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이너 릭 발리센티(Rick Valicenti)는 1980년대 디지털 타이포그래피를 이끈 선구자들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또 그는 여러 사회 이슈에 대한 적극적인 디자인 실천을 지속해오고 있는 디자이너이자 교육가이기도 하다. 그는 디자인 평론가 스티븐 헬러(Steven Heller)와의 과거 인터뷰(『PRINT』 매거진 2006년 11/12월호)에서, 자신이 만든 디자인스튜디오 Thirst의 첫 모노그래프 『Emotion as Promotion: A Book of Thirst』(The Monacelli Press, 2005)를 언급하며 이런 말을 했다. “좋은 디자인은 좋은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나오는 것(A good design process yields good design)”이라고. 교과서적이고 일면 추상적이기까지 한 제언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이 교과서적인 추상성을 구체성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바가 바로 디자이너의 일 아닐까. 좋은 디자인과 좋은 디자인 프로세스란, 어떤 디자인을 좋게 보고 어떤 디자인 프로세스를 좋다고 여기는지에 대한 디자이너 개인 혹은 디자인스튜디오의 관점과 관계된 문제다. 그렇다면, 위 발언의 당사자인 릭 발리센티가 30여 년째 이끌어오고 있는 스튜디오 Thirst는 어떨까. 유독 ‘대화’라는 키워드를 자주 반복했던 Thirst 디자이너들과의 인터뷰, 아니 대화를 소개한다.
Prologue
written by Thirst
“Thirst는 1988년 설립된, 시카고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입니다. 뉴욕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MoMA), 쿠퍼 휴잇 스미스소니언 디자인 박물관(the Smithsonian Cooper-Hewitt National Design Museum), 홍콩 헤리티지 박물관(Hong Kong Heritage Museum)으로부터 인정받은 국제적인 스튜디오이기도 합니다.
디자이너로서 저희는 ‘대화’를 구축합니다. 이런 키노트의 일환으로 Thirst를 설립한 릭 발리센티는 중국 베이징·상하이, 일본 도쿄·오사카·요코하마, 말레이시아 콸라룸프르 등 여러 아시아 지역에서 작업하며 강연을 진행했습니다. 디자이너로서 세계 각지의 많은 이들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려는 시도인 것이죠.
Thirst는 디자인 분야뿐 아니라 문화, 건축 등 각계 리더들의 활동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디자인이라는 가치를 통해 저희는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고 실험하는 과정에 동참하며, 콘셉트 도출과 디자인적 기술, 정교함에의 탐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로서 대화를 구축한다”라고 소개해주셨는데요. Thirst가 만들고 싶어하는 “대화”는 무엇에 관한 것이며,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가요?
Thirst는 공동의 디자인 실천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모든 작업을 ‘관계 맺기’로 보고 있어요. 작업자인 저희와 클라이언트의 관계, 작업 자체와 대중의 관계 말이죠. 디자인에 대한 이 같은 접근 방식은 깊은 신뢰를 바탕에 두어야만 가능합니다. 저희가 매 작업마다 아주 많은 대화를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해요.(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 상호 간에 대화라는 것이 그리 자주 허락되는 건 아닙니다만.)
때때로 저희는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디자인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간단히 말해 디자인이란, 질문을 던지는 플래시 카드 같은 것이거든요. 이때 ‘질문’이란, 정확한 디자인적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답을 찾도록 해주죠. ‘질문을 통해 답을 찾기’. 이 프로세스가 이루어지려면 당연히 대화가 필요하죠.
저희는 디자인이 판매라는 기능적 측면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교육과 정보 제공은 물론이고, 놀라움과 기쁨을 선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죠. 또한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 저희 작업이 최상의 수준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인간 존재를 창의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디렉터 릭 발리센티를 포함해 버드 로데커(Bud Rodecker), 존 포보제스키(John Pobojewski), 카일 그린(Kyle Green), 김택현(Taek Kim), 잭 미닉(Zach Minnich), 안나 모트(Anna Mort), 바바라 발리센티(Barbara Valicenti) 등 8명이 현재 Thirst에 소속돼 있습니다. 지금의 8인 체제를 이루기까지의 과정, 구성원들끼리의 첫 만남이 궁금합니다.
Thirst는 설립자인 릭 발리센티, 두 명의 수석 디자이너 존 포보제스키와 버드 로데커, 이렇게 3명을 중심으로 운영됩니다. 디자이너인 카일 그린, 김택현, 잭 미닉, 안나 모트, 그리고 릭의 여동생이자 스튜디오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바바라 발리센티, 이렇게 모두가 Thirst를 시카고에서 가장 재능 있는 스튜디오로 이끌어가고 있죠.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프로그래머 클락 넬슨(Clark Nelson), 인턴 디자이너 써머 콜먼(Summer Coleman) 역시 Thirst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스튜디오의 모든 디자이너들은 인턴 기간을 거쳐 지금과 같은 정식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Thirst 고유의 디자인 철학, 디자인 접근 방식, 그리고 기술적인 부분을 교육하는 데 인턴 시스템은 최적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지속성 있는 결속력 또한 가능해지고요.
〈The Mobile Food Collective〉를 위한 영상 인스톨레이션 〈Gather Give Grow〉
디렉터 릭 발리센티는 작품 안에 자기 자신(ego)을 곧잘 투영한 디자이너로도 유명합니다. 그런 그가 설립한 스튜디오인 만큼, 왠지 소속 디자이너들의 작업에도 각자의 개성을 최대한 허용하는 분위기가 있을 것만 같은데요. 어떤가요?
요즘엔 클라이언트들도 디자인 툴이나 소프트웨어를 웬만큼 다룰 줄 알아요. 단지 이런 기능적인 도움이나 얻으려고 디자이너들에게 오지는 않죠. 클라이언트들이 원하는 것은 독자적인 전문지식과 관점이에요. 그래서 본인들이 원하는 디자이너를 ‘선택’하죠.
Thirst뿐만 아니라 모든 스튜디오들은 고유의 디자인적 접근법을 갖고 있어요. 그것은 말하자면 스튜디오 각각의 세상 보기 방식이 투영된 가치관,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자신의 성격, 취향, 감성 같은 것들이 디자인 작업과 완전히 분리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요.
릭 발리센티는 ‘창조성은 디자인적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라는 철학으로 지난 30여 년간 Thirst를 이끌어왔습니다. 디자인스튜디오의 창조성이란 곧 디자이너 각자의 개성과 기량의 총합입니다. Thirst의 모든 디자이너들이 저마다 다른 재능과 기술을 갖고 있어요. 스스로 자신의 능력치를 끊임없이 실천하고 발전시켜나가는 분위기입니다.
자기 색채가 뚜렷한 디자이너들이 서로를 신뢰할 때, 비로소 스튜디오 차원의 진정한 창조성이 발현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희는 저희만의 창조성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길들을 찾아 나서는 데에서 언제나 흥미를 느낍니다.
Thirst 홈페이지에는 저희 디자이너들의 개인 작업을 소개하는 ‘Curio’라는 섹션이 있습니다. 각자가 매달 하나의 비주얼 실험 작업을 진행하고, 그것들을 소셜미디어 채널을 통해 전 세계 대중과 공유하는 형태예요. 이런 활동은 Thirst 디자이너들의 크리에티비티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줄 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관점을 잃지 않도록 해주죠.
한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강구룡 씨가 『타이포그래피 서울』에 기고한 칼럼에서 Thirst의 작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잉크가 흘러내린 듯한 형상 같기도 하고, 지표면에 균열이 간 이미지도 떠오릅니다. 작업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Thirst가 추구하는 타이포그래피 운용에 대한 생각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릭 발리센티의 페인팅 작업으로, 일종의 ‘중력을 재료로 활용한(Utilizing Gravity)’ 프로젝트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흘러내리는 잉크의 우연성에 디자이너의 의도성을 융합해본 것인데요. 그는 시카고 스카이라인이 내려다보이는 자신의 반 데어 로에 아파트(The Van Der Rohe Apartments) 13층을 잉크아트 스튜디오로 임시 개조해서 9개월간 몰두했어요. 릭 발리센티 자신의 순간적인 정서를 수묵화용 잉크와 종이로 기록하는 작업이었고, 이 기간 동안 쌓인 결과물들은 총 575개에 달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완성된 작품들은 〈Notes to Self〉라는 타이틀로 소개되었습니다. 575가지 작업에 나타난 각각의 표현의 흔적들은, 자기 안에서 일어난 ‘내면의 대화(internal conversation)’를 그야말로 시각적 수단으로써 포착해낸 결과인 것이죠. 릭 발리센티 자신의 인생 비주얼 다이어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 릭은 폼 브러쉬(foam brush)와 터키 바스터(turkey baster) 같은 도구를 이용하거나, 잉크 방울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는 등의 방식을 통해 다양한 감정 표현 테크닉을 실험했습니다. 이렇게 종이 표면에 남겨진 잉크 흔적들을 롤링하여 독특한 글자체로 완성시키기도 했죠.
현재 진행 중인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 너무 많은 정보를 궁금해하지는 않겠습니다.
두 가지 프로젝트를 소개해드리고 싶은데요. 먼저, 시카고 웨스트 룹(West Loop) 지역에 건설되고 있는 ‘스포크 아파트(Spoke apartments)’를 위한 아이덴티티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이 아파트는 위치적으로 시카고의 핵심 도로들 및 간선도로변 자전거 전용차선, 대중교통 노선과 인접해 있습니다. 이동성과 접근성 측면에서 시카고의 허브 역할을 표방하고 있죠. Thirst는 이런 특성들이 자유분방한 사고를 가진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어필될 수 있는 그래픽 아이덴티티 프로그램을 고안했습니다.
또 다른 프로젝트는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Poor Dog Group’과의 작업입니다. Poor Dog Group은 참신한 창작 무대를 기획하고 상연하는 공연 앙상블 팀입니다. 2008년 캘리포니아예술대학(CalArts) 학생들이 모여 만들었죠.
이 팀이 최근 제작한 프로그램 중에 〈Group Therapy〉라는 게 있습니다. 전문 상담가와 함께 무려 16시간 동안 그룹 구성원 각자의 테라피 세션을 진행합니다. 결혼, 이혼, 소외감, 알코올 중독 같은 저마다의 사정들이 고백되는데, 이 과정은 모두 녹화되고 글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무대극으로 만들어지죠. 일종의 다큐멘터리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룹 구성은 절친한 친구들끼리로 이루어지는데요. 감춰두었던 아픔을 꺼내 보임으로써, 그동안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일순간 낯설어지게 됩니다. 나와 너의 ‘낯설게 하기’를 바탕으로, 이들은 서로의 낯선 아픔을 무대극의 소재로 활용하며 우왕좌왕하게 되죠. 이런 체험의 연속을 통해 한 편의 예술이 완성되고, 구성원들은 자연스럽게 ‘견디기’의 방식을 체득합니다.
‘Poor Dog Group’의 〈Group Therapy〉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저희 Thirst가 진행한 작업은, 디자이너 각자에게 할당된 ‘구성원들의 말(대사)’을 시각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과물들은 프로그램 기념품 디자인에도 적용했는데, 일련의 규칙을 따랐습니다. 저희가 직접 열정적인 무대극을 감상한 뒤에 영감을 받아 만든 규칙이기도 합니다. 오직 타입으로만 구성된 34개의 유니크한 요소들을 ‘XX x XX’ 형태로 조합했고, 세부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 GT America Mono 서체만을 쓸 것(웨이트 선택은 자유)
· 타입 컬러는 검은색만을 쓸 것
· 무대극에서 언급된 문장(대사)만을 쓸 것
· 반복(repetition)과 변화(variation) 작업에선 피보나치 수열을 쓸 것
· 전체 구도는 반드시 황금비율이어야 할 것
소리와 시각에 관한 행사라고 소개한 〈Third Coast Audio Festival〉 관련 프로젝트가 눈에 띄었습니다. ‘audio made visual’이라는 콘셉트가 퍽 강렬하게 다가왔는데요. 이건 아마도 인터뷰어인 제 개인적으로 ‘소리(구술성)를 실현하는 타이포그래피의 가능성’, ‘시각을 넘어 공감각의 차원에 가 닿을 수 있는 시각 디자인의 가능성’ 등에 관심이 많아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욱 〈Third Coast Audio Festival〉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Third Coast International Audio Festival〉은 풍부한 사운드가 돋보이는 오디오 스토리를 팟캐스트와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시하고, 연례 페스티벌을 통해 선보이는 국제 행사입니다. 타이틀처럼 ‘오디오 페스티벌’이자 ‘오디오 전시’인 형태입니다. 이 점에 착안하여 Thirst는 오디오-소리를 비주얼로 표현한 그래픽 아이덴티티를 제안했습니다. 비록 공식 아이덴티티로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작업이었습니다.
기본 콘셉트를 간략히 설명하면 ‘음성 메시지를 시각화하기’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Third Coast Audio Festival”이라고 말하면, 특수 개발된 소프트웨어가 해당 소리(음성 메시지)의 음파 형태, 즉 웨이브폼(audio wave form)을 파악하여 이를 토대로 특정한 로고를 도출하는 것이죠.
이 로고는 매번 다르게 표현됩니다. 이런 반복(iteration) 시스템은 말하는 이의 각기 다른 목소리에 따라 작동하는 것입니다. 즉, 목소리가 다른 만큼 웨이브폼도 다르고, 따라서 로고 또한 달라집니다.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 〈Third Coast International Audio Festival〉의 그래픽 아이덴티티는 관객(혹은 청취자)의 다양한 음성만큼 다채로워지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이 작업의 성격은 ‘아이덴티티’이므로 다양성 못지않게 통일성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소프트웨어의 로고 생성 체계(스크립트)에는, 로고의 사이즈·컬러·쉐입 조절에 관여하는 몇 가지 매개변수(parameter)가 설정돼 있습니다. 〈Third Coast International Audio Festival〉과의 시각적 연관성, 식별성 등의 기준값을 미리 매겨놓은 것이죠.
릭 발리센티를 비롯하여 스튜디오 소속 디자이너 모두가 교육이나 강연 활동에도 열심인 것 같습니다. 3st AIR, Curio, Moving Design이라는 세 가지 프로그램도 인상적이고요. Thirst가 추구하는 ‘대화’의 프로세스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개인적인 실험이든, 교육과 강연이든, 또는 다른 어떤 방식이든, Thirst는 모든 디자이너들이 스스로의 역량을 넓혀나갈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들은 디자이너로서, 그리고 누군가의 멘토로서 그 자질에 깊이를 더해주죠.
앞서 간단히 소개해드리기도 했던 ‘Curio’는 일종의 랩(lab)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달이 주어지는 과제―‘크리에이티브 프롬프트(Creative Prompt)’라 표현하고 싶습니다―에 대하여 Thirst 디자이너들은 자신만의 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답은 어떤 형태로든 가능한 것이고요.
‘3st AiR(Artist in Residence)’는 외부 스튜디오 디자이너들과의 콜래버레이션 프로그램입니다. 아무래도 내부 디자이너들끼리만 작업하다 보면 관습에 젖을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거품’이 생기게 마련이죠. 이런 걸 깨뜨려보자는 취지로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You Are Beautiful’이라는 스튜디오의 매튜 호프먼(Matthew Hoffman)은 3st AiR에 참여했던 디자이너들 중 한 명입니다. 매튜와 저희 Thirst는 설치 작품, 폰트, 웨어러블 아트(wearable art) 작업을 함께 진행했죠.
‘Moving Design’은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디자이너들의 재능과 역량으로써 응답해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수자원 문제, 자전거 안전, 총기 범죄 같은 이슈들을 다룬 바 있습니다.
LED 89개를 활용한 비디오 조각(video sculpture) 작품으로, 너비 약 45미터, 높이 약 6미터 규모다.
김택현이 타이포그래피 작업 전반을 담당한 300페이지 분량의 작업물로, 제작 기간 3년이 소요됐다.
존 포보제스키는 미국판 『CA』 매거진의 ‘시카고 디자인의 새로운 현재(New Currents in Chicago Design)’라는 코너(2016년 5/6월호)에 소개되기도 했죠. 한국의 어떤 디자인 매거진은 시카고를 ‘실험적인 도시’라고 수식하기도 했는데요. Thirst가 생각하는 ‘시카고’, 그리고 ‘시카고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시카고는 디자인을 배우고 실천하기에 좋은 도시입니다. 미국의 모더니즘이 바로 이곳 시카고에서 활기를 띠게 되었죠. 1937년 라슬로 모홀리 나기(László Moholy-Nagy)가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New Bauhaus)’를 설립했고, 학생들이 점차 이 지역으로 옮겨 오면서 디자인 영역의 뛰어난 리더이자 새로운 세대로서 정착해갔습니다.
이들의 성장과 활동에 힘입어, 디자이너는 중대한 사업적 사안을 결정하는 데 꼭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시모 비넬리(Massimo Vignelli), 레스터 빌(Lester Beale), 존 매시(John Massey), 로버트 보겔(Robert Vogele)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초기 활동 무대가 시카고이기도 했고요. Thirst가 이런 ‘시카고 디자인’ 역사의 오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늘 의식하려고 합니다.
2014년에는 시카고 시 주최로 〈CHGO DSGN〉이라는 전시가 열렸습니다. 시카고에서 활동하는 주요 디자이너들의 다양한 최근 작업과 그래픽 디자인을 선보이는 기획전이었고, 전시작 200점 이상 규모인 큰 행사였죠. 릭 발리센티가 〈CHGO DSGN〉의 총괄 큐레이팅을 담당했고, 저희 Thirst는 이 전시의 네이밍과 아이덴티티부터 디스플레이, 내용 등까지 포괄적으로 기획하며 진행했습니다.
이 전시는 시카고라는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만든 디자이너들, 그리고 ‘시카고 디자인’의 명맥을 잇고 있는 차세대 디자이너들을 모두 아우르는 자리였는데요. 2014년 행사 이후로 〈CHGO DSGN〉의 전시 일부는 중국 베이징, 텍사스의 오스틴 카운티 등지를 순회하기도 했습니다.
Epliogue
written by Thirst
“Thirtst 설립 첫 해인 1988년, 릭 발리센티와 사진가 톰 백(Tom Vack)은 필립 스타크(Philippe Starck)의 첫 콜렉션 카탈로그 작업을 담당했습니다. XO 브랜드의 카탈로그였어요. 지금의 필립 스타크는 세계적인 제품디자이너이자 일흔을 바라보는 거장이지만, 당시엔 30대 중반의 젊은 작가였습니다.
레이아웃 시안들과 피드백을 주고받는 와중에 큰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필립 스타크가 팩스로 ‘세 번째’ 레이아웃에 대해 언급하면서 ‘3rd’가 아니라 ‘3st’라고 쓴 것이었죠. 이 작은 오타 하나에 Thirst 디자이너들이 무척 재미있어 했습니다. 팩스를 소리 내서 읽기도 했는데요.
1st(first), 2nd(second), 3st(THIRST)!
바로 이때가 ‘Thirst’라는 스튜디오명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3st’를 발음하는 동안 우연히 ‘Thirst’와 만난 거죠. 이 단어야말로 저희가 디자인과 문화 영역에서 새롭게 추구하고 싶었던 가치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해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후 한 달간 저희 개개인의 작업에 ‘Thirst’라는 타이틀을 붙이기로 했어요. 그리고 얼마간 톰 백 역시 밀라노와 뮌헨에서 진행했던 자신의 사진 작업을 ‘Thirst’라 부르기도 했죠.
이 이름을 처음 쓰기로 한 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희는 줄곧 엑설런스에의 ‘갈망-Thirst’을 지닌 디자인 스튜디오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약 30년 전 큰소리로 읽으며 느꼈던 그 의미 그대로, ‘Thirst’는 여전히 저희에게 생생한 가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