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회사로 하나의 메일이 도착했다. 폰트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진 한 고등학생의 당찬 메일이었던 것. 메일 속에는 평소 폰트에도 관심이 많고 디자인하는 것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직업적으로 폰트 디자이너가 어떤 일을 하는지, 폰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있었다. 혼자서 정보를 찾고 찾다가 더 직접적이고 자세하게 알고 싶어서 저희 회사로 메일을 보낸 것 같았다.
* 이 기사는 윤디자인그룹 공식 블로그 ‘윤톡톡’에 포스팅한 글입니다.(원문 보기)
그래서 그 학생의 기특하고 귀한 마음에 저는 ‘윤디자인연구소의 폰트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서, (부족하지만) 질문의 답을 정성껏 달아서 답장을 써주었다. 그 글을 쓰면서 필자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게 되었네요. 그래서 먼저 그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서 제가 해봐서 좋았던 것들과 제가 하지 못해서 아쉬웠던 부분들까지 합하여 모두 모두 알려주었다.
혹시나 이곳에서도 폰트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 꿈꾸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그 답변의 일부를 다시 정리하여 글을 쓴다.
‘폰트 디자이너’란?
먼저 폰트 디자이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폰트 디자이너는 좁게 보면 (말 그대로) 폰트(FONT), 글자를 만드는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에 살기 때문에 한글 폰트를 주로 만드는데, 한글 폰트에는 한글이 최소 2,350자가 들어있고, 그 외 라틴 알파벳 94자, 기호 약물 986자 등이 들어가 있다. 폰트의 쓰임새에 따라 한글이 11,172자로 확장될 수 있고, 상용한자 4,888자, 기호 약물 1,200자도 포함될 수 있다. 이 모든 글자를 폰트 디자이너가 만드는 것이다. 자, 그럼 한번 계산을 해볼까? 폰트를 하나 만들기 위해서는 디자이너가 최소 3,500여 자에서 최대 18,300여 자를 만져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나온다. (겁먹지 마시고 일단 우리 폰트 디자이너들에게 박수를….)
그러나 필자는 폰트 디자이너를 넓게 보고 싶다. 그래서 거창하게, 한 문장으로 폰트 디자이너를 정의한다면 ‘문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고 싶다. 우리 곁에는 늘 ‘글자’가 함께 한다. 이 ‘글자’는 우리 삶, 문화 가운데에 대단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글자로 사람과 사람이 의사소통하며 사람의 ‘살아있(었)음’을 기록하기도 한다. 지금 필자가 여러분에게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도 바로 ‘글자’인 것. 이 문화를 구성하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글자이며, 우리는 그런 ‘글자’를 만드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화를 만든다, 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자부심!)
폰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준비
자, 그럼 이런 폰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 필자는 ‘구체적인 스킬’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좀 더 ‘기본적인 것’에 대해 충실하게 얘기하고 싶다. 구체적인 스킬, 예를 들어 폰트제작 프로그램 다루는 방법 같은 것들을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솔직히 실무에 들어오면 다 가르쳐준다. 물론 선배의 입장에서는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능숙하게 다룰 줄 알면 좀 더 좋긴 하겠지만. 그러나 여타 디자인 프로그램을 다뤄봤던 사람이라면 폰트 제작 프로그램도 곧 능숙하게 다루게 될 것이기 때문에 굳이 ‘툴’, ‘스킬’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1. 기본적인 소양(호기심, 탐구력, 애정, 보는 눈, 세밀함, 끈기) 갖추기
먼저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저는 꿋꿋하게 기본적인 자세, 태도 등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호기심 + 탐구력 + 글자에 대한 애정
‘폰트 디자인’도 ‘디자인’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향한 호기심과 그 대상에 대한 탐구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의 디자인 대상은 ‘글자’이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것들이 글자이며, 우리가 쓰고 읽는 그 모든 과정에 글자가 있다. 공기와 같이 우리가 인식하는 순간이나 인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그곳에 글자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명조체로 존재하기도 하고 고딕체나 손글씨 등으로도 존재하고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이 세상은 모두 폰트 디자이너의 ‘참고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글자를 향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널려있는 것이 글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이 놓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애정이 있으면 눈에 더 많이 보이게 되고, 많이 보다 보면 어떤 게 좋은 것인지 좋지 않은 것인지를 분별하게 되는 눈도 생기게 될 것이다.
+ 참고사이트
윤디자인그룹 타이포디자인센터(TDC)의 성준석 디자이너가 추천해준 일본 자유공방(字游工房)의 타입 디자이너 오카자와 요시히데의 인스타그램(바로 가기)
: 글자가 주인공인 인스타그램이다. 여기에 올려져 있는 글자 사진들만 봐도 이 작가가 얼마나 ‘글자’ 자체에 애정을 품고 있는가가 훤히 보인다.
보는 눈
‘보는 눈’이라…. 이처럼 막막한 단어는 없는 것 같다. 필자도 지난날을 돌아보면, 초반엔 이게 없었던 것 같다. 뭐가 좋은 것이고 뭐가 안 좋은 것인지 막연하게는 알겠지만 왜 좋고 왜 좋지 않은 지도 잘 몰랐었다. 그래서 필자가 택한 방법은 책을 보면서 기본 원리를 익히는 것이었다. 미학의 기본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미’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았기 때문. 요새는 미학, 시각디자인, 타이포그래피 관련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 책들을 활용하여 ‘좋은 것’을 많이 보면서 분석하다 보면 ‘보는 눈’이 키워질 것 같다. (이때, 남들이 좋다는 것을 그냥 보기만 하면 타인의 의견에 끌려가는 눈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남들이 좋다는 것을 보아도 이게 왜 좋은지 미학의 기본원리를 토대로 자기 나름의 분석·평가를 하면서 보다 보면 ‘자기 눈에 좋은 것’을 구축해갈 수 있을 것이다.)
섬세함 + 끈기
어쩌면 이것은 폰트 디자인의 최대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폰트 디자인은 1pt의 수치만으로도 글자의 형태가 달라져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 세밀한 눈과 섬세함도 필요하다. 그리고 아까 폰트 디자이너가 만들어야 하는 글자 수!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글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끈기. 필자는 특별히 ‘무거운 엉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2. 기본적인 지식 갖추기
책을 많이 읽으며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면 좋겠다. 특히 디자인과 미술(예술), 한글꼴에 관한 역사를 알면 좋겠다. 우리가 디자인을 할 때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모든 창작에는 모방의 대상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현재의 다른 누군가의 디자인이 대상이 되면 표절이 될 것.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의 디자인 보물 창고를 ‘역사’로 마련해놓으면 좋겠다. 그게 분명 큰 자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 타이포그래피 관련 도서들이 많이 나와 있다.
한글 타이포그래피 혹은 한글 디자인에 관한 책으로는 〈한글의 글자표현(절판)〉, 〈윤영기의 한글디자인(절판)〉, 〈한글 디자인 교과서〉, 〈한글공감〉, 〈글짜씨〉 등등이 있다. 이 중에서 특히 〈한글의 글자표현(절판)〉이라는 책은 한글 레터링의 대부이신 김진평 선생님의 책으로, 이 분야의 교과서 같은 책인데 현재는 절판이라 구하기는 쉽지 않다. 도서관에는 있을 수 있으니 도서관을 이용하시길. 〈글짜씨〉와 같은 책은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논문집(바로 가기)이다.
서양 타이포그래피에 관련된 책으로는 〈타이포그래피 교과서〉, 〈타이포그래피 에세이〉, 〈에릭 길: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에세이〉, 〈타이포그래피의 탄생: 구텐베르크부터 디지털 폰트까지〉, 〈The Elements of Typographic Style(Robert Bringhurst)〉 등이 있다. 그리고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33가지 서체 이야기〉처럼 라틴 알파벳 서체 스타일을 분류해놓은 책을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이 책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좋은 책들이 있지만, 일단 이것들만이라도 꼼꼼하게 읽어서 글자와 타이포그래피에 관하여 공부해놓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중요한 공부가 있다. 우리가 만드는 글자가 그냥 글자도 아니고 ‘한글’이기 때문에, 한글에 관한 책도 읽으면 좋겠다. 훈민정음에 관한 책이나 세종대왕에 관련한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한글 창제 원리에 관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한글을 만든 원리〉 등이 있으며, 좀 더 훈민정음 원문과 함께 보고 싶다면 〈훈민정음통사(방종현, 이상현 주해)〉를 참고하면 좋다.
3. 기본적인 스케치 실력 갖추기
글자를 디자인하는 만큼, 스케치실력이 당연하게 필요하다. 요새는 컴퓨터로 바로 디자인을 시작하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종이에 손으로 스케치해서 디자인을 해왔다. 레터링을 통해 손과 도구, 그리고 종이가 직접 만나서 어우러지는 조화, 그 맛을 느껴보면 좋겠다. 좋아하는 폰트를 (대략 150pt이상 정도) 크게 뽑아놓고 글자 높이, 기둥의 두께, 획의 형태 등을 분석해서 따라 그려보는 연습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레터링 연습을 꾸준히 하면 스케치실력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된다.
자, 이렇게 대략적으로 제 나름대로 ‘폰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준비할 것’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학생’을 대상으로 작성한 글이었기에 내용이 직접적이지 않고 다소 추상적일 수도 있다. 필자 또한 학생 때 폰트 디자이너의 꿈을 꿨었지만, 그 길을 잘 몰라 헤매기도 했기에 필자와 같은 방황은 하지 않기를 바라며 ‘꿈을 꾸는 학생’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