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우물을 얼마나 깊이 팠기에, 알면 알수록 그 세계관이 너무 뚜렷해 오히려 이상하다. 또한 궁금하다. 회사가 아닌 개인이 한글 서체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김태헌 디자이너는 최근 글자 '공간'을 완성해 세상에 내놓았다. 4년여 동안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만들어낸 글자. 그것의 새로움은 깊고 깊은 개념을 타고 신선한 자극이 된다.
바로 어제까지 땡스북스에서 전시하셨잖아요. 어떤 전시였나요?
오랜 시간 글자 만드는 일에 몰두했었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습니다. 지난 1월 2일부터 1월 27일까지 <공간 가족(Hangul Typeface Gongan family)>이라는 이름으로 열렸었지요. 이번에 발표한 글자 이름이 ‘공간’입니다. 이 글자를 표면적으로 설명한 책과 제가 작업한 것들을 스크랩북으로 만들어 전시했고요, ‘공간’을 설명한 책자는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글자 ‘공간’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면요?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둘 이상 결합(조합)하여 만드는 글자입니다. 가로로 결합하고, 세로로 결합하기 때문에 그 나열도 가로, 세로 모두 가능합니다. 저는 자음과 모음의 ‘규칙’적인 ‘결합’이 한글의 조형적인 특징이라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스템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즉, 자음과 모음의 정확한 틀을 만들어 한글의 특징인 ‘규칙’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런 틀 위에 중력이라는 도구를 활용해 ‘결합’해 나갔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중력은 자음과 모음이 모이는 힘을 말합니다. 가로로 모이든, 세로로 모이든, 2개가 모이든 5개가 모이든 동일한 힘. 그것을 중력이라 느꼈고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틀과 중력, 규칙과 결합. 이들을 활용해 만든 글자가 바로 ‘공간’입니다.
굉장히 복잡하고 까다로운 단계를 거쳐 만든 글자인 게 느껴져요.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만든 글자입니다. 어떤 가설, 실험, 증명을 끊임없이 양산해낸 결과이지요. 글자를 만들기 시작한 처음 3개월 동안은 아무 계획 없이 그냥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을 보고 ‘아, 이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계획을 세우고 실험을 시작했지요. 처음엔 한 가지 물음으로 시작했던 실험이 실패를 계속하며 그 가짓수가 늘어났습니다. 여러 가지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고 또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또 다른 무언가가 생겼습니다. 그런 식으로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공식을 통과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림이 아닌 글자이기에. 공식 혹은 모듈…. 이런 식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김태헌이 만들어 온 글자는 그동안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궁금해요.
표면적인 것 이외의 접근을 말하는 게 편할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경험이 많이 없었을 때에는 이야기하기 좋은 ‘꺼리’가 생기면 바로바로 작업을 하는 유형의 디자이너였지요. ‘먹자마자 배출한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웃음) 당시 글자 디자인을 했던 이유는 계속하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지 정통을 따지거나 하이 퀄리티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진지해졌지요. 전환의 가장 큰 계기는 <사각형 연산과 기하학 타이포그라피>라는 책을 쓴 것인데요, 책을 쓰는 1년 동안 뭐든 이 정도 시간을 투자하면 웬만큼의 결과는 얻을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땐 1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거든요. 사실은 글자 ‘공간’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저에게 글자를 만들었던 오랜 시간은 거듭된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 혹은 결벽이 될 수도 있고. 중요한 무언가가 있지요. 하나를 만들더라도 훨씬 더 제대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런 것이지요. 그 외 표면적으로는 실용에 가깝고 콘셉추얼하게 변화했습니다. 그냥 전통에 비비고 싶지는 않았지요. 그래서 훨씬 더 많이 좋은 패러다임을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김태헌에게 글자(한글)란 어떤 의미인가요?
글자는 제가 디자인을 하는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것. 하지만 제가 윤디자인연구소처럼 조직에 속한 디자이너가 아니기 때문에 저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기엔 제 능력도 포함되어 있지요. 현실적으로 지탱할 수 없게 되거나 행여 버틸 수 있다 해도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면 전 포기해야 하는 거잖아요. 글자는 목표였지만 마지막일 수도 있는 그런 것. 한글은 로마자에 비해 역사도 짧고 복잡한 구조입니다. 그만큼 더 많은 고민과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어려우니까 많이들 안 하고, 관심도 덜하고. 제 솔직한 심정은 불쌍하기 때문에, 무시당하기 때문에 갖는 애정이 있습니다. 제대로 만들어주고 싶지요. 다만 지금처럼 로마자 옷을 한글에 입히는 방식은 절대로 안 됩니다. 옛날에는 일어와 한자라는 옷을 한글에 입혔고, 지금은 로마자의 시대니까 로마자의 형식으로 한글을 해석하려 하는데요, 저는 그런 게 싫습니다. 현재 트랜드에 벗어나거나 사람들이 찾지 않아도 ‘한글다운 한글’을 만들고 싶습니다.
개념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잖아요. 의미가 남다른 폰트를 좋아하실 것 같아요.
로마자에서 살펴보면 Universe, Helvetica, Futura, Garamond 등 대표적인 글자들이 다 좋습니다. 그런 것들은 레퍼런스 혹은 전통이지 않습니까. 굉장히 유명해진 글자들인데요, 그만큼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에서는 명조, 고딕을 좋아합니다. 특히 최정호 선생이 만든 오리지널 명조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아주 오랫동안 실패를 거듭하며 버리고 또 버리면서 완성한 글자이기 때문이지요.
글자 ‘공간’ 발표, 이후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나요?
글자를 발표했으니 이젠 출시해야겠지요. 그리고 출시함과 동시에 이 글자를 좀 더 쉽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 개념을, 내가 왜 이 작업을 무엇 때문에 했는지를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영상을 통해 혹은 책을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냥 오프라인으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이는 홍보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고요, 제가 한 연구, 제가 한 방식의 밑거름이 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티브가 되고 싶고 그것으로 좀 더 다른 패러다임이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지요. 그렇게 한글이 조금 더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한글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고 한글은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 혜택은 당연히 우리에게 돌아가지요. 그런 의미를 바탕으로 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