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이너 황희현은 호주 퀸즐랜드 주의 해안 도시 골드 코스트(Gold Coast)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이름이 트리플디자인-스페이스(TRIPLEDESIGN-SPACE)다.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시야를 특정한 범위로 한정 짓고 싶지 않아 ‘스튜디오’ 대신 ‘스페이스’라 명명했다고 한다.
제주도를 본사로 둔 국내 기업에서 일하다 미국 샌디에이고로 발령을 받았고, 독립 후에는 골드 코스트에 정착하여 2018년 자기만의 스페이스를 열었다. 세 일터 모두 바다가 가까운 곳들이다. 줄곧 바다를 끼고 일을 해 온 셈이다. 어느 틈엔가 나라와 도시를 옮겨 가며 일하고 생활하게 된 삶을 디자이너 황희현은 헤쳐 나간 게 아니라 ‘타고 넘어간’ 것 같다.
황희현은 제주에서 처음 서핑을 배웠다고 한다. 파도 타는 법은 한국 바다든 미국 바다든 호주 바다든 다 통할 것이다.이른바 ‘시각 언어’라 불리는 디자인도 누구와든 통할 수 있지 않을까. 관건은 서퍼/디자이너의 자세다. 서핑 보드 위에서 알맞은 자세를 취하며 스웰(Swell, 먼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파도의 강도와 방향을 뜻하는 서핑 용어)을 내다보고, 파도의 리듬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
때로는 마음가짐이나 태도 같은 내면보다, 몸이 어떤 스탠스(Stance, 서핑 보드 위 서퍼의 몸자세)를 취하느냐가 많은 걸 좌우하기도 한다. 『타이포그래피 서울』 에디터가 느낀 황희현은 서퍼의 스탠스로 자기 커리어를 타고 넘어가는 디자이너였다.
트리플디자인-스페이스의 ‘트리플’이라는 키워드는 브랜딩, 패키징, 3D 디자인을 포함하는 개념인 것인가요? 이 세 가지 작업(트리플디자인-스페이스의 주요 서비스)을 통해 고객의 브랜드를 위한 새로운 ‘스페이스’를 제시한다― 저는 이렇게 이해했는데, 맞나요?(웃음) 트리플디자인-스페이스는 어떤 스튜디오인지 직접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트리플디자인-스페이스 황희현이라고 합니다. 올해가 스튜디오 운영 5년차거든요. 잘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때쯤 이렇게 인터뷰를 요청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트리플’은 브랜딩, 패키징, 3D 디자인을 뜻하는 것이 맞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제 이름의 이니셜을 따서 ‘트리플에이치’로 시작을 했었어요. 주력하는 분야가 브랜딩·패키징·3D인데, 이 점을 명확히 어필하고자 2021년 스튜디오 리브랜딩을 했습니다. ‘에이전시’나 ‘스튜디오’라는 명명은 왠지 제 스스로 한계를 짓는 듯해서 좀더 광의의 개념으로 ‘스페이스’를 사용했습니다. 제가 메타버스랑 NFT에도 관심이 많거든요. 범위의 경계가 없는 디자인을 추구한다, 라는 저의 우주적 바람을 담았답니다.(웃음)
스튜디오 소재지가 호주 골드코스트입니다. 해안가 도시라 관광객들도 많고, 특히 서퍼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알고 있어요. 스튜디오 인스타그램에 연동된 계정을 보니 디자이너 황희현도 서핑을 즐기는 것 같던데요. 왠지 모르게 젊은 시절의 데이비드 카슨(David Carson)이 떠오르기도 했답니다.(웃음) 호주의 대표적인 휴양 도시에 스튜디오를 마련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앗, 거장과 비유를 해주시니 영광이에요!(웃음) 11년 전쯤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로 처음 왔었어요. 영어 공부도 하고 유럽 여행 경비도 마련할 목적이었죠. 그러다가 여유롭고 행복해 보이는 이 나라에 푹 빠졌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니 뭔가 좀 답답하더라고요. 학창 시절부터 ‘커리어 우먼 인 서울’이 꿈이었는데 말예요. 그러던 차에, 당시 제주도로 본사를 옮긴 어느 기업에서 디자이너 채용 공채가 떴어요. 바로 지원을 했고 다행히 합격했어요.
주말마다 제주의 자연을 만끽하는 생활이 참 좋았어요. 서핑도 그때 처음 배웠고요. 3년간 일했을 때 해외 발령이 났어요. 이번엔 미국 샌디에이고로 갔습니다. 바닷가와 가까운 도시죠. 제주만큼이나 좋더라고요. 공간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 가던 무렵, 회사를 그만두고 스튜디오를 시작했습니다.
골드코스트에 위치한 계기는 결혼입니다. 어쩌다 보니 여행하다 호주인 남편을 만났어요. 남편은 다른 지역에 살았는데 제가 골드코스트로 오자고 졸랐습니다.(웃음) 주말마다 또는 평일에도 파도가 좋으면 바로 서핑 나갈 수 있는 이곳이 너무 좋습니다.
여러 나라의 클라이언트들과 일할 것 같습니다. 포트폴리오 중에서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이 대만의 글로벌 브랜드 ‘홍루이젠(洪瑞珍, Hongrui Zhen) 샌드위치’의 한국시장 진출을 위한 브랜딩 프로젝트였습니다. 호주 현지에서 영미권·유럽권 클라이언트들과 일하며 쌓은 다국적 포트폴리오,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차별점이 아마도 의뢰사에게 어필 포인트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트리플디자인-스페이스가 설정했던 이 프로젝트의 방향성과 디자인 전략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합니다.
에디터님의 멋진 짐작과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웃음) 홍루이젠은 제가 한국에서 일할 때 들어왔던 프로젝트예요. 독립 디자이너 생활 초창기였죠. 대표님이 대만 본사에서 판권을 사 온 후 한국 진출에 맞게 브랜딩과 패키지 디자인을 의뢰해주셨어요. 첫 미팅 때 100개 이상의 점포를 가진 프랜차이즈로 키우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4년이 지난 지금, 그보다 더 많은 매장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로서도 무척 뿌듯합니다.
홍루이젠은 1947년 탄생했어요. 전통이 깊은 브랜드입니다. 제가 세운 브랜딩 방향성은 크게 두 가지였어요. 첫째는 브랜드 고유의 헤리티지 표현, 둘째는 한국 소비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심벌 제작. 최근 몇 년간 뉴트로가 유행하고 있잖아요. 2019년 당시 제가 잡았던 전략의 맥락도 뉴트로였어요. 과거의 것을 현대에 맞게 재창조하여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브랜드가 되길 바랐습니다.
‘한입 베어 문 샌드위치’가 초기 구상(이미지)이었어요. 이걸 점차 발전시켜서 지금의 심벌, 즉 ‘속 재료가 보이는 샌드위치’ 형상으로 완성했습니다. 디자인은 심플하지만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도록 샌드위치 표면을 거칠게 연출했어요. 한글 브랜드명은 획이 두툼한 복고풍 폰트로 표현했습니다.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기존 브랜드의 한자 심벌을 결합한 로고도 함께 제작했어요. 대만 브랜드 특유의 전통과 현대미가 공존하는 느낌을 준 것입니다.
패키지 디자인은 메인 컬러인 레드와 어울릴 수 있도록 파스텔 톤으로 배리에이션을 두었는데요. 실물 패키지를 쌓았을 때 매장의 인테리어 요소로 기능하게끔 의도한 것입니다. 매장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고 싶게끔, SNS에 ‘인증샷’을 올리고 싶게끔 하여 브랜드의 바이럴 홍보가 이루어지길 바랐습니다.
조심스러운 질문입니다만, 혹시 디자이너로서 한국과 호주의 ‘차이’를 체감하신 적이 있나요? 이를테면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의 소통 방식이라든지, 작업 의뢰부터 마감/납품까지의 진행 과정이라든지요.
아직은 한국 기업들과 주로 일을 하거든요. 그래서 ‘호주는 이렇다’라고 말하기는 조심스럽습니다. 그냥 황희현이라는 개인의 경험임을 전제로 들어주세요. 호주 클라이언트들은 작업 기간을 넉넉히 잡아놓고 의뢰를 합니다. 연락도 보통은 이메일로만 주고받고요. 정말 급한 사안이 아닌 이상, 이메일 답신이 하루이틀 걸려도 소통에 큰 지장이 없어요. 반면 한국은 처음엔 이메일, 그리고 미팅, 그후엔 카카오톡 실시간 소통 체계죠. 작업 기간도 더 타이트하게 잡고요.
그런데 저도 한국사람인지라 빠르게 진행되는 게 더 좋아요. 디자인이 오래 고민한다고 더 잘 나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콘셉트를 잡았으면 빨리 시안 작업을 하고 소통하며 다듬어 나가는 쪽을 선호합니다. 호주 클라이언트들이 종종 ‘한국식 빠른 일처리’에 놀라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런 게 또 저만의 강점이지 않나 싶습니다.(웃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 또는 트리플디자인-스페이스의 ‘selected work’로 선별할 만한 작업을 세 가지만 꼽아주시겠어요? 이유도 궁금합니다.
차(tea) 브랜드 도밍고(Domingo) 브랜딩 및 패키지 디자인, 패션 브랜드 마이쉘(My Shell) 브랜딩, 식당 고씨주방(Kichen de Ko) 아이덴티티 디자인이 기억에 남네요.
도밍고는 브랜드 론칭 첫 해부터 함께해 온 회사입니다. 여기 대표님도 홍루이젠처럼 스페인의 유명 꿀차 브랜드의 한국 판매권을 사 오셔서 사업을 진행 중이에요. 5년 만에 큰 성장을 이뤘습니다. 저와는 꾸준히 작업을 같이 하며 브랜드를 만들어 오고 있어요. 트리플디자인-스페이스의 대표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새롭게 리브랜딩 및 패키지 디자인을 진행했어요. ‘스페인산 꿀차를 마시며 현지를 여행하는 기분’이 콘셉트였습니다.
마이쉘의 브랜드 키워드는 ‘바다’예요. 제품들마다 바다의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느낌이랄까요. 제가 좋아하는 자연의 이미지를 브랜딩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네요. 최근 잠실 롯데월드타워에 마이쉘의 첫 플래그십 스토어가 오픈했어요. 제가 만든 로고가 제품화되고, 그 제품들을 연예인들이 홍보해주는 모습이 신기하고 뿌듯하더라고요.
고씨주방은 제가 한국에서 일할 때부터 찾던 단골집입니다. 음식이 진짜 맛있거든요. 최근에 사장님이 가게 확장 겸 인테리어와 리브랜딩을 요청해주셨는데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디자인 파트너인 인테리어 업체 ‘디자인213’과 함께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고씨주방이란 이름은 왠지 전과 막걸리를 팔 것 같은 느낌인데요. 실은 파스타와 와인 맛집입니다.(웃음) 클래식하면서도 현대적인, 한국적이면서도 유럽의 정취가 있는 느낌의 믹스 매치가 디자인 전략이었습니다.
디자이너 황희현과 트리플디자인-스페이스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음, 우선 디자이너가 이렇게 잘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고 싶고요.(웃음) 5년차가 되다 보니 미래에 대한 고민이 정말 많습니다. 클라이언트 일만 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미래 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지식을 공부하고 있는데요. 나중에 그런 것들과 디자인을 연계해서 사업을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물론 현재 하고 있는 디자인도 계속하고 싶고요.
제가 만든 것들이 시장에서 잘 쓰이고 사랑 받을 때 가장 기분이 좋습니다. 디자이너로서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전 세계에 걸쳐 사랑 받는 브랜드들을 많이 디자인해보고 싶어요. 트리플디자인-스페이스를 디자인 스튜디오 이상의 글로벌 사업체로 키우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인터뷰 시리즈 중 「인터뷰/애프터뷰(interVIEW/afterVIEW)」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터뷰이를 수 년 후에 다시 만나는 코너예요. 인터뷰 이후 어떤 시간들을 보냈는지,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이런 이야기들을 나눠보고 있습니다. 만약 저희 매체와 5년 후 다시 인터뷰를 진행한다면, 그때의 디자이너 황희현은 어떤 모습이 되어 있기를 바라시나요?
5년 후면 독립 10년차가 되는 해겠네요. 그때도 디자인을 계속 하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는 1인 디자인 업체로 포트폴리오와 실력을 쌓는 시기었다면, 향후 5년은 다양한 사람들과 새로운 분야의 협업도 하며 재미있게 작업하고 싶어요. 그리고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저만의 브랜드도 론칭해서 키우고 싶어요. 또 상업적인 것뿐 아니라 디자이너로서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유의미한 일에도 참여하고 싶고요. 한마디로,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꼭 5년 후에 인터뷰 부탁드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