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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캘리그래피의 연금술사, 강병인

    “글씨를 쓰다가 어느 순간 저절로 스토리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캘리그래피엔 우연성이 존재하거든요.”


    인터뷰. 김미정

    발행일. 2012년 07월 19일

    한글 캘리그래피의 연금술사, 강병인

    지금까지의 비빔밥은 잊어라. ‘어떤 재료든 함께 넣고 골고루 비비기만 하면 누구나 맛있게 만들 수 있다’는 비빔밥에 대한 로망이 이제 캘리그래피와 함석까지 비비게 했다. 캘리그래피로 쓰인 쇠고기, 상추, 오이채, 콩나물, 고사리 등의 단어들이 함석판이라는 옷을 입은 것이다. 그들은 다양한 각도로 꺾이고 접혀진 뒤 세워지기까지 했다. 당장에라도 직립보행이 가능할 것처럼. 이상한 것은 그들에게서 함석판의 차가운 물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병인의 손이 닿았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 도마위에 핀 글 꽃  / 비빔밥 아트전 / 강병인

    최근 예술이 다양한 장르와의 융합으로 새롭게 탄생하고 있어요. 글씨도 꼭 평면으로 존재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며 다른 장르와의 만남으로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어요. 그때 때마침 비빔밥을 주제로 작업을 하게 됐죠.

    2017년 7월, CNB 저널과의 인터뷰 중

    그동안 캘리그래피를 어떻게든 입체적으로 보여주려는 시도를 해오셨던 만큼 이번 비빔밥아트전 작업도 꽤 흥미로우셨을 것 같습니다.

    비빔밥은 요즘 모든 분야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융합개념을 가장 맛있게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마침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서 그야말로 비비는(?) 작업을 하게 되었고 글자로 고민하는 것이 제 몫이었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비빔밥의 식재료가 되는 고추장, 쇠고기, 오이채 등을 글자로 쓰고 그것들을 함석판에 옮겨 오려냄으로써 쇠와 글자의 만남을 시도한다’였습니다. 그런데 단순한 평면작업에 그칠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함석의 특성을 활용해 자음들을 조금씩 꺾거나 접는 등 각도에 변화를 준다면 좀 더 시각적인 재미를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이디어나 표현과정이 좀 가볍게 느껴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히려 그래서 한글에 대한 상상력이 좀 더 확대되고 캘리그래피에 대한 고정관념을 유연하게 할 수 있는 통로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렇죠. 더 다양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이 전시의 목적이라면 한글을 바라보는 좀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 제 역할이었으니까요. 또 학생들이 많이 찾는 전시이니 오히려 무겁지 않게 접근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한글 캘리그래피를 입체적으로 세우려는 시도는 언제부터 하시게 되었나요?

    2009년에 ‘간판전’을 위해 ‘갤러리 봄날’이라는 간판을 만들 때부터 언젠간 한글을 입체적으로 세워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종이 위에다 쓰는 작업이 아니었다 뿐이지 금속판으로 평면적인 캘리그래피를 따서 고목판에 앉히는 작업을 하는 데 그쳤잖아요. 그런데 이왕이면 ‘꽃’이나 ‘봄’을 입체적인 조형물로 세워보고 싶었습니다. 글자를 쓸수록 소위 조형성을 잘 갖춘 캘리그래피란 어떤 것일까를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되는데 결국 ‘무게감이 같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거든요. 글자들이 크기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려면 시각적인 무게감이 같아야 한다는 거죠. 또 한 글자 한 글자가 건축처럼 잘 쌓아져야 하구요.

    그런 관점에서 한글이야말로 볼수록 굉장히 입체적이면서도 균형미가 완벽한 글자여서 그 무게감만 잘 감독한다면 세우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죠. 그러다가 지난 해 한글세움전을 통해 쇠를 다루는 이근세 작가와 협업을 하면서 그 가능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타진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겐 더 큰 꿈이 있습니다. 내가 쓴 글자를 공공장소에 3층 높이의 대형 조형물로 세워 한국의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게 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그 정도 규모가 된다면 이제 건축프로젝트로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먹과 쇠의 소규모 만남 차원이 아니라 문자와 건축의 만남 차원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강병인은 예의 신중한 어조로 자신의 꿈을 말하면서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이 그 조형물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 모습을 그리고 있음을 내비쳤다. 생각만 해도 근사한 인터뷰이의 꿈속에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캘리그래퍼 강병인’이라는 브랜드 가치라면 그 일을 해내고도 남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의 행보와 꿈을 부추긴다. 세종대왕의 후예라면, 최근 대한민국 디자인계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두루 활약하고 있는 캘리그래피의 가상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함께 추진해야 할 일이라는 사명감마저 드는 것이다.


    ▲ 위) 봄과 꽃 조형물 원작 / 아래) 입체조형물_이근세 작
    ▲ 좌) 2009 봄날 간판 / 우) 2011 서울디자인 페스티벌 출품작 입체시각시

    흔히 영어 필기체가 멋있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한글은 언어학적 면에서도 우수하고 형태로도 매우 뛰어난 글이다. 그 의미에 상형성을 지녀 독창적인 조형의 미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2011년 6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 중

    최근 <캘리그래피로 표현된 한글 글꼴의 의미적 상형성이 수용자의 인지반응과 기억에 미치는 영향 연구>라는 석사학위논문을 제출하셨는데요, 의미적 상형성이란 어떤 것인가요?

    먼저 영어 flower는 알파벳 기호들이 합쳐진 단어일 뿐 그 자체에서 꽃이 느껴지지는 않잖아요. 한글 역시 기호이긴 하지만 그 글자의 모양에 꽃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자와도 다릅니다. 어느 일본 학자가 쓴 <한글의 탄생>이라는 책을 보면 ‘한자는 보이는 것을 그대로 상형하지만, 한글은 의미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발생론적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이는 형태로 상형한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미적 상형성이란 어떤 글이 가지고 있는 뜻, 소리, 동세, 형상 등을 시각적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함으로써 획득되는 상형적인 극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 논문에서는 그 상형성이 어떻게 소비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인지되는지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고 한 홍삼제품에 쓰인 캘리그래피를 실증사례로 들었습니다. 그 결과 ‘의미적 상형성이 높은 글자일수록 좀 더 부드러운 소통을 이끌어내고 오래 기억되게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죠.

    한글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형성을 부각시키려고 애써 오신 현장에서 검증된 결론이어서 더 의미가 크실 것 같습니다. 그 당위성을 확인하신 것이 앞으로의 작업엔 어떻게 영향을 줄지 기대가 됩니다.

    한글 쓰기에도 여러 가지 시각이 있지만 저는 좋은 한글을 쓰려면 전통 궁체나 판본체를 배우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법고창신’이라는 말이 있듯, 먼저 기본을 알고 난 뒤에 그것을 깨고 새롭게 나아가는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경우엔 순우리말이 가진 아름다움 중 하나인, ‘글자에 그 소리와 의미가 이미 드러나 있다’는 것을, 즉 의미적 상형성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내 글꼴로 담아내는 작업을 당분간 이어 갈 것입니다. 가령 ‘력’보다는 ‘힘’이라는 글자가 그 전달력이 크잖아요. 그 감동들을 글꼴로 기록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단순화시킨 자음과 천지인을 상징하는 모음의 제자원리가 자연물과 우리네 삶의 형상들을 압축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글작업을 하는 감동이 배가 되곤 합니다. 그 좋은 유산으로 더 새롭고 미적이며 의외성까지 노릴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으니 정말 감사할 뿐이죠.


    캘리그래피 시장이 커질수록 그 정체성과 질에 대한 고민은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글 캘리그래피 전도사라는 별칭을 부담스러워할 만하다. 그러나 따끈따끈한 논문을 건네주며 한글의 의미적 상형성을 맨 앞에서 설파하는 그를 통해서 우리 캘리그래피의 도약을 점쳐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디자이너들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공부하는 디자이너들이 많아질수록 더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더 아름다운 변화들이 속출할테니까.


    ▲ <캘리그래피로 표현된 한글 글꼴의 의미적 상형성이 수용자의 인지반응과 기억에 미치는 영향 연구> 내용 中
    ▲ 좌 ) 봄날, 흐르는 내 마음 / 우)  봄날, 긴 그리움

    자연 속에 디자인과 글씨의 원리가 들어있고 자연과 사람을 배려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이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소통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클라이언트와 사용자를 감동시키고 그들을 부드럽게 설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그 작품의 스토리가 되겠죠.

    2011년 12월 폰트클럽 세미나 중

    한글 캘리그래피의 그러한 매력이 많이 알려졌기 때문일까요, 패키지 디자인이나 광고 등 여러 디자인 분야에서 그 쓰임이 확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직업적으로 캘리그래피를 하는 사람들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현상 중에는 조형적 의미나 자기철학, 기업의 철학, 용도 등에 대한 고민과 정당한 이유 없이 단순히 멋으로만 흘려 쓰거나, 캘리그래피의 큰 덕목인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퇴색되어 가고 있는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동안 저변이 확대되면서 생긴 과도기적 현상이긴 하지만 그러다가 자칫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이제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를 포함한 모든 캘리그래퍼들은 정말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한 노력과 세상에 그 글씨가 나온 후 어떻게 쓰일지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기업들도 작품을 의뢰할 때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고 판단했으면 합니다. 제품의 이름이나 로고는 소비자에게 직접 대면하게 되는 얼굴인데, 그렇다면 캘리그래피 또한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제품의 퀄리티나 네임밸류가 높다면 캘리그래피에도 그만큼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죠. 간혹 너무 급하게 만들어 달라거나, 최종안이 채택되는 과정에서 단지 윗분(?)의 취향으로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서로의 전문성을 인정해주면서 합목적적으로 소통하고 판단하는 작업이 되었으면 합니다.

    캘리그래퍼 입장에서 좀 더 완성도가 높다고 판단되는 시안과 현장에서 채택되는 시안이 일치하지 못할 때는 아쉬움이 크실 것 같습니다.

    심하게는 여러 시안들의 부분 부분을 모아 짜깁기하듯이 만들어주길 고집하는 클라이언트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할 수 없이 일을 마무리하기는 하지만 내 자식 같지 않은 마음이 들어서 포트폴리오에는 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좀 더 설득력 있는 캘리그래피를 제공하는 것이 관건이겠군요. 이를테면 스토리텔링이 좋은 시안이라면 더 잘 채택될 것 같습니다만….

    예전엔 내 주관이 들어가면 객관적인 판단을 방해하게 될까봐 그저 작품들만 제출하곤 했습니다. 클라이언트 쪽에서 직관적으로 고르는 시안이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거든요. 그런데 이젠 합당한 근거가 있다면 스토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안작업을 위해 한참 글씨를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스토리가 저절로 발견되는 횡재(?)를 하기도 합니다. 캘리그래피에는 우연성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것들을 잘 가려내고 살려내는 것도 캘리그래퍼들에겐 중요한 덕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스토리가 많은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언제부터인가 브랜드만 남고 스토리가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스토리들을 살려내고, 때로는 만들어서라도 우리 브랜드가 장수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하는 데 어쩌면 캘리그래피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 패키지디자인에 쓰인 강병인의 캘리그래피
    ▲ 강병인의 캘리그래피 연구소 ‘술통’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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