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인포그래픽연구소(203 Infographics Lab, 이하 203)는 이름 그대로다. 인포그래픽을 연구한다. 그리고 생산한다. 이 일은 어느덧 세계성을 갖췄다. 스페인 ‘말로피에 국제 인포그래픽스 어워드(Malofiej International Infographic Awards, 이하 말로피에)’, 싱가폴 ‘AMA(Asian Media Award)’, 독일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Red Dot Design Award, 이하 레드닷)’ 등 여러 국제상을 수상했다. 특히 203은 2018년부터 내리 3년간 말로피에를 수상했는데, 수상 자체가 국내 최초이기도 하거니와 한국의 인포그래픽 분야에서 회자될 만한 이슈다. 203 장성환 대표는 “유의미한 생산의 성립 조건은 축적”이라고 단언한다. “축적되지 않는 생산은 휘발될 뿐”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203의 시작은 2003년부터였으니(‘디자인 스튜디오 203’으로 시작해 2012년 지금의 사명으로 변경했다), 족히 20년 가까운 데이터들이 생산-축적돼 있을 터다. 장성환은 이 데이터들을 pile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file로 활용한다. 그는 “오직 데이터에 근거해서만 움직인다” 주의다. 그 결과물들이 203의 인포그래픽일 것이고, 수차례의 해외 수상 실적일 것이다. 이제는 ‘디자이너’보다 ‘인포그래픽 전문가’로 더 자주 소개되는 장성환을 만나 그의 인포그래픽론을 들어봤다.
한때 infographic은 ‘정보 디자인’으로 번역되곤 했습니다. 이 풀이가 인포그래픽의 정의인 것처럼 소개되는 사례도 왕왕 있었고요. 지금은 독음대로 ‘인포그래픽’이라 표기하는 게 일반적인 듯합니다. 장성환의 ‘infographic is’는 어떻습니까.
‘정보 디자인’은 광의의 개념이죠. 인포그래픽뿐 아니라 데이터 시각화까지 포함하니까요. 저는 ‘구조화된 정보의 인사이트를 시각화하기’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건축가 출신의 디자이너 리처드 솔 워먼(Richard Saul Wurman)은 인포그래픽을 ‘인포메이션 아키텍처(information architecture)’라 정의하기도 해요. 그만큼 각자의 전문 영역에 따라 인포그래픽에 대한 시각과 관점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정보를 구조화한다, 그로써 도출해낸 인사이트를 시각화한다’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죠.
정보 디자인은 인포그래픽뿐 아니라 데이터 시각화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아무래도 무식한 질문을 하나 드려야겠습니다. 인포그래픽이 곧 데이터 시각화 아닙니까···?
인포그래픽은 데이터 시각화가 아니라 정보 시각화입니다. 그래서 데이터그래픽이 아니라 인포그래픽인 거죠. ‘인포메이션’과 ‘데이터’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82287651234라는 숫자가 있습니다. 얼핏 봐서는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죠. 모호하잖아요. 이 상태가 데이터라고 할 수 있어요.
데이터들이 밀리언(million), 질리언(zillion) 단위로 축적되면 빅데이터가 되겠죠. 자, 숫자들의 나열에 플러스[+]와 하이픈[-]을 추가해봅시다. +82 2-8765-1234. 전화번호의 꼴을 갖추게 된 셈인데, 이 상태가 바로 인포메이션입니다. 즉, 데이터를 구조화해야만 비로소 인포메이션이 되는 겁니다.
전화번호 얘기를 계속 해보자면, ‘전국 냉면 맛집’ 전화번호 DB를 구축했다고 칩시다. 이걸 어떻게 구조화하고 정보로 만들 수 있을까요. 즉, 서 말의 구슬을 어떻게 꿰어야 보배로 만들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냉면 육수 유형에 따라 구조화를 해볼 수 있겠죠. 소 육수를 사용하는 냉면집 전화번호, 동치미 육수를 쓰는 냉면집 전화번호, 이런 식으로요. 전국 냉면 맛집 전화번호 데이터를 ‘육수 취향별 냉면 맛집 연락처 정보’로 바꾼 겁니다. 이 정보를 그래픽으로 만들면 인포그래픽이 되는 것이죠.
데이터를 정제하고 구조화한다, 그렇게 인포메이션으로 만든다, 라는 것이 이른바 인포그래픽이군요.
데이터를 정제·구조화해 만든 인포메이션에서 인사이트를 도출해낸다, 그리고 그것을 시각화한다, 라는 설명이 더 명확하겠네요.
구조화가 필요한 데이터 수집하기, 그 데이터들을 실효적 정보로 구조화하기가 관건일 것 같습니다. 요컨대 인포그래픽 디자이너는 반드시 분석력·기획력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 되겠네요.
몇 마디 덧붙이면, 디자이너들이 분석 및 기획 단계에 참여‘해야’ 하고 참여‘돼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제가 구호처럼 사용하는 표현이 있어요. ‘함께 달리기’ 그리고 ‘디자인 넥스트’.
장성환의 인포그래픽 커리어는 1992년부터 시작됐다. 첫 직장인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연합뉴스로 옮긴 시점이다. 그곳에서 그는 국내 최초의 ‘그래픽 뉴스팀’에 몸담았다. 당시 AP·AFP·로이터 같은 해외 통신사들은 그래픽 뉴스를 적극 활용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 언론 환경에서 ‘뉴스를 (글이 아닌) 그래픽으로 보도한다’는 개념은 낯선 것이었다.
장성환이 창설에 관여한 연합뉴스 그래픽 뉴스팀은 외신의 그래픽 뉴스를 한글화하는 작업과 함께, 그에 걸맞게 국내 소식을 그래픽 뉴스로 자체 제작해 보도했다. 장성환은 취재기자·사진기자와 함께 뉴스 아이템을 논의했고, 간헐적으로 기사 작성도 했다. 그의 바이라인은 그래픽 저널리스트(Graphic Journalist)였다.
이후 장성환은 동아일보사로 옮긴 뒤, 여러 종류의 잡지를 거쳐 『과학동아』 아트디렉터가 됐다. 당시 그는 다양한 과학 인포그래픽의 실험 및 시도를 지속했고, 2003년 203을 설립해 지금껏 이끌어 오는 중이다. 몇 해 뒤면 20주년이다. 이 지점에서 장성환은 ‘함께 달리기’와 ‘디자인 넥스트’를 슬로건 삼고 있는 것이다.
디자이너들이 기획 단계에 참여‘하기’, 라는 건 능동태니까 이해가 됩니다. 참여‘되기’ 쪽은 아무래도 ‘바이훔(by whom)’에 관한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요.
2018년도에 ‘SND(The Society for News Design) Hong Kong’이라는 국제 인포그래픽 서밋에 스피커로 참여했었습니다. 그때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어요. 『월스트리트 저널』 아시아 지국의 작업 프로세스를 소개한 프레젠테이션이었습니다. 뉴스 콘텐츠 제작의 초기 단계, 그러니까 브레인 스토밍 단계에 다섯 팀이 참여하더군요. 취재기자, 편집기자, 편집장, 그래픽 디렉터, 비디오 디렉터가 모이는 겁니다. 이들 모두가 아이디어 스케치부터 함께한다는 뜻이에요. 제가 ‘함께 달리기’라 부르는 작업 형태입니다.
제 경험상 우리나라의 뉴스 콘텐츠 생산 공정은 ‘이어 달리기’에 가깝습니다. 기자가 기사를 작성한다, 편집자가 교열과 레이아웃을 한다, 디자이너에게 그래픽 주문이 넘어온다, ··· 대개 이런 식이랄까요. 디자이너 입장에선 해당 콘텐츠의 맥락도 기획 의도도 공유받지 못한 채로 그래픽‘만’ 하게 되는 겁니다.
언론사만의 사정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프로젝트의 초기 구상 단계부터 디자인팀이 포함되는 경우는 드무니까요. ‘Context, Insight first / Design next’의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함께 달리기’가 필요합니다. 매우 절실히. 그러려면 생산 시스템이 변해야겠죠. 언론사의 중심은 여전히 취재 부서이니까 그쪽에서 능동적으로 디자인팀이 참여할 상황을 열어줘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참여‘되기’의 의미예요.
‘디자이너 열외’라 부를 만한 정황을 저도 몇 번인가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일군의 기획자 집단이 뭔가를 짜내고 제작해낸 다음, 그걸 디자이너에게 전달하는 식이죠. 컨베이어벨트의 가장 끝에 디자이너들이 서 있는 모양새다, 라고 말하면 너무 노골적이려나요? 그 포지션에서는 대개 이런 주문들이 들어옵니다. 예쁘게 해주세요, 감각적으로 디자인해주세요, 확 눈에 띄게 만져주세요, ···. 디자인이라는 직능이 그저 꾸미기, 단장하기, 메이크업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는 방증일 겁니다.
생산 라인의 앞단으로 이동하려는 디자이너들의 움직임도 분명 존재해요. 다만 ‘안티 메이크업 아티스트’ 의식이 과하다고 할까, 디자이너-기획자로서의 에고(ego)를 지나치게 앞세운다고 할까, 이번에는 거꾸로 디자이너가 다른 직군의 인력들을 패싱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총체성을 띤 협업의 산물이기보다, 디자이너 개인만의 포트폴리오 같은 결과물이 나와버리는 겁니다.
인포그래픽 영역에 한해서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우려하는 건 이런 겁니다. 인포그래픽을 제대로 교육받은 적도 없고, 스스로 학습하지도 않은 입장에서 ‘이것이 인포그래픽이다’ 하고 설익은 결론을 내버리는 상황들 말입니다.
픽토그램만 쓰면 다 인포그래픽인 줄 아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인포그래픽 생산자, 즉 디자이너 쪽과 소비자 쪽 모두 마찬가지예요. 호두 알맹이가 안 들어간 호두 모양 과자를 서로 주고받는 셈이죠. 생산자든 소비자든 ‘어? 뭐야, 인포그래픽이란 게 별거 아니었네?’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굉장히 우려스럽습니다. 인포그래픽이 ‘짝퉁 호두 모양 과자’로 치부될까 봐서요.
그렇다고 인포그래픽 관련 학과·전공·증명서가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뭔가 객관적인 공증 같은 게 필요하지 않나 싶었고, 해외 공모전에 지속적으로 응모를 하게 된 겁니다. 일반적인 디자인 공모전이 아니라 미디어와 인포그래픽 관련 공모전에 응모하고 인정을 받는 것이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일종의 존재 증명 같은 건가요?
일정 부분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만, 그 외의 의미도 큽니다. 과연 내가, 203이 하고 있는 작업들이 제대로 방향을 잡고 가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어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우리의 작업은 어떤 수준일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뉴욕 타임즈』, 『가디언』,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 해외 유력 미디어들이 출품하고 상을 독차지하는 말로피에 같은 공모전에 응모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레드닷은 많이들 알아도, 미디어 및 인포그래픽 관련 어워드는 대체로 잘 모르더군요.(웃음) 사실, 이쪽 분야의 전문 회사로서는 레드닷[올해 ‘브랜드 & 커뮤니케이션’ 부문 본상(Winner) 수상)]보다 말로피에 3년 연속 수상이 더 의미 있고 감사한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아직은 척박하기만 한 한국의 상황에서도 이런 성과를 이뤄낼 수 있다는 걸 국내 미디어와 업계에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되면 ‘진짜 호두과자’와 ‘짝퉁 호두 모양 과자’를 변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3의 인포그래픽 전문성을 증명하는 일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국내에 인포그래픽 품질에 대한 상향 평준화된 인식 체계를 구축하는 일 또한 시급하다고 봅니다. 203이 그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 저 스스로는 퍽 고무적이고요.
203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2009년 창간한 홍대앞 동네잡지(local magazine) 『스트리트 H』(발행인 장성환, 편집장 정지연)다. 이때 ‘홍대앞’은 ‘홍대 앞’이 아니다. 서교동, 연남동, 망원동, 합정동 등 서울 마포구 일원을 통칭하는 일종의 대명사다.
『스트리트 H』는 203의 아이덴티티, 즉 인포그래픽 전문성을 대표하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과학, 디자인, 문학, 의식주, 홍대앞 풍경 등 다채로운 소재를 다룬 인포그래픽 콘텐츠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스트리트 H』의 인포그래픽은 수차례 국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말로피에’ 수상은 의미가 크다.
말로피에는 미국 SND(The Society for News Design)의 스페인어권 지부인 SNDE(SND Español)가 주최하는 연례 시상식 겸 서밋이다. 아르헨티나의 지도 제작자이자 인포그래픽의 혁신가로 불리는 알레한드로 말로피에(Alejandro Malofiej)의 업적을 기리고자 1993년 제정됐다.
말로피에는 전 세계 언론 매체에 실제 보도된 그래픽 뉴스들을 대상으로 한 수상 제도다. 그러니까, 심사 대상이 언론사 등 미디어다. 그래서 말로피에는 인포그래픽의 퓰리처상(the Pulitzers for infographics)으로도 불린다. 『가디언즈』, 『내셔널 지오그래픽』, 『뉴욕 타임즈』,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 『사이언스』, 『워싱턴 포스트』 같은 국제적 미디어들이 말로피에를 수상한 바 있다. 203은 『스트리트 H』의 인포그래픽 콘텐츠로 2018·2019·2020 3년 연속 동상을 받았다. 국내 미디어로서는 처음이다.
말로피에 수상과 관련해 궁금한 게 있습니다. 『스트리트 H』 인포그래픽 시리즈를 원어판(한글판)으로 출품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데도 상을 받았다는 건, 국제 무대에서 ‘정보 전달’에 성공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저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텍스트 해석이 안 될 텐데 어떻게 정보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거죠.
인포그래픽은 텍스트 의존도를 최소화시킨 정보 전달 수단, 이라고 설명하고 싶네요. 인포그래픽이란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말로피에 출품작의 경우, 제목과 중제만 영어고 나머지 텍스트는 모두 한글입니다. 그럼에도 수상작으로 뽑혔어요. 텍스트 독해가 안 되더라도 인포그래픽만으로 충분히 심사위원들을 이해시켰다는 뜻입니다. 이런 게 인포그래픽의 장점이겠죠.
말로피에의 심사위원단은 매해 새롭게 조직됩니다. 작년에 심사했던 사람이 올해 또 심사하는 프로세스가 아니에요. 3년 연속 말로피에를 수상했다는 건, 매년 다른 평가자들에게 선택됐다는 의미입니다. 203의 인포그래픽이 일회성의 행운으로 수상한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정상 작동한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해요.
‘인포그래픽 언어’라는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언어로 소통이 된다는 거네요.
‘인포그래픽 화법’이 좀더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화법, 즉 내러티브 스킬(narrative skill)은 인포그래픽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예요. 인포그래픽 작업은 ‘정보를 구조화하고 내러티브를 도출해 시각화하는 것’입니다.
단, 이 내러티브는 텍스트보다 시각적 그래픽 어휘를 중심으로 전달됩니다. 그래서 203에서는 텍스트 정보와 요소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은·는·이·가’ 같은 조사, 쉼표, 마침표조차 최대한 생략하려고 애씁니다.
여담이지만, 제가 1993년에 썼던 논문 제목이 무려 「비문자적 의미전달체계의 지시, 조작성 기호에 관한 연구: 컴퓨터의 아이콘을 중심으로」예요. 분서갱유라도 해버리고 싶은데(웃음), 지금 다시 보니 제 방향성과 맞닿아 있어서 신기할 따름입니다.
『스트리트 H』 인포그래픽 포스터 시리즈가 60여 종 이상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트리트 H』 자체도 폐간/복간 없이 10년 이상 간행 중이고요. 권호로 따지면 135호가 넘어갑니다. 이거 다 데이터 아닙니까? 앞으로 어떻게 구조화할 작정이세요?(웃음)
맞아요. 다 데이터입니다. 특히나 인포그래픽 포스터는 종 수가 늘수록 자연히 판매 데이터가 형성됩니다. 203 인턴 직원들의 업무 중 하나가, 매일매일의 주문을 데이터화하고 그중 특이한 건들은 별도의 DB로 구축하는 겁니다.
동일 주제의 포스터가 대량 주문됐다면, 판매 시기와 해당 주제 사이의 연관 관계를 유추하고, 구매 고객이 개인인지 단체인지 공공기관인지 등등을 다 기록해놓습니다. 이렇게 축적된 데이터들을 참고해서 신규 포스터의 콘셉트를 잡거나 판매 전략을 세우는 거예요. 무턱대고 감으로 하는 판단은 사절입니다. 203은 오직 데이터를 근거로 움직입니다.
솔직히, 현재 203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합니다. 하고 싶은 걸 ‘잘’ 할 수 있게 해줄 시스템, 노하우, 데이터를 착실히 쌓아왔으니까요. 요즘 와서는 투자 유치를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대규모 인포그래픽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 싶어서요. 이를테면, 서울 5대 고궁들의 역사와 관람 정보 등등을 인포그래픽으로 표현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가칭 ‘서울의 궁궐 시리즈’.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상당히 유의미한 프로젝트가 될 법한데, 어떻습니까.
부디 좋은 투자자를 만나셨으면 좋겠군요.(웃음) 203 디자이너들은 상당히 전방위적으로 움직여야겠습니다. 데이터 분석부터 인사이트 도출, 방향성 정립까지 척척 해내려면.
『스트리트 H』 인포그래픽 포스터는 온전히 203 디자이너들의 작품입니다. 주제 선정부터 기획, 구성, 텍스트 작성까지 전적으로 디자이너들이 담당해요. 편집팀은 교정·교열만 함께 작업합니다. 일단 저부터가 ‘디자이너는 콘텐츠 생산자다’라고 믿는 입장이고, 이 기조 하에 203 스태프들을 육성시켜왔습니다.
아까 몇 번인가 얘기한 ‘함께 달리기’, ‘디자인 넥스트’는 사실 203이 십수 년간 실험하고 구축해온 프로세스예요. 디자이너가 중심이 된 콘텐츠 기업, 혹은 미디어 기업. 이것이 203의 기초적인 형질입니다. 203과 디자인 스태프들은 콘텐츠를 스스로 생산해낼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시스템을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해놓았어요.
현재 클라이언트 중심의 디자인업은 반드시 변해야 합니다. 디자인업이 콘텐츠를 자체 생산하고 상품화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야만 진정 ‘축적되는 생산’이 지속 가능해질 테니까요. 저는 이런 변화가 디자이너 개인과 디자인업 양쪽에 말 그대로 ‘생산적’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눈사람 만들 때, 다 쓴 연탄을 눈밭에 굴리기도 하잖습니까. 처음엔 아무리 굴려도 별 변화가 없어요. 그러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가속적으로 눈덩이가 불어납니다. 눈사람 내부에 심처럼 박힌 연탄이 일종의 코어(core) 아닐까 합니다. 그런 코어 내지는 시스템이 단단히 내재돼 있다면, 뭔가를 오랫동안 지속하는 행위는 승산이 있습니다. 눈사람에 준하는 어떤 결정체가 어느 순간 구현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