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빗은 여자의 머리, 더없이 기쁜 눈망울. 새의 꽁지 깃털이 되거나 사슴의 뿔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백은하의 작품 속 꽃잎은 그 무엇으로든 다시 피어난다. 같은 꽃에서 나온 꽃잎이라도 어쩜 그리 표정이 다른지 그것을 포착하여 그야말로 생명을 불어넣는 그녀. 신기하고 또 신기하다. 꽃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는 아티스트 백은하. '꽃 도둑'이라는 이름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그녀를 만났다. 기분 좋은 빗소리를 들으며.
국문학을 전공하셨잖아요. 그림 그리는 것이 즐거워진 때, 그 시작이 궁금해요.
학창시절엔 제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미술 점수를 잘 받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참 재미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부터 꽃이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얘는 인디언이야, 얘는 할머니야, 얘는 달리기를 하고 있네.’ 한 꽃에서 떼어낸 잎이라도 표정이 다 달랐죠. 우울한 아이, 새침한 아이, 소심한 아이. 세상에 가지각색의 사람이 있듯 꽃도 그 생김새가 여러 가지였던 거죠. 그렇게 그려 왔던 것이 벌써 12년이 되었네요.
꽃잎이 그림이 되는 과정을 설명해 주세요.
꽃잎을 채취하러 일부러 산에 가지는 않아요.(웃음) 사실 관심을 갖고 잘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 꽃이 참 많거든요. 길을 걷다가 예쁜 꽃을 보면 살짝 따서 주머니에 넣어요. 집에 돌아와서 책 사이사이에 끼워 말리는 거죠. 시간이 지나 예쁘게 말랐을 때 종이 위에 고정하고 그것으로 인해 연상되는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어디 보자…. 지금 가지고 있는 책 속엔 매발톱꽃이 들어 있네요.(웃음) 매의 발톱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래요. 참 예쁘죠?
전시도 많이 하셨잖아요. 보통 생각으로는 미술 전공자나 기성 작가가 아니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처음엔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처음 전시를 하게 되었을 때의 상황이 딱 그랬어요. 마치 아이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죠. 만약 그때의 내가 현실적인 사람이었다면 꽃으로 그리는 것 차체를 시도 안 했을 거예요. 이전엔 그런 예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전시하겠다고 무작정 갤러리를 찾아가지도 않았을 거예요. 갤러리는 보통 1년 스케줄이 미리 짜여 있으니까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 그때의 저는 그냥 그림을 그렸고 그게 모였으니 전시를 해야지, 라는 생각뿐. 포트폴리오라는 개념도 없이 그림들을 쇼핑백에 담아서 갔어요. 제가 정말 좋아했던 관훈갤러리로요. 당시 큐레이터가 갤러리 예약이 다 끝났다고 얘기를 하면서도 가지고 왔으니 그림을 한번 보여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예, 하고 보여 드렸더니 “이거 참 재미있네요.”라며 호감을 보이시더라고요. 그러면서 3개월 후 전시하기로 한 어떤 작가가 취소한 건이 있다며 그 자리에 제 전시를 넣어 주셨죠. 그렇게 첫 전시를 하고 제 작업이 알려지면서 또 다른 전시로 계속 이어지게 됐어요. 어떤 이들은 저더러 어쩜 그리 운이 좋으냐고 하지만, 저는 속으로 생각해요. 이 모든 일에는 저의 열정과 실천이 바탕이 되었다고 말이죠.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방금 말씀드렸던 첫 전시요. 딱 일주일이었거든요. 아침마다 버스를 타고 가서 문을 직접 열었어요. 사람들이 오면 남녀노소 누구랄 것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죠. 여태껏 꽃잎으로 그린 그림이 없었잖아요. 모두 엉뚱해하기도, 신기해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전시 마지막 날 엉엉 울었죠.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행복한 기억. 굉장히 투박했지만, 지금보다 더 재미난 것들이 있었던 때였어요.
어릴 때부터 꽃을 많이 접하셨던 거예요? 꽃에서 어떻게 사람이 보였는지 신기해요.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꽃을 많이 키우셨어요. 제가 일곱 살 때 우리 집 꽃이 40여 종 넘게 있었다고 하니 매우 많았던 거죠. 꽃과 나무가 어찌나 많았던지 그 자체가 담벼락이 됐을 정도예요. 저희가 4남매거든요. 속으로 우리 아버지는 꽃 아버지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보다 꽃을 더 사랑하셨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느 날 딱 떠오른 게 있어요. 아버지가 나에게 꽃을 주고 가셨구나.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꽃을 접하고 그림까지 그리게 됐네. 그만큼 친근했기에 사람처럼 보인 거죠. 아버지의 유산으로 지금의 내가 됐어. 아빠 고마워, 라고 말했죠.
그림을 보면 작은 것에서도 기쁨을 발견하고 잘 캐치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보통 사람들처럼 다른 감정도 많이 있는데, 그동안 행복한 그림을 주로 그린 것 같아요. 그리면서도 행복한 그림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람의 복잡한 감정, 예를 들면 무서움이나 슬픔, 지질이 궁상 같은 것을 잘 섞어서 표현하고 싶기도 해요. 요리 하나에 단맛, 쓴맛, 짠맛, 고소한 맛이 다 들어갈 수 있듯이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제 그림에 끌고 오는 거예요. 어떤 때는 무서운 그림이 될 수도, 또 어떤 때는 슬픈 그림이 될 수도 있죠. 그렇게 위로가 되고 공감이 되는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어요. 요즘에는 제가 딸이 있으니까 모녀에 대한 그림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것 같아요. 주문 제작도 많이 받고요.(웃음) 에세이도 <백은하의 로맨틱 육아>라는 같은 제목으로 레몬트리와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어요. 이렇듯 지금 현재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작업으로 이어지네요.
얼마 전 베네룩스 3국으로 여행 다녀오셨잖아요. 어떤 여행이었나요?
EBS <세계테마기행> 촬영 차 18일간 베네룩스 3국에 다녀왔어요. 방영이 6월 3일~6월 6일이니까 이 기사 나갈 때쯤엔 이미 방영이 됐겠네요.(웃음) 여행은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그곳의 생활 문화, 삶의 풍경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었어요.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이 세 나라는 그 면적을 모두 합쳐도 한반도보다 작다고 해요. 옛날 동맹 관계였다는 세 나라엔 닮은 듯 다른 전통과 고유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지요. 그곳은 나막신 하나를 만들어도 5대째 이어지고. 과일로 술을 만드는 것도 5대. 뭘 해도 기본이 5대더라고요.(웃음) 룩셈부르크 같은 경우는 도심 한가운데 1,000년 된 성곽이 있어요. 그 나라도 전쟁을 겪은 나라인데 정말 잘 보존해 왔던 거죠. 이번 여행을 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이들보다 스토리도 길고 문화도 많은데 이걸로 뭘 할 수 없을까?, 라는 생각. 그래서 아리랑 시리즈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자료를 구하고 있고. 어떤 식으로 작업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잘 해보고 싶어요. 결국, 제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던 여행이었어요.
여행은 작가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가서 풍물을 보고 문화를 보면서 ‘아 너무 멋져!’ 삶에 영감을 주는 것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못 보던 거, 생각 못하던 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일상에는 오만 인간관계와 무수한 일이 걸려 있잖아요. 그것을 벗어나 오롯이 나일 수 있어요. 그랬을 때 떠오르는 단순하고 명쾌한 생각들, 나에 대한 거든 남에 대한 거든 무언가 복잡하던 것이 풀리는 느낌이랄까요. 또 한가지 좋은 것은 고정관념과 편견이 사라지는 거예요. 우리는 속해 있는 문화권, 제도권 안에 있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먹는 것, 입는 것부터 교육이나 생활 습관까지요. 그런데 다양한 문물과 환경을 보다 보면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들과 달라도 충분히 행복하고 잘 살 수 있구나. 생각과 사고가 넓어지고 자신감도 생기는 거죠. 저에게 여행은 그런 의미인 것 같아요.
어떤 목소리를 내는 아티스트로 남고 싶으세요?
더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생각으로는 이 정도면 됐어, 라는 타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결국, 진정성인데요, 나 따로 작품 따로가 아니라 나를 우려내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거죠. 그리고 표현 스타일에는 모든 걸 열어놓고 많은 걸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상으로 만들 수도 있고. 난 여태까지 펜만 썼는데 붓을 사용하면 어떨까, 그냥 잉크만이 아니라 색이 나는 차를 마시다가 그걸 찍어서 쓸 수도 있는 거고.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을 열어 놓고 여러 가지를 실천하고 싶어요. 요새 본질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해요. 군더더기를 빼고 난 후의 엑기스. 그런 응축된 것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어요. 삶도 그렇고 작업도 그렇고요.
올해는 어떤 일들이 계획되어 있나요?
사실 요즘은 ‘올해 안에’라는 개념은 없고 쭉 연장선으로 흘러가요. 우선은 그림책을 포함해서 책 몇 권을 쓰기로 했고 매월 잡지에 에세이 쓰던 것 계속하고, 제 글과 그림을 모바일 콘텐츠로도 만들고 있어요. 또, 개인적으로는 그림을 좀 많이 그렸으면 좋겠어요. 딸이 30개월인데 이제 어린이집에 가거든요.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죠. 또 하나 욕심을 내자면 제 작업이 일상의 디자인과 만났으면 좋겠어요. 찻잔이나 그릇, 티백, 벽지, 커튼 뭐든지요. 이런 식의 만남을 꿈꾸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