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룡이라는 한 사람 안에는 여러 개의 자아가 공존한다. 그것을 그는 '자기만의 폴더 만들기'라고 표현한다. 뇌 속에 마치 컴퓨터 화면처럼 몇 개의 바탕화면과 폴더가 있고 각각의 역할이 다르다. 자신만의 비밀 폴더엔 락을 걸어둔다. 직장인, 디자이너, 남편, 강쇼 진행자, 제목이 없는 것까지 그 하나하나의 폴더 속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최근엔 세 분의 패널을 모시고 국민대학교 조형전에서 ‘강쇼’라는 토크쇼를 진행했어요. 뭔가 담론의 장이 필요한 것 같아서 전시 말고도 학생들 대상으로 질문이나 얘기를 듣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건데 다양한 이야기가 나와서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 지콜론에서 책이 나왔고요. 아, 결혼도 했습니다(웃음).
강쇼에 오셨던 청중들은 어떤 질문을 가장 많이 하시던가요?
토론하고 나머지 질문 시간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학생들은 취업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죠. 전 솔직히 말하는 편이라 굳이 디자인해야 하는 건 아니다, 다른 것도 생각해봐라, 이런 이야기도 했어요. 디자인을 전공했기에 디자이너가 되어야만 한다는 프레임에 자신을 집어넣고, 그것이 잘 안 될 경우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디자인과 학생 중에도 포스터를 잘 만드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 포스터를 파는 데 재능이 있는 학생도 있을 수 있잖아요. 자기 재능을 빨리 알아차리는 게 더 중요하죠. 비유하자면 모두 서태지처럼 아티스트가 될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지금은 양현석 같은 프로듀서가 더 필요한 세상이죠.
강쇼는 앞으로 어떻게 될 예정인가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할 생각인데 패널을 더 추가해서 팟캐스트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이번에 국민대에서 했던 강쇼는 디자인 특강이었지만 디자인 얘기만 한 건 아니었거든요. 돈 얘기나 경제 얘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디자이너들은 자기 프라이드가 강하지만 디자인도 결국 사회 안에 있는 한 가지 분야잖아요. 이게 오히려 되게 재미있어요. 할 이야기도 많고.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오셔서 이야기하면 담론이 더 커질 것 같아요.
본업인 디자인은 물론 토크쇼에 글쓰기까지 다재다능하세요. 창조적인 분야의 일을 하는 분들은 다른 일을 해도 남다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디자이너들은 다른 걸 해도 잘하더라고요(웃음). 하지만 감각은 있어도 한편으로는 무지를 느낄 때도 많아요. 특히 글로 표현하는 걸 어려워해요. 시각디자인에서 오히려 필요한 게 언어능력인데…(웃음). 시각능력은 대부분 디자이너가 타고나는 거니까 계속 하다 보면 어느 정도 잘한다고 보거든요. 타고난 재능의 많고 적음보다 상대의 필요성을 봐가면서 말과 글로 소통을 유연하게 할 줄 아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책을 쓰는 일은 그에게 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면서 동시에 흥미로운 작업이다. 그가 쓴 책은 디자인에 대한 책이지만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일반 사람들도 편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특이한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가도 일상의 공감을 발견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하지만 어느 순간 폐부를 찌른다. 한 겹이 아닌 여러 겹을 지닌 사유의 층위야말로 그의 매력이자 강점이다.
이번에 쓰신 책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위트 그리고 디자인>이라는 책인데 위트라는 테마를 확장해서 책으로 엮어본 거예요. 독립출판을 하는 서점 ‘유어 마인드’의 주인 겸 작가인 이로 씨와 함께 쓴 책이고요. 사실 제가 진지한 사람이라 위트는 없거든요. 처음엔 위트 있는 작가를 소개하면 되는 줄 알고 하겠다고 했는데 출판사 편집장님이 제 안에서 저에 대한 위트도 끄집어내라고 하니 참 애먹었네요. 글 쓰는 것보다 그게 더 어려웠어요(웃음).
말씀하시는 게 굉장히 위트 넘치시는데요.
제가 원하는 웃음코드랑 일반인 코드가 좀 다르다는 게 문제죠(웃음). 좋게 봐주시는 분들은 재밌다 하시고 싫어하는 분들은 쟤, 좀 이상해 이러시고. 예전에 데생할 때 아그리파를 열심히 그렸는데 얼굴이 너무 큰 거예요. 몸은 작고. 그걸 저는 되게 멋있다고 봤는데 사람들은 웃더라고요. 좀 이상하다면서. 제 디자인에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강쇼를 할 때도 되게 진지하게 했는데 많이 웃으시더라고요. 웃음코드를 찾는 게 좀 힘든 것 같아요. 오히려 제가 좀 짓궂은 면이 있어서 작업할 때도 다 보여주지 않고 숨겨놔요. 너무 다 보여주면 재미없잖아요.
책을 쓰는 일을 또 다른 일인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지금은 디자인도 분야가 많아졌어요. 선배들이 갔던 길도 있지만 안 간 길들도 많거든요. 그중의 하나가 사람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는 거예요. 전문가들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요. 디자인에 대한 책이더라도 디자인 코너에 꽂혀있지 않고 에세이나 자기계발서가 될 수도 있다고 봐요. 전공자들만 보는 책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책들이 나오면 좋겠어요.
디자이너로서 작가로서 고민하는 점이 있으신가요?
왜 우리는 항상 우리끼리만 노는가(웃음). 예를 들어서 광화문에서 촛불 시위를 하는데 디자이너가 하는 역할은 뭔가? 제가 특별히 정치의식이 있어서는 아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도 아니지만, 그쪽에 의식이 있는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세요. 우리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게 없다, 결국 이름 모를 작가로 살다가 갈 건데 알릴 수 있는 방법의 하나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생각해요.
그는 공공 디자인을 보면 재밌는 것이 많다고 한다. 무심코 지나치던 지하철 플랫폼이나 길가에서, 표지판에 쓰인 서체 하나만 바뀌어도 내가 참 쾌적한 곳에서 살고 있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한 사람이 디자인 하나를 잘한다고 도시가 바뀌진 않지만, 공공 디자인의 영향은 좀 더 광범위할 것이다. 웹이나 인쇄 등 어느 한 분야에 디자인이 집중되기보다 좀 더 폭넓게 눈을 돌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다.
디자인 정책과 관련해서도 답답한 점이 있을 것 같아요.
문제는 너무 이벤트성이 강하거나 단발성이라는 점이에요. 예를 들면 한글이 한글날에만 이슈가 되는 거랑 비슷해요. 디자인 행사에 불과한 거죠. 장기적인 안목으로 가야 하는데 자주 바뀌니까 신뢰가 안 가죠. 또 한 가지는 정책 결정에 디자이너들을 많이 참여시켰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조금이라도 재밌는 얘기를 할 공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별다른 이슈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좀 해볼까, 이런 마음이죠. 중요한 것은 사고방식 같아요. 디자이너의 생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요.
평소엔 어떤 식으로 작업하세요?
서재에 책을 좀 많이 모아놓고 분류를 해놔요. 책상에 관계된 책들을 10권 정도 펼쳐놓고 크로스 방식으로 읽어요. 제가 좀 쉽게 질리는 성격이라 재미없으면 끝까지 못 읽거든요. 만화책도 좀 보고, 이렇게 보다 보면 이미지와 이미지가 연관돼요. 뭔가를 공부하고 있는데 마침 그 내용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경우가 있잖아요. 사실 관심이 생겨서 보이는 거죠. 그것과 비슷해요. 한 가지 주제에 관심이 있으면 다른 책에서도 거의 발견이 되고 그걸 찾으면 콘텐츠가 되는 거죠. 그런 걸 저는 샘플링이라고 부르는데 나만의 콘텐츠가 뭐지 고민만 하지 말고 한 가지 주제로 연결하면 콘텐츠가 되거든요. 하이브리드를 만드는 거죠.
나만의 것을 찾고 싶은 욕구도 강할 것 같은데요.
우리가 너무 내 것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강해요. 하지만 아무리 독창적인 걸 생각해도 예전에 이미 다 누군가 만든 경우가 더 많거든요. 그냥 인정하면 되요(웃음). 그것을 이용해서 다음 것을 만들면 되고요. 그러다 보면 자기 것이 생기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이 여행하면서 길바닥을 찍은 책을 냈어요. 로마의 바닥은 어떻고 영국의 바닥은 어떻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문화를 끌어내 왜 이 바닥이 나왔는지 쓴 거죠. 그리고 바로 그게 콘텐츠가 되는 거고요. 기획력과 연결하는 능력은 제가 잘하는 영역 중에 하나에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마디 해주신다면요?
디자이너들이 너무 많이 일하는데 그것도 좋지만 좀 적당히 즐기면서 살면 좋겠어요. 그래도 충분히 잘할 수 있거든요.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게 더 좋잖아요. 그러려면 놀아야 되요(웃음). 자기만의 놀 거리가 있으면 좋겠어요. 처음부터 한 가지 분야로 자신을 한정 지으면 오래가기 힘들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 현장에선 50세가 넘는 디자이너들이 거의 없어요. 좀 놀면서 오래가는 문화가 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