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이너 장기성은 트라이앵글-스튜디오(Triangle-Studio)를 운영한다. 디자이너로서도 스튜디오 운영자로서도 활동 10여 년째다. 지난해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 그리고 디자인 스튜디오로 장수하기’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한 분야에서의 10년 이상 연차는 녹록한 경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장수’를 이야기할 만한 단계도 아니다. 그래서 인터뷰어는 장기성의 저 강연 제목이 의아했었다.

인터뷰를 통해 의문이 풀렸다. 장기성은 자신의 10여 년 경력에 대해 “다른 직군에서 그 정도 기간은 일반적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도 덧붙였다. “워낙 흐름이 빠르고 생명력이 짧은 디자인 판이라 유독 ‘존속’ ‘생존’이 부각되는 것 같다”고. ‘그래픽 디자이너, 그리고 디자인 스튜디오로 장수하기’라는 주제를 꺼내들었을 때, 그는 아마도 ‘장수하기’가 아니라 ‘장수하자’를 이야기하려던 것이었을 듯하다. 디자이너 1인의 장수하기 말고, ‘디자이너로서 우리 장수하자’라는.

인터뷰에서 장기성은 버팀에 관한 표현을 두 번―“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것들이면 버틸 의지가 따라온다”, “잘 버텨내고 있는 요즘”―썼다. 또한, 당사자의 직접적 표현은 없었어도 왠지 장기성의 버팀에선 얼마간 연대성이 예감된다. 예감의 근거는 “실무에 치여서 도무지 (다른 작업을 겸할) 시간이 나지 않”는 와중에도 스튜디오 학생인턴들의 작업을 직접 디렉팅한다는 얘기다.

인터뷰어가 느끼기에, 장기성의 버팀은 혼자만의 버팀으로 지속될 것 같진 않다. 그의 버팀은 목(木)을 향한다. 그래픽 디자이너, 그리고 디자인 스튜디오로 장수하기에 성공한다면, 장기성은 누군가의 버팀목이 돼 있을 것 같다.

작년 여름 〈66 TALKS〉라는 토크콘서트에서 강연을 하셨잖아요. 주제가 ‘그래픽 디자이너, 그리고 디자인 스튜디오로 장수하기’였고요. 대학 졸업 후 곧장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 걸로 아는데요. 2007년 무렵부터였다고 어느 인터뷰에선가 읽었습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서 10여 년째 번듯이 활동(혹은 생존)해 오고 있는 셈입니다. 그 타임라인 위에 트라이앵글-스튜디오가 놓여 있는 것일 테고요. 디자이너로/스튜디오로 ‘장수하기’는 먼 미래의 영역이니까, 범위를 좁혀서 질문해보겠습니다. 디자이너로/스튜디오로 ‘10여 년간 활동하기’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무엇을 감당해야만, 시도해야만, 지속해야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요.

디자이너로서 스스로 명함을 만든 지 14년쯤 된 것 같아요. 사실 다른 직군에서 그 정도 기간은 일반적일 수도 있어요. 워낙 흐름이 빠르고 생명력이 짧은(?) 디자인 판이다 보니, 유독 ‘존속’과 ‘생존’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림쟁이였다가 디자이너가 됐습니다. 디자인을 시작한 첫 5년 정도는 우당탕탕 배워가면서 버텼어요. 크고 작은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고 밤새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정말 치열하게 살았어요. 클라이언트 업무뿐 아니라 자체 작업과 전시 참여도 가능한 한 지속하려 했고요. 슬프지만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이에요.

질문에 대한 답이 저에게는 ‘치열함’이 될 수도 있겠네요. 사실, 디자이너라서 뭔가를 시도하고 지속하는 행위가 다른 직군에 비해 특별히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멀리 보고, 각자의 삶을 어느 쪽에 두고 응시할지 고민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것들이면 버틸 의지가 따라오잖아요. 그러면 자연스레 ‘자기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때가 오는 것 같습니다.

브랜드들의 작업을 다수 진행하셨습니다. 작업 대상 품목도 식품, 의류, 뷰티, 생활용품 등 다종다양해요. 국립극장, 국립현대무용단, 서울문화재단 등 공공기관이나 문화 예술 관련 작업들도 다루고 있고요. 디자이너로서 이렇게 여러 영역을 들여다보는 경험은, 사물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과 태도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작업 범주에 경계를 두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문화 예술과 브랜드 디자인을 오갈 수 있는 그 양 끝단의 디자인을 중간항으로 모으기, 이것이 트라이앵글-스튜디오의 지향점이자 역할이기도 합니다.

제가 워낙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다 보니 가급적 안 해본 것들, 한 꼭지라도 다름을 드러낼 수 있는 것들 쪽으로 작업을 전개하는 편이에요. 이미 경험한 것들을 기억해내거나, 앞으로 경험할 것들을 계속 마주하려고 애씁니다. 어떤 영역의 표현들을 또 다른 영역으로 배치하고 치환하는 습관도 생기는 것 같고요.

어찌 보면 매우 피곤한 습관이죠. 하지만, 가치 있다고 판단한 것들을 보고 만지고 경험하고, 가능하다면 소유까지 하는 걸 기본적으로 좋아합니다.

제가 흡연자인지라 2016년 12월 23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담뱃갑 ‘흡연 경고 그림’ 도입 첫날이지요. 당시 제 지인 중에 담뱃갑 디자인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꽤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어요. ‘흡연 경고 그림’을 집어넣게 된 바람에, 이미 다 잡아놓은 시안 몇 가지를 통으로 버렸다고 하더군요.
담배 ‘레종 휘바(Raison – Hyvaa)’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담당하셨던 걸로 압니다. 2017년 초 출시됐던 것 같은데요. 물론, 흡연 경고 그림이 붙은 채로 시장에 나왔습니다. 제 지인의 사례를 비추어 보건대, 어쩌면 디자이너 장기성의 작업 또한 상당 부분 상실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제 3년이나 지났으니, 그때의 작업 과정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혹시나 빛을 보지 못한 본래의 디자인이 존재한다면 공개해주시길 조심스레 부탁드려봅니다.(인터뷰어로서의 요청이면서 흡연자로서의 간청이랄까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선명하네요. 저 또한 애연자이기도 하고, 담배 관련 디자인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2016년 초에 당시 스튜디오 직원과 담배 패키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사무실로 전화 한 통이 왔어요. 신규 레종의 패키지 디자인 의뢰 전화였습니다. 사무실에 도청 장치가 있는 것 아니나며 너무 신기한 마음에 흔쾌히 수락했어요.

작업 얘기를 해보자면, 그때는 ‘휘바’와 함께 다른 네이밍 안이 논의되더 시기였어요. 말 그대로 초기 단계였습니다. 저는 레종 특유의 자작나무 필터 특성을 담아서 일러스트, 그래픽, 텍스처 중심으로 다양한 시안들을 제작해보고 있었는데요. 그러던 와중에 ‘흡연 경고 그림’ 도입 이슈가 생긴 겁니다.

패키지 전면에 흡연 경고 그림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 이미 작업해둔 이미지 전부를 사용할 수 없게 됐어요. 클라이언트 쪽에서도 아직 흡연 경고 그림 도입에 대한 대응책이 미비한 상황이었죠. 결국 진행하고 있던 작업까지만 마무리하는 선에서 프로젝트가 종료됐습니다.

이윽고 ‘레종 휘바’는 출시되었습니다. 제가 자작나무 모양을 모티프로 만든 BI ‘HYVAA’만 남고 거의 다 바뀌었더라고요. 이번 인터뷰 때문에 최근 리뉴얼된 ‘레종 휘바’를 찾아봤습니다. 첫 출시 때보다 오히려 초반의 스케치들을 더 담고 있더군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변수 탓에 작업이 온전히 도출되지 않을 때가 많아요. 디자이너가 룩(look)만 잡아주고, 마무리는 클라이어트 쪽에서 하는 경우도 잦습니다. 저로서는 물론 아쉬움이 남죠. 하지만 제 마음대로만 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결과에 유연하게 순응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드디스크 깊숙이 숨겨둔 작업들이 언젠가 빛을 볼 날이 있겠죠? 저도 이 인터뷰 덕에 잊고 있던 작업을 다시 찾아봤네요!(웃음)

애초 일정대로라면 올해 7월 18일과 19일 ‘디엠지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DMZ Peace Train Music Festival) 2020’이 열렸을 텐데요. 코로나19 영향으로 개최가 취소됐습니다. 트라이앵글-스튜디오가 이 행사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담당했는데, 여러모로 많이 아쉬우실 것 같습니다.
다른 많은 업종이 그러하듯 디자인 분야 역시 코로나19 영향을 적잖게 받고 있습니다. 바이러스 확산이 종식되지 않는 한, 전시나 공연 같은 오프라인 쪽 디자인 작업 수요는 아무래도 좀 줄어들 것 같습니다. 왠지 이런 양상은 디자이너에게 다양한 실험을 요구하게 되지 않을까 해요. 이를테면, 물리적 갤러리를 대체할 온라인 전시 플랫폼을 기획한다든지요. 물론 제 섣부른 짐작일 따름입니다.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또는 현업 디자이너로서, 지금 이 시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디엠지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2020’은 코로나19 때문에 개최를 한 번 연기했었어요. 운영진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쉽지만 결국 행사가 취소됐습니다. 이 프로젝트뿐 아니라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작업들이 영향을 받고 있어요. 특히 공연이나 전시 관련 작업들은 예년에 비해 의뢰가 눈에 띄게 줄어든 듯합니다.

이미 그래픽 디자인 씬 안에서는 이런 상황들을 고려한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어요. 코로나19 이슈를 주제로 한 프로젝트 진행,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코로나19 시국 기록하기 같은 움직임들이죠.

얼마 전, 뉴욕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Dorothee Dähler, Yeliz Secerli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취소 또는 연기된 디자인 작업들을 아카이빙 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는 내용이었어요. 〈Parallel-Parallel〉이라는 온라인 전시 프로젝트였습니다. 저도 참여를 했어요. 이렇게 물리적인 디자인 카테고리를 비대면 중심으로 치환하는 새로운 구조들이 최근 들어 활성화되는 모양새입니다.

제 경우에는 문화 예술 쪽 업무가 올해 줄어든 대신, 브랜드 디자인 쪽 작업량은 늘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로 온라인 중심의 브랜드 시장이 활발해졌거든요. 이 덕분에 잘 버텨내고 있는 요즘입니다.

인턴 디자이너 채용 공고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가 높은 디자인 날라리 찾습니다”라는. 트라이앵글-스튜디오 인스타그램을 보니까, 현재 근무 중인 인턴 디자이너들의 ‘자유 작업’이 올라오고 있던데요. 사전적 의미의 날라리(언행이 어설프고 들떠서 미덥지 못한 사람)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상당히 진중해 보였거든요. 그래서 질문을 드려봅니다. 트라이앵글-스튜디오 찾는 ‘디자인 날라리’란 대체 어떤 인물상인가요?

먼저 이 부분을 설명해드려야겠네요. 트라이앵글-스튜디오의 인턴십은 두 가지 형태로 운영됩니다. 채용을 전제로 한 인턴은 공고를 통해 모집하고 있어요. 아마도 이 채용 공고를 보신 듯해요. 소규모 스튜디오라 채용을 잘 하지는 않는 터라, 지금은 정직원 한 명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형태가 학생인턴이에요. 별도의 모집 공고는 없고, 문의 주시는 분들에 한해 1년에 한 두 번 정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국내외 많은 분들이 문의를 주셔서 현재까지 꽤 많은 분들과 함께했어요. 학생인턴은 디자인 실무를 진행하진 않습니다. 워크숍이나 프로젝트를 개인 작업으로 진행하고, 제가 크리틱이나 디렉션을 하는 방식입니다. 가끔 협업도 하고요.

학생인턴 기간은 두어 달 정도입니다. 학교 수업이나 실무에서 해보기 어려운 작업들로 인턴십 프로그램이 구성돼 있어요. 좀더 자유 의지가 높고 실험성이 강한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다소 진중해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학생인턴이든 함께하는 디자이너든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은 분명해요. ‘사고의 널뜀’이 자유롭고 넓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트라이앵글-스튜디오는 문화 예술뿐 아니라 브랜드 디자인을 동시에 다룹니다. 그래서 인문학적 관점과 더불어, 동시대를 이끄는 트렌드에 대한 감각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기보다는 놀 때 잘 놀고 다양한 것들에 관심이 많은 사람. 이런 모습이 제가 생각하는 ‘디자인 날라리’에 가까운 인물상 같네요.

작년 여름에 트라이앵글-스튜디오의 사업자등록상 업종이 추가됐습니다.(인스타그램에서 봤습니다.) 기존의 ‘그래픽 디자인’에 ‘출판업’이 더해졌던데요. 그해 겨울에 디자이너 채용 공고도 올라왔고요. 스튜디오의 작업 영역을 확장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픽 디자인과 출판업을 겸하는 트라이앵글-스튜디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 예정인가요?

클라이언트와 함께하는 작업들 외에, 디자이너로서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고 디자인 경계가 없는 작업들을 실행하고자 작년에 출판업을 추가했어요. 실무 안에서 디자이너로서의 욕구를 채우는 것은 늘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환기’와 ‘도피’, ‘자아 발현’ 등을 출판업 추가의 이유로 삼았었습니다만, 아직 아무런 결과를 못 냈네요···. 실무에 치여서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지만, 만들고자 하는 아이디어들은 계속 쌓아두는 중입니다.

스튜디오 및 저 개인의 숙제는 출판업과 더불어 브랜드 론칭, 몇 년째 쓰고 있는 책 탈고, 오프라인 공간 마련 등입니다. 미적미적 꾸물대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랄까요. 변화의 형태라기보다는, 하고 싶었던 것들을 차근히 묵묵히 해나가가길 바라는 쪽입니다. 어떤 형태가 되든 누군가와 서로 자극을 주고받는 모습이 되길 바랍니다. 관심과 응원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