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pe Record _ intro
버튼 하나만 누르면(터치하면) 듣고 싶은 음악을 장소와 상관없이 들을 수 있는 시대. 음악은 친구 못지않은 정신적 건강과 위로를 가져다주는 좋은 매개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더욱이 뉴트로(new-tro) 열풍을 통해 바이닐(LP), 턴테이블, 카세트테이프, 워크맨 등 아날로그 감성과 향수를 자극하는 아이템들이 20~30대층을 통해 다시 사랑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예전의 바이닐 앨범들을 보면 레트로한 분위기의 타입, 레터링, 디자인 덕에 더 눈이 가고,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긴 세월이 흘러도 사랑받는 명반―레코드판들. 그리고 그 타입들. 『타이포그래피 서울』이 한 장 한 장, 한 자 한 자 모아보려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말했다. 자신의 책을 ‘독해’하려 하지 말고, ‘음악 듣듯이’ 읽어달라고. 『타이포그래피 서울』 독자들께도 청한다. 우리가 기록해 나갈 이 타입들을 ‘청음’하듯 감상해보시라고.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서 ‘산울림’을 빼놓을 수는 없다. 산울림 1집(1977)·2집(1978)은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각각 5위·6위를 차지하고 있다.
산울림은 록 밴드이자 가족 밴드다. 멤버 구성이 맏형 김창완, 둘째 김창훈, 막내 김창익, 이렇게 삼형제다. 이들 셋은 어려서부터 방 벽에 계란판을 붙여 방음실로 꾸미고, 싸구려 기타로 작곡과 연주를 했다고 한다. 자작곡이 무려 150곡 가까이 된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산울림의 데뷔 연도는 1977년이다. 제1회 MBC 대학가요제가 열린 해다. 김창완·김창훈·김창익은 ‘무이(無異)’라는 팀명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재학생만 참여 가능’이라는 심사 규정 때문에 예선 1위를 하고도 탈락하게 된다(삼형제 중 김창완이 졸업생 신분이었다.)
참가팀 중에는 샌드 페블즈(Sand Pebbles)도 있었다.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밴드 동아리다. 김창훈은 샌드 페블즈 5기 멤버였는데, 자신이 작곡한 ‘나 어떡해’를 주고 탈퇴한 상태였다. 그런데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샌드 페블즈 6기 멤버들이 ‘나 어떡해’로 1위를 차지한다. 이 곡은 이듬해 산울림 2집에 리메이크 버전으로 수록되기도 한다.
대학가요제(1977년 9월) 이후 석 달 뒤인 12월, 산울림 1집이 발매됐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창완·창훈·창익 삼형제는 전문 뮤지션이 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앨범 제작 목적 또한 자신들의 음악 활동을 기록해두려는 취지였다.
지금이야 산울림은 이견의 여지 없는 ‘레전드 밴드’인데, 음반 발매 당시만 해도 퍽 혹독한 평가들이 있었던 것 같다. 전문 밴드에 비해 다소 미흡한 프로듀싱 상태와 연주 실력이 지적됐었다고 한다. 당시의 일부 저평가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산울림 1집이 명반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뭘까? 바로 가히 센세이션에 가까웠던 충격적 독창성이다.
이 음반의 제작사 ‘서라벌레코드’에 대한 여담 하나를 하자면, 이 회사는 무려 2004년까지 LP를 제작·판매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70~80년대 황금기를 이루던 국내 LP 제작사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산울림 1집은 록 장르로서 최초의 히트를 기록한 앨범이다. 독특한 사운드, 생동감 넘치는 리듬, 신선한 멜로디만으로도 충격적이었지만, 구어체 문장을 그대로 가사로 사용한 점은 거의 혁명에 가까운 시도였다. 이는 이후 우리 가요계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앨범 재킷의 크레파스 그림이 인상적이다(위 사진 참고). 김창완이 직접 그린 것이라고 한다. 동네 꼬마에게 그림을 부탁하려 했는데, 여의치 않아 그가 손수 그렸다고. 당시 LP들이 대개 뮤지션의 사진을 재킷 커버 이미지로 썼던 점을 생각하면, 산울림의 크레파스 그림 커버는 대단히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니 김창완의 남다른 ‘동심’은 지금도 이어지는 듯하다. 지난해 생애 첫 동시집을 발표하는가 하면, 그 전에도 몇 권의 동화를 쓴 바 있으니.
김창완의 크레파스 그림 곁에서 얇은 글자들의 레터링(thin lettering)은 3개 층(산울림―아니벌써―불꽃놀이/문좀열어줘)으로 구조화돼 있다. 대단히 직선적이며 제도적인 글자체임에도 투박하거나 딱딱한 인상은 느껴지지 않는다. 얇은 굵기 계열의 글자가 자아내는 특유의 세련미 덕이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레터링의 3층 구조화’다. 각 층의 글자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시각적 강약 조절을 이룬 것이다. 밴드명을 가장 크게 보여주고, 그 뒤로 앨범명-곡명 순에 따라 글자 크기를 줄여나간다. 보는 이의 시선이 정보의 위계(hierarchy)를 좇을 수 있도록 고려한 디자인이다.
모음 ‘ㅏ’와 ‘ㅣ’가 마치 ‘산울림’이라는 밴드명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새다. 하늘을 이고 선 아틀라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밴드명이 그만큼 ‘무겁다’라는 인상이 시각적으로 느껴진다. 즉, 레터링의 3층 구조화는 밴드명에 무게감을 싣고자 의도된 디자인이었던 셈이다. 재치와 센스가 넘치는 디자인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레터링에서 음절과 음절의 경계가 차츰 또렷해지는 부분 역시 인상적이다. 밴드명 ‘산울림’이 한 덩어리로 인식되도록 경계 없는 레터링을 보여준다면, 곡명 레터링은 각각의 음절 단위로 선명히 나뉜다. 덩어리 크기의 변화도 하나의 재미 요소로 볼 수 있겠다.
언젠가 레코드숍에 들렀다가, 20대 손님들이 산울림을 평가하는 얘기를 들었다. 산울림 삼형제가 만약 영국에 태어났으면 딥퍼플, 핑크플로이드 급의 세계적 사이키델릭 록 밴드가 되었을 것이라는…. 이 말에 ‘격공’을 표하며 다섯 번째 타입레코드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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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anks to → 음반 사진을 제공해준 레코드숍 ‘곽엘피’(경기 파주 지목로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