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을 떠올리면 좀더 쉬운 관람이 가능할 듯
VR 전시 〈인간, 물질 그리고 변형 – 핀란드 디자인 10000년〉
태초의 유인원이 도구를 휘두른다. 그 도구란 짐승의 뼛조각이다. 유인원은 뭔가를 잘게 부수려는 듯 손에 든 뼈로 타격점을 연신 내려치고 있다. 이윽고 유인원은 포효하며 제 도구를 하늘 높이 던진다. 카메라가 그 도구의 비상을 슬로모션으로 좇는다. 그러다 별안간, 푸른 하늘에서 검은 우주로 씬이 바뀐다. 날아오르던 뼛조각은 어느새 우주선으로 대체돼 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68년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이다. 땅에서 우주로 나아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역사는 이토록 극적이며 영화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인간, 물질 그리고 변형 – 핀란드 디자인 10000년〉(국립중앙박물관 2019.12.21-2020.5.10 / 이하 ‘핀란드 디자인 10000년’)은 개최 당시 퍽 화제를 모았다. 핀란드국립박물관, 핀란드문화재청, 헬싱키디자인박물관, 알바알토박물관 등 핀란드 현지로부터 대여한 희귀 전시품들 때문만은 아니다. 전시 자체의 독특한 구성이 특히 관심거리였다.
“우리는 ‘과거-현재-미래’처럼 단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다. 만약 이러한 단순한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면 어떨까?” 전시 소개문에서부터 이렇게 밝힌 것처럼, 〈핀란드 디자인 10000년〉은 선형적 연대기가 아니라 특정적 맥락에 따라 1만 년의 인류사를 전시장 안에 펼쳐놓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고대 핀란드인들이 신성시했다는 ‘곰 머리뼈’와, 위르외 쿠카프로(Yrjö Kukkapuron, 핀란드의 건축가 겸 가구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카루셀리 의자’(Karuselli Lounge Chair, 1964)의 원형이 병치돼 있다. 두 전시품 사이에 놓인 맥락의 가교를 건너뛴다면, 곰 머리뼈와 카루셀리 의자는 생뚱맞게 보이기 십상이다.
[…] 과거에는 환경에 대한 기존의 경험을 통해서만 공간을 인식했다. 관찰된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종교의 본질에는 인간의 감각을 뛰어넘는 인식이 담겨 있다. 초감각적 인식은 주변 환경을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핀란드에서 곰은 신성한 기원을 가진 존재였다. 곰의 두개골은 성물로 여겨졌다. 사냥한 곰의 각 부위에는 그 힘이 남아 있다고 여겨, 뼈는 숲으로 돌려주고 두개골은 나무에 매달아두었다. 오늘날 인간의 감각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난다. ‘카루셀리’ 의자는 작가 자신의 몸을 기반으로 그물망과 석고를 이용해 원형을 만든 것이다. 최고의 편안함을 위한 인체공학적 연구의 산물 안에는 물질의 속성과 지식, 인간의 감각에 대한 모든 요소가 담겨 있다. *전시 해설 중 |
위 텍스트와 같은 맥락의 가교들이 〈핀란드 디자인 10000년〉에는 세워져 있다. 이 다리들-텍스트들을 찬찬히 건너는-읽는 동안 관객들은 비로소 본 전시만의 이색적인 시간대에 안착하게 될 듯하다. 태초의 도구들과 오늘날의 사물들 사이에 놓인 1만 년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씬 전환만큼이나 짧고 극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핀란드 디자인 10000년〉은 VR(Virtual Reality) 공간에서 여전히 개최 중이다. 물리적 전시장에서 맥락의 가교들을 미처 다 건너지 못했던 관객들이라면, VR 전시를 통해 다시금 1만 년의 타임라인을 순방해보는 것은 어떨까.
첫 번째 상위 섹션 ‘인간은 사물을 만들고 사물은 인간을 만든다’ 전시작 일부나란히 놓인 손도끼와 노키아 휴대전화, 이윽고 떠오르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위 사진]
* VR 전시 화면 캡처
사족을 하나 보태자면, 지난해 10월 말 한국원자력환경공단과 핀란드의 폐기물 영구처리 시설 건설사 포시바(Posiva)가 MOU를 체결한 바 있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고준위방폐물, High-Level Radioactive Waste) 처분 기술과 관리 노하우를 공유한다는 내용이었다. 〈핀란드 디자인 10000년〉의 ‘1-3. 물질의 변용(Material Engagement)’ 섹션에는 포시바의 폐기물 처리 시설 부품도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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