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겠지만, 사람들은 어떤 잘 만들어진 물건을 볼 때 그 물건의 겉으로 드러나는 완성도, 혹은 아름다움만을 인식한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이면에는 그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치열한 과정이 숨겨져 있다. 완벽한 물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과 디테일에 대한 집착 등으로 점철되는 과정은 그 물건만큼이나 큰 가치를 담아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출판계의 거장 게르하르트 슈타이들(Gerhard Steidl)의 책 역시 그런 치열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보통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결과물인 책뿐이기에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었는데, 이번에 슈타이들의 책과 함께 그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지난 4월 11일부터 시작된 대림 미술관의 은 슈타이들과 여러 분야의 아티스트가 함께 작업한 결과물은 물론이고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과정 역시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전시이다.
“제가 생각하는 아티스트와 인쇄전문가의 협업은 좁은 테이블에서 경기하는 탁구와 같습니다.” “이 게임은 탁구공이 나에게 올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또 내가 공을 넘길 때 상대방 또한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창의적인 과정입니다.”
슈타이들과 협업한 아티스트의 면모를 살펴보면 사진작가와 팝 아티스트, 소설가, 패션 디자이너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책’이라는 하나의 매체로 귀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지만, 모든 책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슈타이들의 말처럼 각기 다른 모습으로 관람객에게 다가가고 있다.
2층에서 시작되는 전시 첫 번째 섹션에서는 패션 사진작가인 코토 볼로포(Koto Bolofo)의 콜라주와 사진 작업으로 슈타이들과 슈타이들빌레(Steidlville)의 모습을 보여준다. 슈타이들의 개인적인 면모와 함께 출판의 전 과정이 이루어지는 건물인 슈타이들빌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다. 이어지는 섹션에서는 조향사 게자 쉔(Geza Schoen)과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월페이퍼 매거진이 함께 참여해 만든 향수 ‘Paper Passion’의 향을 맡아볼 수 있는데, 갓 인쇄된 책의 향을 모티브로 제작된 ‘슈타이들의 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종이가 없이는 좋은 책을 만들 수 없죠. 종이에 대한 조사에는 항상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저는 최선의 선택을 확신하기 위해 종이를 사기 전에 다른 특성의 종이들로 시험 인쇄를 해봐요.”
“가끔 책의 활자체 컨셉을 잡는데 책 전체의 레이아웃을 잡는 만큼의 시간이 걸리기도 해요. 저는 동료 카스텐 뤽케와 샤넬 활자체를 함께 창조하는 작업이 정말 즐거웠어요.”
이어지는 3층에서는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와 칼 라거펠트, 팝 아티스트 에드 루쉐(Ed Ruscha)와의 작업을 볼 수 있다. 특히 에드 루쉐의 책 ‘온 더 로드(On the Road)’는 350권 한정판이 소개되고 있어 관람객의 흥미를 끌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흥미를 끄는 것은 종이와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섹션이다. 종이 섹션에서는 다양한 제지 회사에서 만든 종이를 만져볼 수 있어 책에 어울릴만한 종이를 고르는 슈타이들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 타이포그래피 섹션에서는 다양한 영문 폰트를 만날 수 있다. 그중에는 슈타이들과 샤넬이 협업해서 만든 폰트도 있어 슈타이들의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관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슈타이들과 함께 한 아티스트들은 혼자서 전시를 열어도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그야말로 거물급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그들이 단순히 합동 전시를 여는 것과는 달리 각 아티스트의 개성이 슈타이들이라는 인쇄전문가를 만나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또 다른 예술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까. 치열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완벽한’ 책의 가치를 만나볼 수 있길 바란다.
전시 정보
기간: 2013.04.11 ~ 2013.10.06
장소: 대림 미술관(찾아가기)
관람 요금
성인 5,000원
학생 3,000원
어린이 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