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입 디렉터스 클럽(The Type Directors Club, TDC)에서는 매년 타이포그래피 분야에 크게 공헌한 개인 혹은 기관·단체에 특별한 ‘메달(TDC Medal)’을 수여하고 있다. 올해의 주인공은 미국 출신 타입 디자이너 데이비드 벌로우(David Berlow). 1978년 메르겐탈러 라이노타입(The Mergenthaler Linotype Company)의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한 뒤, 1982년부터 7년간 비트스트림(Bitstream)에 소속되어 있었다. 1989년에는 비트스트림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디자이너들과 함께 독립하여 ‘폰트 뷰로우(The Font Bureau)’를 공동 설립한 것. 그들 중에는 <롤링 스톤>, <뉴욕 타임즈>, <에스콰이어>, <리더스 다이제스트>, <워싱턴 포스트> 등 다양한 인쇄 매체들에 관여했던 아트 디렉터 로저 블랙(Roger Black)도 있다.
* 이 기사는 윤디자인연구소 공식 블로그 ‘윤톡톡’에 포스팅한 글을 재구성한 것입니다.(원문 바로 가기)
지금껏 ‘폰트 뷰로우’의 수장으로 활동 중인 데이비드 벌로우는 그동안 인상적인 작업물을 꾸준히 선보여왔다. 특히 그가 ‘폰트 뷰로우’에서 처음 내놓은 폰트 ‘벨리치오(Belizio)’는 유명하다. 이탈리아의 타입 디자이너 알도 노바레세(Aldo Novarese, 1920~1995)가 제작한 활자체 ‘에지치오(Egizio)’를 디지털 버전으로 복원한 폰트가 바로 벨리치오이다. 데이비드 벌로우와 ‘폰트 뷰로우’를 세운 로저 블랙이 <롤링 스톤> 아트 디렉트 작업을 하던 시절에 즐겨 사용한 폰트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데이비드 벌로우는 <시카고 트리뷰트>, <월스트리트 저널>,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뉴스위크>, <에스콰이어> 등 인쇄매체의 타입 디자인을 비롯하여 애플(Apple)과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휴렛 패커드(Hewlett Packard) 같은 IT 기업들과의 OEM 작업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명성을 쌓았다.
그의 커리어는 인쇄 매체에 집중되어 있던 전반기를 거쳐 디지털 환경에서의 스크린폰트 디자인까지 아우르는 현재로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커리어의 분기점이 된 작업이 1997년 애플 매킨토시(Macintosh)의 운영체제인 OS8 프로젝트인데, 당시 데이비드 벌로우는 매킨토시의 내장 폰트 ‘시카고(Chicago)’를 업데이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다듬은 시카고 서체는 훗날 애플이 내놓은 아이팟(iPod)에서 다시 사용된 것. ‘시카고’ 외에도 데이비드 벌로우는 애플과 함께 일하며 여러 벌의 핵심적인 폰트를 디자인하며 스크린폰트에 대한 이해와 감각을 다졌다. 맥용 데스크탑 폰트인 ‘가젯(Gadgets)’ 역시 그의 작품. 이렇게 노하우를 쌓은 데이비드 벌로우는 2010년, 파트너십을 맺은 타입 디자이너 및 업체들과 손잡고 웹폰트(web fonts)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웹타입(Webtype, 바로 가기)’이라는 사이트를 열기도 했다.
데이비드 벌로우는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와 발전을 시도하는 디자이너이다. 그의 동료이자 저명한 디자이너인 네빌 브로디(Neville Brody)는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1980년대 많은 디자이너들이 마지못해 종이에서 맥(Mac)으로 이동했다면, 데이비드 벌로우는 이미 활자체를 디지털화 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1990년대에 그는 인쇄 매체 디자인의 쇠퇴를 깨달았고, 운영체제를 위한 스크린 폰트 작업을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스타일과 가독성을 갖춘 완벽한 형태의 힌팅 폰트 디자인에 매진했으며, 지금 그는 활자체의 글립을 완전하게 스크린으로 이식하는(a complete glyph-to-screen) 플랫폼을 창조해내고 있다.”
네빌 브로디의 말을 듣고 나니, 데이비드 벌로우는 늘 남들보다 한 발짝 먼저 움직였던 디자이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시류를 수동적으로 따라갔던 게 아니라, 그 시류를 앞질렀던 선구자라고 느껴지는 것. 타입 디자인 분야에 앞으로 또 어떤 족적을 남길지, 데이비드 벌로우의 향후 행보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