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 afterVIEW 인터뷰(interview)는 말 그대로 서로(inter) 보는(view) 일이다. 서로 보는 일이나, inter-see가 아니라 inter-view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인터뷰는 책, 기사, 영상 등 ‘인터뷰 콘텐츠’를 전제로 한 서로―보기다. 인터뷰 자체를 콘텐츠 제작 과정의 일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콘텐츠에는 기획 의도가 있으므로, 콘텐츠를 위한 만남과 대화는 어느 정도 기획적·의도적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인터뷰 또한 그렇다. 인터뷰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기보다, 관점과 관점의 상호작용이다. 즉, view와 interaction의 결합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은 2011년 창간 이후 국내외 디자인계 인물 약 300명을 인터뷰했다. 타입디자이너, 그래픽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설치미술가, 대학교 디자인학과 교수, ···. 어느 날 문득, 그들의 인터뷰 이후가 궁금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view를 재확인해보고 싶었다. 지금쯤 그들은 어떤 위치와 어떤 view를 지닌 채 살아가고 있을지. 지금의 view에 새로운 interaction이 더해지면 어떤 interview가 가능할 수 있을지. 그들과 다시 서로―보기를 시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다. 연재 코너 [인터뷰/애프터뷰]를 마련한 까닭은. 특별한 기획의도는 없다. 다만, 그들을 다시 보고 싶었다는 것 외에는.
interVIEW in 2014
그래픽 디자이너 김보휘는 영상 디자인을 먼저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왕왕 미디어아티스트로 소개되고는 했다. 6년 전 인터뷰에서 그는 ‘그래픽 디자인 독학’ 에피소드를 여럿 들려줬다. 영상 디자인에서 그래픽 디자인으로의 커리어 전환이, 당시로서는 스물아홉 살 디자이너 김보휘의 특수성이 될 수 있었다.
afterVIEW in 2020
김보휘 자신은 “선배라는 말은 정말이지 어색하다”라고 하지만, 어쨌든 이제 그는 선배의 위치가 돼 있다.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말았다. 현재 그는 1인 스튜디오 ‘오드 하이픈(Odd Hyphen)’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중”이라고 한다. ‘직업인’을 자처하는 속내는, 묵묵히 직능과 업무를 계속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묵묵함을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 설정한 심리 기반일지도.
김보휘는 ‘후배’ 대신에 ‘나보다 늦게 시작한 동료 분들’이라는 깍듯한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들과 이루려는 관계의 양태가 조금 독특해 보인다. “직업인으로서 내 일을 묵묵히 해 나가다 보면 나보다 늦게 시작한 동료 분들이 김보휘라는 디자이너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주지 않을까 싶다”는 그의 바람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되는 사람이고 싶다, 라고 말이다.
2014년 인터뷰 이후 6년 만입니다. 당시 인터뷰어가 쓴 내용 중에 “그는 이제 곧 삼십대를 앞두고 있다”라는 문장이 있더군요. 그렇다면 현재 시점으로 그래픽디자이너 김보휘는 삼십대 중반이 돼 있겠네요. 세월의 흐름(!)을 새삼 체감하게 됩니다. 그간 어떤 시간들을 보냈을지 궁금합니다. 생활의 변화, 생각이나 태도의 전환, 혹은 한결같음 등등.
6년 전을 생각해보면, 스스로 불안함과 초조함에 매어 있었던 때였던 것 같아요. 동기와 운영하던 영상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나와 홀로서기를 해야 했고, 기존에 해왔던 일과는 다른 업무 프로세스나 방식들 때문에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거든요. 그 후 6년이라는 시간은 그런 문제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헤쳐 나가고 새로운 기준들을 세우는 기간이었던 것 같아요.
과거엔 업무나 관계에 있어서 단조롭고 소극적인 소통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은 조금은 유연해지고 사고의 폭이 넓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초조함과 불안함이 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느낀 후부터는 여유를 가져보려고 노력 중이에요.
되려 생활 패턴이나 인간관계가 전보다 더 단조로워 진 것 같습니다. 저나 제 주위 사람들이 이제는 각자 자기 삶에 충실해졌기 때문에, 서로가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줄어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합니다.
“낯가림이 심한 편인데 디자인을 하면서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요. [···] 무작정 교수님 찾아가서 디자인 과제를 좀 내달라고도 하고. 디자이너도 찾아가고. 시각디자인학과 학생들도 찾아가보고.”
이제는 누군가를 찾아가기보다, 찾아오는 누군가를 대하는 일이 더 많을 듯합니다. 김보휘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러 오는 후배들이 있을 것 같아요. 스스로의 겸손함과는 별개로,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언젠가는 루키 단계를 지나게 되니까요.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디자이너들에게 어떤 선배가 되고 싶으세요? 혹은, 어떤 선배가 안 되고 싶으세요?
예전에도 지금도 ‘선배’라는 호칭은 저에겐 정말 어색한 말 같아요. 어떤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직업인으로서 제 일을 묵묵히 해 나가다 보면 저보다 늦게 시작한 동료 분들이 김보휘라는 디자이너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주지 않을까 싶네요.
다만 제가 디자인을 시작할 때 많은 이야기와 조언을 해줬던 선배들처럼 제 능력 안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제 가치관이나 인간으로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 내 일을 대하는 태도가 긍정적인 영향을 줄수 있는 선배 혹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야금 연주자 박순아의 콘서트 포스터를 디자인하셨죠. 지난해 12월 열렸던 〈노쓰코리아 가야금〉 말입니다. 초록색과 빨간색 버전이 있던데, 저는 후자 쪽을 무척 좋아합니다. 박순아라는 인물이 퍽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잖아요. 제가 종종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박순아 연주자가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어서, 그때 이 음악가를 처음 알게 됐습니다.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계 민족학교를 다녔고, 북한 국립평양음악무용대학으로 가야금 유학을 다녀온 뒤, 일본에서 한동안 활동하다 2000년대 초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더라고요.
이런 유니크한 개인사가 포스터 한 장에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연주자의 의상과 바탕색 모두 빨간색인데, 자연스럽게 일본과 북한이 동시에 연상됐습니다. 특히 저는 세리프체를 쓴 타이포그래피 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뭔가, 전근대적(?) 분위기와 현대적 우아미가 공존하는 느낌이랄까요. 하여간 눈을 계속 붙잡아두는 강렬함이 있었습니다.
‘조총련’ ‘재일교포’ ‘북한’ 같은 키워드가 풍기는 일종의 사회 통념상 고정 관념들이 있잖습니까? 한마디로 딱 정의하긴 어렵지만, ‘샤이(shy)’라는 대표어에 귀속될 만한 것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존재해야 하는 이방인 같은 이미지랄까요. 〈노쓰코리아 가야금〉 포스터는 그런 보편의 정서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 같아요. ‘자 봐라, 나다!’ 하는 듯한. 주절주절 말이 길었네요.(웃음) 〈노쓰코리아 가야금〉 포스터의 작업 과정과 후기를 직접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공연 초기부터 연출가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박순아라는 연주가가 지닌 중첩되어 있는 문화와 정체성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전달돼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를 깊게 했어요. 공연을 기획하시고 연출하신 김은영 연출가님은 기존 국악 공연의 이미지와는 다른, 그리고 박순아라는 사람에 집중이 된 공연이기를 바랐기 때문에 사진 속에서 전통적인 오브제나 의상을 배제하려고 했어요. 그 덕분에 디자인 측면에서 해볼수 있는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맨 처음 일을 진행할 때는, 다른 가야금과는 다른 북한 가야금만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야금이라는 오브제가 주는 기본적인 이미지들을 지우기 어려웠어요. 이런 의도는 연출 방향이 점차 잡혀가고 연출가님과 소통을 거듭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공연 곡들의 경우, 박순아 선생님이 북한 유학 중 연주하신 음악들이었는데 기존에 제 머릿속에 박혀 있던 ‘체제’의 이미지와는 판이했습니다. 화려하고 우아한 느낌의 곡들이었어요. 그래서 사진 작업을 기반으로 전체적인 느낌과 타입의 형태들을 맞춰 나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공연 곡들을 모아 앨범 디자인 작업을 할 때도 그 흐름을 가져갔고요.
“제가 좋아하는 건 사람들이 관심이 없고, 이건 좀 아닌데 하는 건 오히려 좋아해 주시고. 성향에 휩쓸려 맞춰서 작업하진 않지만 가끔은 고민하게 돼요. 완성도가 훨씬 떨어지는데 이걸 왜 다들 좋아하지? 하는 것도 있고요. 아직 답은 못 찾았어요.”
혹시 지금도 이런 경험이 이어지고 있나요? 내 입장에선 B컷인데, 클라이언트 쪽에선 A컷으로 선정해준 작업 같은. 혹은 그 반대. 6년 전 인터뷰 때 못 찾았다고 말한 그 “답”은 찾았는지도 궁금합니다.
그 답은 찾으려 해도 찾아지지 않더군요. 다만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생기다 보니, 6년 전 언급했던 것과 같은 상황은 적어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제 작업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들이 부족하기도 했거니와 방법이 적절치 못했던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예전보다는 명확히 내 의견과 의도를 전달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아직도 처음 만나는 이들 앞에선 낯가림이 심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부분에서는 ‘아, 내가 좀 뻔뻔해졌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제 자신을 보면서 사람은 생존을 위해 변화가 가능한 동물이라는 걸 느낍니다.
올해도 어느덧 하반기로 접어든 지 오래고, 절기상 입추를 지나 여름의 끝자락으로 서서히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19 사태는 당최 종식될 기미가 안 보이고요. 여러모로 어수선하고 번잡하고 쉽지 않은 시절을 나고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럼에도, 디자이너 김보휘가 그리고 꿈꾸는 미래와 희망을 듣고 싶습니다.
이런 물음에 제가 매번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박하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건데요. ‘꾸준히 열심히 묵묵히 내 일을 해나가고 싶다’라는 겁니다. 6년 전보다 지금이, 그리고 앞으로가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는 있지만, 독립 스튜디오의 특성상 항상 불안감을 안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예전 인터뷰 이후로 6년이나 지났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정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아요. 뭔가 많은 일들을 한 것 같기는 한데, 다른 디자이너 분들의 재미난 작업들을 보면 ‘난 아직 할 게 많구나’ 싶기도 하고요. 지금처럼 정신없이 뭔가를 계속 해 나가다 어느 순간 주변을 둘러봤을 때, 작업실에 너저분하게 재미난 작업물들이 쌓여 있길 바라봅니다.
[왼쪽부터] ‘A or B’ ‘TextPost’ ‘집중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