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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 읽자이너 #10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

    미술가·이론가·비평가 홍명섭의 ‘예술적’ 강의록


    글. 임재훈

    발행일. 2021년 12월 21일

    123 읽자이너 #10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

    한 달 한 권
    1 제목 | 2 차례 | 3 서문
    딱 세 가지만 속성 소개

    일단은 1, 2, 3만 읽어보는 디자이너
    “ 123 읽자이너 ”

     #10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 

    한 달 한 권, 디자이너들이 일독하면 좋을 디자인·미술·인문 분야의 양서를 소개한다. 『타이포그래피 서울』 에디터가 직접 구입하여 읽은 책들이 그 대상이다. 서론―본론―결론 꼴을 갖춘 서평의 형식이 아니라, 1제목―2차례―3서문 이렇게 딱 세 가지만 다룬다. 그래서 코너명이 「123 읽자이너」다. 이미 이달의 책으로 『스트리트 H』 영인본을 소개했지만, 연말이라는 시의성을 고려하여 ‘한 해를 돌아보며 읽기 좋은 책’ 한 권을 더 가져와본다.

    코로나19 시국은 ‘자유’라는 키워드를 곱씹어보게 한다. 지금처럼 해넘이를 앞둔 12월에는 특히 ‘나는 올해 얼마나 자유로웠나’, ‘나는 올해 얼마나 자유롭지 못했나’라는 질문도 하게 만든다. 한 해를 ‘자유로웠다 / 자유롭지 못했다’라는 이분법으로 돌아보아도 그리 어색하지 않은 까닭은, 우리가 그만큼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 사적 모임 인원 제한, 방역 지침 준수 등 ‘제약’이 일상화된 시절을 우리 모두는 통과하는 중이다. 새해에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 얼마나 자유롭지 못할까, … 가늠해보는 연말 연시.

    이런 상태가 마치 ‘거미’ 같다고 『타이포그래피 서울』 에디터는 생각했다. 거미는 사냥을 하러 쏘다니지 못한다. 거미줄이라는 제한된 프레임 안에서 먹잇감이 사냥‘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거미의 포식은 랜덤이다. 뭐가 걸려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스스로 먹잇감을 선택하는 자유가 없다. 먹고/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못 먹는다/한다는 점에서, 왠지 거미는 요즘의 우리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송년 모임들이 줄줄이 취소되는 와중에 거미를 떠올리다가 책 한 권을 재독했다. 거미의 부자유를 퍽 근사하게 해석한 인문학 도서다. 설치미술가 홍명섭 선생의 2017년 저서로, 갑갑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책으로 손색이 없으리라 싶다. 많은 생활인들처럼 디자이너들 또한 코로나19 이후 여러 제약들을 하나씩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내고 있다. 『타이포그래피 서울』 또한 자체적인 방역 지침에 따라 2년째 비대면 인터뷰를 지속 중이다. 외근을 박탈당한(?) 에디터는 그렇게 스스로를 거미와 동일시하며 이 책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을 다시 펼쳐 든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거미의 신세에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었는가. 어떻게 거미의 부자유를 창조적인 상태로 격상하였는가. 답은 아래의 본문에 얕게, 그리고 책 속에 깊게 담겨 있다.

    ⓒ typography seoul

    1  제목

    열 번째 책은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이다. 설치미술가이자 미술이론가, 미술비평가이기도 한 홍명섭이 자신의 미술대학 실기 강의 내용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현대철학―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들뢰즈 같은 현대철학자들의 이론이 본문에 자주 등장한다―을 프리즘 삼아 예술―미술가가 쓴 미술서로 보아도 무방하겠으나, 문학·음악·연극·영화 등 ‘예술 일반’을 다룬 인문학 서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좀더 이 책의 지적 스케일(!)에 부합할 것이다―이라는 대상의 숨겨진 빛깔을 추출해내려 한다.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이 검출하려 시도하는 빛의 성질은 이렇다. 단지 예술을 창작/감상하는 데 요구되는 사고의 지평을 밝히는 빛일 뿐만 아니라, 독자 개인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까지 드리워질 만한 빛이다.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은 제목에 걸맞게 현대철학 이론과 용어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래서 일반 독자들의 진입 장벽이 제법 높아 보이기도 한다. 이론서 내지는 비평서의 외피를 지닌 책이라,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는 기우다. 현대철학 이론 풀이는 상당히 친절하고, 예술(미술)과 철학을 접목하는 전개 흐름은 완만하며 어렵지 않게 독해된다.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이라는 아카데믹한 제목을 ‘현대철학의 예술적 에세이’ 정도로 순화하여 받아들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문장들(모두 구어체 문장들)은 막힘 없이 읽히고, 저자의 주장과 설명은 온기를 머금고 있다.

    2 차례

    머리말 ― 예술적 사유의 미시정치학, 또는 사용의 정치학

    프롤로그 1 ― 기생 선언

    프롤로그 2 ― ‘작가-되기’와 ‘관객-되기’의 등가성

    1강. 착용 가능한 철학: 웨어러블 필로소피
    ― 필로소피컬 스킨, 또는 ‘사이-보그’ 스킨
    ― ‘책상-이데아’보다 먼저 만들어진 ‘책상-현상’
    ― 창의적 재/매개: 빌리기와 훔치기
    ― 사기

    2강. 거꾸로 가는 인과론의 시간
    ― 사실을 생산하는 감응력
    ― 창작 개념의 외부 의존적 변양
    ― 새롭게 창조되는 선구자들의 시간
    ― 창조성을 대신하는 ‘태도’
    ― 패러다임 시프트

    3강. 비자발적 감수성, 비자발적 사유, 그리고 우발성
    ― 거미처럼 생각하라

    4강. 약도 되고 독도 된다
    ― 내부를 간섭하는 외부, 에르곤/파레르곤
    ― 나는 감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 표현과 ‘의도’

    5강. 나는 내 바깥이다
    ― 나는 나의 바깥에서 만들어진다

    6강.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사물: 그림자 연기론
    ― 그림자가 사물을 만드는 것도 허락하자!
    ― 예술적 사유 / 철학적 사유
    ― 왜 미술대학에 들어왔는가?
    ― 관객(독자)은 시달림을 받아야 한다!

    7강.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 의미 차원 / 존재 차원
    ― 예술적 체험이란 작가와 관객의 상호 의존적 흔들림이다
    ― 본질론과 구성론

    8강. 사용과 효과
    ― 인지 과정은 삶의 효과 / 사용의 효과
    ― 다시 생각하는 감상: 구경에서 작업 생성 조건으로!

    9강. 시선 중심의 ‘벽’과 수평적 ‘바닥’ 인식
    ― 직립(수직) 화면과 좌식(수평) 화면
    ― 물질과 의미

    10강. 타자의 발견과 재현의 문제
    ― 사과의 타자, 타자의 사과

    11강. 시각과 언어는 존재 형식
    ― 시선이 왜 문제인가?: 시선은 지식/권력이다
    ― 너 때문이야!
    ― 사건으로 번지는 이야기로: 언어와 소통

    12강. 의도와 표현
    ― 표현이 이끄는 의도
    ― 표현을 이끄는 (비자발적) 타자성
    ― 표현의 발생
    ― 표현과 소통, 비자발적 표현의 중층성
    ― 대화와 소통: 소통 불/가능성, 표현 불/가능성

    13강. 의미의 발생과 사건
    ― 의미는 주어지고 담기는 것인가, 구성되고 생성되는 것인가?
    ― 의미의 발생과 ‘사건’

    14강. 쓸모와의 불화, 소수자-되기
    ― 소수자-되기로서의 현대미술
    ― 예술, 불화의 정치

    이미 소개했듯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은 저자 홍명섭의 미술대학 실기 강의를 엮은 책이다. 총 14강으로 구성된 차례의 면면을 보고 있으면, 강의실에서 저러한 수업을 들었을 학생들이 부러워지기도 한다.(일면 진도 따라잡느라 진땀 좀 뺐겠다는 예상도 조심스레 해보게 된다.) 역시나 제목과 어울리는 ‘철학적’ 차례명들로 가득하다. 1강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지적 위압감마저 느낄 만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본문의 문장들은 차례명들만큼 엄숙하지 않다. 빳빳한 정장 차림의 차례명들이 경호하고 있는 건, 캐주얼 복장을 한 수더분한 문장들의 세계다. ‘예술 세계’이면서 ‘일상 세계’라 이를 만한, 그런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아래 인용문은 『타이포그래피 서울』 에디터가 이 책에서 가장 애호하는 구절로, 마지막 두 문장은 과거 어느 인터뷰에서도 빌렸던 적이 있다.

    [전략] 그러나 거미 팔자란 스스로 친 거미줄에 갇힌 형국이지만, 쳐놓은 거미줄에 걸려드는 것만 가지고도 자기 먹이가 ‘되게-한다’는 긍정의 힘을 가지고 있지요. 아니라면, 골라 먹을 수 없는 팔자, 과연 딱해 보이기만 하나요? 

    [중략] 거미의 경우는 아무런 ‘자발적 선택’을 할 수 없어요. 다시 말하면, 어떤 ‘선택’의 조건도 여지도 허락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대단한 압박과 구속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어떤가요? 얼핏 보기에 거미의 조건이 훨씬 불행해 보이죠? 그러나 여기에 큰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거미는 거미줄이라는 이미 (비자발적으로) 제한된 범위가 불러일으킬, 자발적 선택이라는 착각의 씨가 될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지 않지요. 말하자면, 자신의 제한적 조건에 선택이라는 머리를 굴리지도 않고, 굴릴 필요도 없이 모조리 먹이가 되게-하는/되어야만 하는 ‘몸의 능력’ 자체가 자유라는 역설적 사실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놀라운 반전입니까? 

    [중략] 오직 ‘우발적’으로 걸려든 먹이만을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하는, 선택지가 전혀 허용이 되지 않는 (자발성이 차단된) 신세. 그러나/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미는 모든 우발성(침입)을 받아들이는 데 필사적일 수밖에 없지요.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 86~97쪽, 3강 수록 글 「거미처럼 생각하라」 중

    3  서문

    저자 홍명섭은 서문, 즉 머리말을 통해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의 성격―누구에게 어떻게 읽히기 바라는지―을 소개한다. 이 책의 바탕이 된 자신의 강의를 “나이나 하는 일에 상관없이 언제나 예술과 철학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정의하고, “도입부가 전체를 아우르는 모습으로 출발하고 있기에, 굳이 처음부터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 건너뛰면서 읽어나가다가 다시 돌아와도 좋을 것이다.”라는 독서법도 추천하고 있다. 저자가 타 서적(『프루스트와 기호들』, 질 들뢰즈,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에서 재인용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어록이야말로 가장 적절히 축약된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 소개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또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다. 예술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세계, 즉 자신의 세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증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 6쪽, 머리말 중

    ⓒ typography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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