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Y 그래픽스는 디자이너 듀오 배율(율리)·진유탁(타쿠)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다. 배율은 일러스트레이션을, 진유탁은 UX와 브랜딩을 담당하고 있다. 두 사람은 스튜디오 사이트를 통해 “2011년부터 스타트업 전선에서 활동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 경험을 구현하는 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YY 그래픽스의 시작은 태국 치앙마이에서였다. 회사 생활을 그만둔 배율과 진유탁은 태국 치앙마이로 떠났다. 퇴사를 기념하는 여행이기보다 향후 전개될 프리랜서로서의 앞가림을 구상하기 위한 살이였다. 그간 머물던 생업의 현장으로부터 스스로를 멀찍이 이격하여, 디자이너/크리에이터/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제삼의 관점과 태도를 탐색해보려는 감행이었을 것이다. 배율·진유탁은 각자 또는 함께 디자인 일감을 얻어 약 석 달간 타국 생활을 이어갔다. 디지털 노마드 초심자였던 셈이다. 일하는 사이사이 YY 그래픽스를 구상했고, 인스타툰(인스타그램에 연재하는 웹툰)으로 치앙마이 살이를 기록했다. 두 사람의 인스타툰은 『치앙마이에서는 천천히 걸을 것: 율리와 타쿠의 89일 그림일기』(2019)라는 책으로도 만들어졌다. 치앙마이에서의 천천한 보폭은 과연 서울에서도 지속되고 있을까, 라는 호기심으로 두 사람에게 인터뷰를 제안해보았다.
“더 놀지 못해 아쉬울 것도 더 일하지 못해 아쉬울 것도 없는 느슨하고도 알찬 날들이었다.”
배율·진유탁 그림 에세이 『치앙마이에서는 천천히 걸을 것』 중 배율의 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두 분의 책을 읽었습니다. 코로나19 시국에 읽는 여행책이라 그런지 여운이 오래가네요. 「디지털노마드의 성지」라는 챕터의 마지막 문장(위 인용문)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느슨하고도 알찬 날들”이라니···. 그 누가 이런 나날을 거부할 수 있을까요.(웃음)
왠지 YY 그래픽스도 책 제목처럼 ‘천천히 걷는’ 페이스를 유지하는 (흔치 않은) 스튜디오일 것만 같습니다. 하루가 느슨하고 알차게 흘러갈 것만 같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스튜디오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YY 그래픽스는 저희 이름의 이니셜을 모아 만든 이름이에요. 이름대로 두 사람이 꾸려 나가고 있는 스튜디오입니다. 함께 학교를 졸업한 뒤 6년 정도 스타트업에서 회사 생활을 하다가 다른 일들을 해보고 싶어져 스튜디오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다른 일들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한다는 꼭 디자인 업무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어요. 그 무렵이 저희 둘 모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기’라는 이정표를 세웠던 시기였거든요.
그렇다 보니 처음 같이한 일이 외국에서 몇 달간 머무르며 쉬어가는 것이었고, 기록을 하면 재미있겠다 싶어 인스타그램에 만화를 연재하다가 좋은 제안을 받아 책까지 내게 되었죠. 이후로도 그림도 그리고 디자인도 하면서 하고 싶은 일들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느슨하고 알찬 날들을 보내고 있어요.
“오히려 일상이란 건 잔잔한 파도인 편이 좋다. (···) 요컨대 일상에는 시시한 구석이 필요한 것이다.”
『치앙마이에서는 천천히 걸을 것』 중 진유탁의 글
책 속 문장을 하나만 더 인용해볼게요. “느슨하고도 알찬 날들”(배율)과 “잔잔한 파도”(진유탁)는 서로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독자로서의 또 다른 느낌은, 왠지 저 두 표현은 치앙마이에서의 89일에만 해당하진 않을 것 같아요. 현재 두 분이 작가로서 그리고 디자이너로서 추구하는 가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그 가치를 위해 퇴사를 결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배율이 말하는 “느슨하고 알찬 날들”, 진유탁이 바라는 “잔잔한 파도”에 대해 좀더 얘기해주시겠어요?
추구하는 가치라고 한다면, 다만 느리고 잔잔하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움직이더라도 원하는 방향을 알고 확실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두 사람이 성향이 많이 달라서, 책 제목처럼 걸음에 비유하자면 율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 나가는 편이고 유탁은 목표를 명확히 세우고 최단 거리로 달려 나가는 편이거든요.
멈춰서서 방향을 살피는 힘은 율에게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힘은 유탁에게서 나온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지내는 날들이 느슨하면서도 알차다고 느낄 수 있고, 꾸준히 잔잔한 파도 같은 날들을 이어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싶어요.
저는 이른바 ‘콘텐츠 제작’ 업종에 종사하면서 이런 말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수용자(소비자) 타깃을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디테일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대중을 사로잡는 ‘한 방’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걸 종합한 기획서가 먼저 나와야 한다, ···. 이런 단계들이 뭐랄까, 군인들의 사격 훈련과 비슷하단 생각을 자주 합니다. 과녁을 명중시키기 위해 영점 조준을 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한 발의 총성을 울리고, 이 모든 걸 기술해놓은 사격 교범이 존재하고, ···. 뜬금없이 군대 얘기를 늘어놓아서 죄송합니다.(웃음)
이런 저여서 그런지, 작가 배율의 그림(인스타툰)을 보면 편안해집니다. 작가 배율의 그림은 ‘콘텐츠 제작’ 업종의 프로세스로는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류의 결과물 같습니다.(웃음) 작가 배율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작가 배율의 이야기(사랑하는 사람과의 소소한 일상)를 담고 있고, 그 이야기 안으로 대중을 초대합니다. 이를테면 국내외 인스타그램 팔로워들의 신청을 받아 결혼식 사진을 일러스트레이션화하는 작업처럼요.
대중을 ‘쏴 맞춰야 하는 과녁’으로 보는 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일상을 공유하고 있는 삶의 동료들’로 보는 시각이랄까, 이런 정서가 느껴져서 배율 작가의 그림을 저는 좋아합니다. ‘고양이에게 간지럼을 태우는 듯한 보드라움’이라고 저 스스로는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질문을 드려보고 싶어요. 그림을 그릴 때 어떤 ‘마음’이세요?
저는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라서 항상 그림을 말과 글 대신이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렇다 보니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듯 그림을 그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림을 보고 누군가 반응을 해주면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어요.
대중을 과녁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고 하셨지만, 실은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이야기에 기뻐하는지 관찰하는 편이에요. 내가 가진 수많은 이야기 중 어떤 부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어떤 그림을 건네야 사람들 마음에 잘 닿을 수 있을까?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등등 고민이 가득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매일 백지를 마주하고 새로운 그림을 그리다 보면 힘들기도 해요. 하지만 마음에 드는 콘티가 나오거나 왠지 마음에 드는 그림이 그려지는 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그림을 그린 날에는 뿌듯하기도 하고 의욕이 생깁니다.
제가 ‘진유탁 디자이너’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2018년 제1회 〈대강포스터제〉였습니다. 전람회의 ‘꿈속에서’를 주제로 한 포스터 작업을 봤거든요. 이듬해 〈뷀트포메트 국제 포스터 페스티벌3〉 행사 때도 국내작 섹션 「단도전(Monochrome Show)」에서도 진유탁 디자이너의 출품작을 봤습니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포스터요.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두 작업을 다시 봤는데, 상당히 다크(?)했습니다. 색감도 색감인데, ‘부서지는’ ‘깨지는’ ‘흩어지는’ ‘사라지는’ 이미지들이 보였어요. 물론 일부 작업들만 가지고 한 디자이너의 스타일을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아, 저렇게 다크한 표현을 구사하기도 하는 디자이너구나’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건 그저 막연한 제 느낌인데요, 배율 작가와는 ‘크리이에이터로서의 성향’이 많이 달라 보였습니다. 그런 두 작업자가 YY 그래픽스라는 공동체로 협업을 한다는 점이 흥미롭기도 했고요. 물론 이 모든 얘기는 저의 얕은 인상비평일 테지요. 디자이너 진유탁, 크리에이터 진유탁에 대해 좀더 알고 싶습니다. 어떤 작업을 하는지, YY 그래픽스 안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등등요.
저희가 하는 일은 크게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나눌 수 있어요. 저는 디자인 담당이고, 율은 일러스트레이션 담당이에요. 그중에서도 제가 주로 하는 일은 UX 디자인 분야입니다. 맡게 되는 일에 따라 그래픽 작업이나 브랜딩 디자인을 하기도 하고, 기회가 닿는 만큼 전시나 이모티콘 제작 같은 사이드 프로젝트도 하고 있어요. 인스타툰 제작에도 기획자·편집자의 포지션으로 관여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전시에서는 다크한 작업들만 보여드린 것 같네요. 내면 한 구석에 그런 감성을 가지고 있는지 종종 진지하고 무거운 느낌이 나는 이미지를 만들게 되더라고요. 최근에는 밝고 가볍게, 그리고 힘을 빼서 작업하는 걸 시도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이모티콘을 제작하기도 했고, 지금 작업 중인 프로젝트에서는 캐릭터를 도입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향이 이과생이라 인과 관계에 많이 집중하거든요.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으면 공학이나 과학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렇다 보니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고 다음 발걸음을 결정하는 일은 제가 많이 담당하고 있어요.
『타이포그래피 서울』이 첫 인터뷰 때만 드리는 ‘공식 마지막 질문’입니다. 『타이포그래피 서울』이 계속 이어가고 있는 인터뷰 시리즈가 하나 있는데요. 타이틀이 「interVIEW afterVIEW」입니다. 과거에 인터뷰했던 분들을 수 년 뒤 다시 만나보는 코너예요. 5년 후 YY 그래픽스 두 분에게 두 번째 인터뷰를 요청드릴지도 몰라요. 그때쯤 배율·진유탁 듀오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길 바라세요?
모르긴 몰라도 지금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5년 전보단 제법 나아졌지? 하며 슬쩍 웃을 수 있는 정도면 좋겠습니다. 지금보다 더 숨차게 달리고 있어도 좋을 것 같고, 더 어슬렁거리며 걸어도 좋을 것 같아요. 어느 속도로 가든 저희가 추구하는 느슨하고 알찬 날들, 잔잔한 파도를 간직하고 있다면요. 5년 후에 지금을 돌아보며 두 번째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