정을 얘기해주세요.
봉투
한 달 전쯤, 선배들의 졸업전시회를 다녀왔어요. 그런데 졸업전시를 보는 제 마음이 예전 같지가 않더라고요. 예전엔 아무 생각 없이 ‘와, 잘했다’, ‘멋있다’ 하고 봤었는데 올해 졸업전시는 내년에 제가 이런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부담스럽고, 마음이 무거웠어요. 전시를 보는 내내 이런 괜한 걱정들이 물밀듯 떠올라서 조금 센티해졌던 기억이 있네요.
벤지
저는 1학기에 교환학생을 갔다가 이번 학기가 되어야 단국대학교로 돌아와서, 더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유럽 국가로 교환학생을 다녀와서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신나게 논 만큼, 이번 학기에 돌아오니 할 일이 더 많아져서 공강도 없이 학교를 다니고 있답니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고 피곤하게 지내고 있는 요즈음이에요.
현재 4학년을 앞두고 있는 심정이 궁금해요.
벤지
저는 3학년 2학기인 지금에서야 학교를 제대로 다니는 것 같은데 벌써 졸업이라니 아쉬워요. ‘내가 지금 졸업해도 되나?’ 하는 두려움도 물론 있지만, 아쉬운 마음이 더 큰 것 같습니다.
봉투
참담합니다. 그것 외엔 저의 심정을 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함께 졸업할 동기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봉투
견제하고요, 질투 나고요, 열심히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농담입니다.(웃음) 사실 동기들만큼 제게 공감과 힘이 되고 자극도 되는 사람이 없어요. 우리 동기들은 늘 잘할 걸 아니까, 졸업하고도 계속 제게 좋은 자극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모두 잘됐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졸업까지 건강히 아프지 않고, 졸업전시회도 무사히 잘 끝마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벤지
저 역시 같은 마음이에요. 동기들이 그냥 잘하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잘하는 편이라 몸 상해가면서까지 졸업 전시회 준비를 할까 걱정되고, 건강히 아프지 않고 무사히 마쳤으면 좋겠는 마음이에요. 동기들의 앞으로가 기대되고, 항상 응원하고 싶어요.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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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수업을 듣기 위해 짐을 싸고 부리나케 강의실로 달려간다. 등보다 커다란 백팩이 우리를 땅으로 끌어당길 것처럼 무겁게 흔들린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가 가중된다. 그러나 우리가 땅으로 꽂힐 일은 없다. 등에 멘 가방의 무게보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더 강하니까.
TS 편집팀 심사평 서문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이야기’라는 표현과 딱 맞는 글. 4학년 진학을 앞둔 3학년 동기생 두 명을 인터뷰했는데, 친구들끼리 모여 수다를 떠는 것처럼 질의응답을 자연스럽게 구성했다. 무엇보다도 웃음이 있다. 키득거리면서 인터뷰를 읽다 보면 어느새 ‘청춘’이라는 것을 고민하게 된다. 고민의 실체란 바로 3~4학년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안고 있을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의문’. 이은지의 글이 빼어난 점은 ‘청춘’, ‘불안’, ‘의문’이라는 숙제를 무겁지 않게 풀어냈다는 것이다. 비장한 경쾌함이라고 해야 할까. 음반 레이블 붕가붕가레코드의 고건혁 대표(곰사장)가 과거 어느 강연에서 말했던 ‘비관적인 낙관, 낙관적인 비관’이라는 표어와 결을 같이하는 경쾌함이다. 인터뷰이 각자의 ‘나다움’을 인터뷰에 녹여내려 노력한 흔적도 선명하다. 동기생들의 육성을 글로 정리하는 데 아마도 긴 시간을 들였을 것이다. 압권은 마지막 질문(함께 졸업할 동기들에게 하고 싶은 말)에 대한 인터뷰이 ‘봉투’의 답. “견제하고요, 질투 나고요, 열심히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농담입니다.” 명랑하고 다정하며 예쁘기까지 한 청춘의 어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