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활자 디자이너 이새봄입니다. <새봄의 흐름> 전의 주인공인 ‘새봄체’를 만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2013년 7월 3일 수요일, 찬란한 여름의 시작과 함께 <새봄의 흐름> 전이 윤디자인연구소 갤러리뚱에서 2주간 열립니다. 여름과 함께 온 ‘새봄’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새봄은 저의 이름이기도 하고, 제가 만든 활자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새봄, 새로운 봄(spring)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새로 보다’라는 말로 풀어쓸 수도 있지요. 새로 보다, 새롭게 보다. 무엇을 새로 볼까요? 활자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활자를 대할 때 이전의 눈으로 보지 말고 새롭게 바라보자는 저의 생각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중의적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새봄체’로 지었습니다.
<새봄의 흐름> 전은 방일영 문화재단의 한글글꼴창작지원금 제도에 의해 네 번째로 개발된 활자인 새봄체를 발표하는 자리이자, 새봄체를 만들어왔던 2년간의 과정을 공유하고자 하는 의도로 기획된 전시입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리고 앞으로 세 번에 걸쳐 연재될 글을 통해 ‘새봄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명의 활자 디자이너가 하나의 활자를 디자인하기까지의 흐름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보통 활자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글을 쓰기 위한 도구 또는 디자인하기 위한 재료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저는 이번 전시에서 활자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활자가 원래부터 당연히 있었던 무언가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깊은 고민과 생각의 씨름을 통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기회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비록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지만, 저의 글을 통해 활자에 관심을 갖고 한글 디자이너가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재를 시작하겠습니다! ‘’
새봄체의 시작, 한글글꼴창작지원금제도
새봄체는 2011년 방일영 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한글글꼴창작지원금 제도의 네 번째 지원 글꼴로 선정되어 개발된 활자입니다. 이 제도는 한글 글꼴의 발전을 위하여 본문용 활자를 연구하며 개발할 작가를 선정하고 글꼴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주며, 개발된 활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권리도 가지지 않고 전적으로 작가에게 일임하는 제도입니다. 한글꼴 디자인 분야에서, 아니 디자인 분야에서 이런 공모전은 또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2010년 겨울, 4회 수혜자를 공모하는 반가운 소식이 떴었습니다. 활자 디자이너라면 흠모할 만한 공모전이기에 그 당시 만들고 있던 본문용 세벌식 명조체를 콘셉트로 하여 지원하였지요. 그러나 당시 저를 비롯하여 지원자들의 제안 내용이 이 사업의 취지인 ‘본문용 한글 글꼴 개발 지원’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수혜 대상자를 뽑지 않았으며, 한 달 뒤에 2차 제안을 받겠다는 결과를 통보받았습니다. 이 일은 전례 없이 일어난 일이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달 뒤에 다시 한 번 지원하였고, 그때 제안하였던 콘셉트가 ‘가로쓰기 본문용 붓글씨체’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실화되어 나온 결과물이 새봄체인 것입니다.
새봄체의 콘셉트가 나오기까지
흐름 1. 최정호 선생님과 명조체, 그리고 겨레정음체
누군가를 동경하면 그 사람을 닮고 싶고, 뛰어넘고 싶어 하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최정호 선생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명조체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명조체를 뛰어넘는 활자를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다니던 폰트 회사에서 명조체를 만들 기회가 생겼고 기존의 명조체와 어떻게 다르게 만들어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한글꼴의 역사 중에서 현 명조체의 원형이라고 평가받는 <오륜행실도>(<1700년대 이후의 ‘한글 본문용 활자체 구조’의 변천과정>, 김진평 선생님의 글 참고. 타이포그래피서울 연재분)에서 특징을 뽑아내어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역사적 원형을 재해석하여 디자인하는 매력에 빠지게 되었고 다음에는 조금 더 부드러운 형태의 명조체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흐름 2. 한글의 원형과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
대학원 수업 시간에 한글의 원형과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생각한 것이 바로 ‘붓’이었습니다. 요즘은 편의성에 의해 붓이 아닌 연필이나 볼펜처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다른 필기도구를 사용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주된 필기도구가 붓이었습니다. 옛 문인들은 시·서·화 삼절(詩書畫 三絶)이라 해서 글과 글씨, 그림 이 세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으뜸으로 치기도 했지요. 이렇게 우리 선조는 붓으로 쓴 글과 글씨, 그림을 통하여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한글 창제 당시의 자형은 현재의 고딕체처럼 직선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었는데, 이는 붓글씨로 쓰기에 어려운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손글씨로 쓰이면서 점차 붓의 특성에 맞게 자형에 곡선적인 형태가 부여되었습니다. 이는 도구로 인하여 한글 자형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 후, 한글은 궁을 중심으로 오랜 기간을 거쳐 필사체화 되면서 정보전달뿐만 아니라 조형상의 아름다움까지 추구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의 큰 흐름으로 양식화된 형태를 띠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궁체라 부릅니다. 그러니 궁체는 한글이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나타난 자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흐름 3. 궁서체, 명조체, 그리고 이들의 원형인 궁체
그와 같은 생각이 궁체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 최정호 선생님의 궁서체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궁서체뿐만 아니라 명조체도 궁체라는 동일한 원형으로 만들어진 활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최정호라는 작가가 하나의 원형을 두고 제작 의도나 목적에 따라 해석을 달리함으로써 결과물이 이렇게 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궁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 해봤습니다. 붓글씨체를 활자로 만들 때에는 보통 원도를 스캔하고 그대로 아웃라인을 딴 후 선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만들게 되는데, 그 방식이 아니라 붓글씨체의 특징을 뽑아내어 활자를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이 생각의 흐름은 ‘궁체를 원형으로 하되 명조체처럼 본문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현대화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집약되었고 그것이 ‘가로쓰기 본문용 붓글씨체’라는 콘셉트로 구체화하였습니다.
이어서 다음 주에는 이런 콘셉트가 어떤 방법으로 활자로 구체화하였는지, 그 제작 과정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