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국회의사당 지붕이 열리면서 태권브이가 출동한대." 그러나 설마 진짜로 보게 될 줄이야. 비록 영상이긴 했지만 태권브이 주제곡이 흐르면서 국회의사당에서 태권브이가 나타나는 장면을 보았을 땐 눈이 동그랗게 떠지면서 꺄아! 이거 누가 만들었어? 그리고 조용필의 헬로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또 한 번 꺄아! 도대체 이거 누가 만들었어? 내놓는 작업마다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룸펜스’ 아트 디렉터 최용석을 만났다.
최근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시는지 근황을 좀 말해주세요.
타이거 JK와 윤미래 그리고 비지라는 새 팀하고 독립해서 레이블을 차렸어요. 9월에 나올 작업을 준비하고 있고 조용필 일본 진출과 관련한 뮤직비디오랑 이효리가 스피카와 함께 온 스타일에서 방송하는 게 있는데 거기에 들어갈 영상작업을 하고 있어요. 최근 아들이 태어나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웃음).
다방면으로 작업을 많이 하셨는데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태권브이 영상인가요?
그땐 기술적으로 신기해서 그랬는지 많이들 좋아해 주셨는데 사실 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다양한 작업을 해보고 싶었는데 프로젝션 맵핑하는 사람이라고 이미지가 굳어진 탓도 있고요. 안 해본 거를 해보고 싶어 하는 성향이 강해서 전시나 공연, 뮤직비디오 작업도 재미있게 도전해본 것 같아요. 설치작업이나 인터렉티브 등 다방면에 호기심이 많아요. 깊이는 없이 두루두루 넓게 하고 있습니다(웃음).
보기엔 몇 분짜리 영상이지만 엄청난 수고가 들잖아요. 노력도 많이 하실 것 같은데요.
그냥 일상의 웨이브가 다 그쪽에 가있으니까요. 공부를 계속 하는 거죠. 제가 잘나서 하는 게 아니라 누구든지 기회가 오거나 해야 할 목표가 생기면 대부분 잘 해내실 거예요. 뮤직비디오 감독이나 광고감독이 되려면 조감독 생활을 몇 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전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모르는 것도 엄청 많았어요. 하지만 이걸 해야 하는 기회가 왔을 때 제 나름대로 쌓아온 여러 경험들을 바탕으로 만드니까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한 번 하면 거기에서 노하우가 또 생기고요. 그런 성취와 재미 때문에 계속 하게 됐죠.
룸펜스라는 이름엔 어떤 유래가 있나요?
대학 다닐 때 저랑 비슷한 친구들끼리 학교 창고 같은 데서 매일 작업을 했어요. 이 수업은 재미없고, 저 수업은 안 좋고 뒷담화 하면서(웃음). 그럴 때 가끔 교수님들이 문 열고 들어오시면 “이런 룸펜 같은 놈들~” 이러셨는데 그게 또 괜히 멋있어서 이름으로 지은 거죠. 다들 취업하고 유학 가고 저 혼자 남아서 하고 있지만요. s가 붙은 이유는 URL 도메인이 룸펜이 있어서(웃음) 언젠가는 여러 명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도 있고요. 현장에서 룸 감독님이라고 부르거나 펜스야 이러기도 해요.
그가 작업한 영상물에선 자연스러운 리듬감이 느껴진다. 소리를 끄고 화면만 보아도 저절로 몸을 흔들게 하는 흐름이 있다. 물방울이 모여 강물을 이루고 강줄기가 모여 바다로 흘러가듯 하나하나의 이미지는 연속된 동작으로 이어지고 그 안에서 탄생한 리듬은 그 자체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 중에서도 유난히 빛나는 별 하나가 있듯, 그 타고난 감각이야말로 그를, 그의 작업을, only one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나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는 타이거 JK 형과 미래를 만난 일이에요. 두 사람하고는 코드가 정말 잘 맞아요. 처음엔 뮤지션과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만났지만 편하게 지내다 보니 제 결혼식에서 축가도 불러주시고 제 아들에 대한 노래도 만들어주셨어요. 그리고 이효리 누나. 이 고양이도 효리 누나가 구해준 고양이에요. 제가 격식 차리는 걸 싫어해서 잘 안 맞는 분도 있지만 일단 마음이 통하면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게 돼요.
영상작업을 언제부터 하게 되신 건가요?
아주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부유하게 잘살다가 집안이 몰락하면서 고등학교 내내 가수들 뒤에서 춤추는 일을 했는데 춤은 못 춰서 그만뒀어요(웃음). 그땐 생각 못 했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때 겪었던 현장 경험이 도움된 것 같아요. 미대 갈 생각은 전혀 안 하다가 스물한두 살 때쯤 제대로 공부를 해보고 싶어서 미술학원엘 다녔죠. 진짜 열심히 했어요.
룸펜스의 작업은 영상과 소리의 조합이 탁월하다는 피드백이 많던데 타고난 감각인가요?
제가 춤을 춰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리듬감이 있는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이건 그냥 있어 보이려고 척하는 이야기고요. 저보다 더 잘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제 장점이라면 쫄지 않는 거?(웃음) 요샌 눈들이 다 높잖아요. 의뢰하는 분들의 수준이 더 높으세요. 요구하는 퀄리티도 높고요. 진부한 건 저도 싫어서 계속 공부하고 있어요. 같이 작업하는 동생들이 구리다고 하는 게 제일 무서워요(웃음).
작업하면서 혹시 원칙처럼 지키고 있는 게 있으신가요?
잘 지키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웃긴 걸 좀 넣으려고 해요. 유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슬픈 내용이라고 해도 재미있든 화려하든 담백하든 저희만 아는 거라고 해도 유모를 넣는 걸 좋아해요. 사회적인 풍자까진 아니어도 뭔가 사회 현상에 대한 장난? 조롱? 이런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나름대로 유머를 숨겨놓는 걸 되게 좋아해요. 또 한 가지 원칙이라면 추억이 되지 않는 작업은 안 하고 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과정이 재미있고 나중에도 그땐 이랬지 저랬지 라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작업을 우선으로 고르죠.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하는 일인데도 그의 작업에선 '사람 냄새'가 난다. 일 속에서 일을 한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소통'을 하면서 일을 해서일까. 그는 꿈꾸는 눈동자로 먼 곳을 그리워하고 소년의 심장을 지닌 채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지만, 어느 순간 우리의 옆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그가 만드는 영상은 그 기록이며 글이고 말이다. 영원히 늙지 않을 듯한 지구별 여행자, 세상에 오직 한 사람, 이야기꾼 룸펜스. 그의 다음 작업이 몹시 궁금하다.
가장 힘들었던 작업이 있다면요?
윤미래 뮤직비디오였는데 그게 제대로 만들어본 첫 작품이었어요. 쿠엔틴 타란티노를 좋아해서 킬 빌처럼 만들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그대로 흉내 내면 안 되니까 우리식으로 바꿔서 프로젝션 맵핑도 넣고 액션, 와이어, C.G, 살수까지 다 넣었죠. 경험도 없고 부족한 게 많으니 시간 배분도 못 해서 다들 고생했어요. 10시간 걸릴 줄 알았는데 32시간 걸렸거든요. 타이거 JK 형이 아직도 그 얘기해요. 너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비는 엄청 맞고 되게 힘들었다고(웃음). 그래도 굉장히 신 나고 재미있었어요.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해보고 싶으세요?
특별히 어떤 작업을 해야겠다는 건 없고요 계속해서 재미있는 걸 하고 싶어요. 지금은 일단 여행을 좀 길게 갔다 왔으면 좋겠고. 그리고 그 여행기를 영상으로 담고 싶어요. 어떤 설명 없이 그 영상 한편 보면 정말로 거기 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 그런 여행을 하고 싶어요. 여행지는 대자연이 좋아요. 그런데 생각만 할 뿐이고 당분간은 육아 때문에 꼼짝 못할 것 같아요(웃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건 내가 하길 진짜 잘 했다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요?
다 잘 한 것 같아요(웃음).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춤춘 것도 일반적인 시각에선 날라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진짜 뭔가가 있었거든요. 그때 알았던 춤추던 형들이 지금은 아이돌 기획사에서 안무를 하고 있기도 하고. 다른 시각에서 보면 문화적으로 깨어 있었다는 의미도 되니까요. 대학을 간 일도 그래요. 수업이나 학교가 좋아서라기보다 좋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났으니까요. 취업 안 한 것도 잘 한 것 같고, 결혼해서 아기를 낳은 것도 잘 한 것 같아요.
이 분야의 일을 하고 싶다면 무엇을 준비하는 게 좋을까요?
우선은 나 이런 일 한다고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아, 난 뮤직비디오 감독이 되고 싶은데 아무도 나한테 일을 안 주겠지, 누구 밑에서든 몇 년은 더 일해야겠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러지 말고 학생이라도 감독인 것처럼 그냥 자기가 하나 만들어보면 되거든요. 홈페이지나 유튜브에 올려놓고. 그게 재밌으면 의외로 기회가 쉽게 와요. 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빨리 만들어보세요. 저 같아도 좋은 대학 나오고 학점 좋은 애보다 감각적으로 잘 만든 작업 하나 갖고 있는 친구한테 일을 맡기고 싶거든요. 작업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에요. 즐겁게 하세요. 아, 그리고 폰트는 꼭 사서 쓰세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