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MYK 자수' 기법으로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에블린 카시코프(Evelin Kasikov, 홈페이지). 가로세로 5인치 안에 CMYK(시안, 마젠타, 노랑, 검정) 색을 조합해 알파벳 자수를 놓는다. 색깔을 촉각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들고 싶었다는 그녀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방식의 제작 방법을 모두 시도해 수많은 서체 모듈과 그리드를 만든 것. 보기만 해도 따뜻한 에블린 카시코프의 작업 이야기를 들어본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제 이름은 에블린 카시코프라고 합니다. 에스토니아의 탈린(Tallinn)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어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디자이너로서 그리고 광고 예술감독으로 일했습니다. 2006년에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영국 런던에 있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Central St. Martins College of Arts and Design)으로 유학을 떠났는데요, 그곳에서 촉각 타이포그래피(Tactile Typography)를 접하게 되었죠. 2008년에는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석사 공부를 하면서 제 작품 세계가 완전히 달라졌고 예전에 하던 일을 다시 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어요.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할 수 있는 지금의 일을 선택한 것이 저로서는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타이포그래퍼, 책 디자이너, 삽화가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디자이너가 되도록 이끌었는지 궁금합니다.
제 가족 중에는 예술가나 디자이너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제가 어디서 이런 예술적인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항상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부모님께서는 그런 제가 다양한 미술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셨죠. 그래서 어려서부터 미술을 공부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미대에 진학해서 그래픽 디자이너가 된 겁니다. 좀 더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좀 아쉽네요.(웃음)
‘CMYK 자수’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수공업이 아주 발달한 고장인 에스토니아 출신이지만 저는 자수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굳이 말하자면 수공예와 저는 ‘문제가 많은 관계’라고나 할까요? 수공예품 만드는 일을 좋아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끔찍하게 싫어질 때도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자수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단 그것이 창조적이고 현대적이며 멋지고 예측 불가능한 메시지를 담고 있을 때에만이요. 단순히 작고 예쁜 것을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귀여운 것’은 만들지 않아요. 석사 과정 중에 촉각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수공예품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방식의 제작 방법을 모두 시도해서 수많은 서체 모듈과 그리드를 만들었죠. 이렇게 2년을 보내는 동안 스케치북도 점점 쌓여 갔어요. 이것이 바로 CMYK 자수 기법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 배경입니다. 저는 색깔을 촉각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들고 싶었고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인쇄 프로세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제가 가지고 있는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지식을 수공예에 접목시키게 된 겁니다.
요즘 열중하고 있는 작품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요즘은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책 디자이너로서 일하기도 하지만 촉각 스티치 서체(tactile stitched lettering) 만드는 일도 하고 있어요. 둘 다 저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제가 좋아하는 일들입니다. 얼핏 보면 서로 다른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많이 다르지도 않답니다. 책을 디자인하는 일과 서체를 제작하는 일 둘 다 타이포그래피 기법이 필요하고 디테일을 꼼꼼히 살펴야 하며 많은 인내심을 요하기 때문이에요. 얼마 전에는 로렌스 킹 출판사(Laurence King Publishing)의 패션 서적 디자인 작업을 마쳤습니다. 최근에는 개인 프로젝트인 실험 스티치 모노그램 제작 작업을 진행하고 있죠.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인데요, 오래되고 전통적인 것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입니다.
디자인 프로세스와 작업 스타일은 어떠세요?
제 디자인 프로세스라고 하면 촉각적 디테일을 강조하는 콘셉트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콘셉트를 잡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저는 항상 아이디어와 작업 방향을 종이에 적는 것부터 시작하죠. 그러고 나서 컴퓨터로 디자인해요. 첫 번째 스케치와 마지막 작품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수정본이 존재합니다. 고객들은 작품 수정을 요청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슬프게도 제가 완벽주의자라서 저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수정을 거듭하기 때문이에요.
평소에 가장 좋아하는 일은?
지금은 런던에 살면서 일하고 있지만 시간이 나면 제 고향인 탈린의 바닷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집이 해변에서 가까워서 바다를 보러 자주 가는데요, 사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저는 그곳이 좋습니다. 탁 트인 풍경과 도시의 공허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에요. 탈린은 작고 추우며 바람도 많이 불고 비가 자주 내리는 곳입니다. 어렸을 때는 이런 모든 것을 정말 싫어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사랑하게 되었어요. 눈이 내려도 이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요?
석사 과정 중에 작업했던 인쇄물(Printed Matter)이라는 작품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 작품을 만들면서 그래픽 디자인에 수공예 기법을 접목하는 최초의 시도를 하게 되었거든요. 제가 5년 전에 졸업했는데요, 5년 전에 만든 이 작품이 이후에 제가 만든 모든 작품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디자이너로 살면서 영향을 받은 멘토가 있었나요?
에스토니아 예술학교(Estonian Academy of Art)와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을 다니면서 훌륭하고 영향력 있는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어요. 한 분의 이름만 거론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제가 석사 과정 중에 지도를 받은 세인트 마틴스의 선생님들이 지금의 제 작품과 디자이너로서의 제 인생에 주요한 영향을 주신 것 같아요. 회사에서 일하면서 10년을 보낸 후에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추상적인 개념으로 실험하고 개인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일들이 쉽지 않았어요. 손으로 만든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시작하면서 ‘머리에 섬광’이 스쳤어요. 그제야 저만의 언어와 디자인 방법을 찾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에서 얻는지 궁금합니다.
작품의 진정성과 독창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다른 디자이너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으려 하지 않아요. 영감이란 주제를 정하고 조사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소재로부터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모든 것은 작업하는 일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타이포그래피에 열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타이포그래피는 소통의 도구이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재미있는 형식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활자를 아주 좋아하고요, 실험적인 활자 형태를 고안하는 일이 큰 즐거움입니다.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제 작품에서는 내용과 형식이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매체가 바로 메시지 자체가 됩니다. 작품은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미니멀리즘을 표방할 수도 있고 표현주의를 표방할 수도 있겠지요. 작은 삽화가 되거나 삼차원 삽화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언제나 생각을 공유하고 소통합니다.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어떤 것인가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일, 취미, 열정이 삼위일체가 되어 저 자신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직장에서 일과를 마친 후에 사생활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가 삶이 되는 그러한 인생을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