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무심한 듯 쉬크한’ 파리지엥들의 모습이다. 대충 머플러 하나만 훌훌 둘렀을 뿐인데 그들만의 멋이 있다. 사실 처음 파리에 도착해 지하철노선표를 받아들었을 땐 그 복잡함에 한 번 놀랐고 지하철 내부의 지저분함에 두 번 놀랐다. 하지만 파리는 억지부리지 않는 자연스러움, 그게 매력이다. 파리의 디자인 역시 틀에 박히지 않고, 다양한 인종만큼 여러 가지 색과 서체들이 이질감없이 조화롭다. 지하철에 아무렇게나 붙은 포스터에서 그래피티까지, 길거리의 모든 것들이 예술로 느껴지는 걸 보면 파리는 우리 모두에게 낭만의 도시임이 틀림없다.
파리투어 및 지하철 맵, 파리의 지하철은 역 사이가 가까워 갈아타는 경우도 많고 다양한 노선들이 있다. 노선마다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지만 서체는 볼드한 ‘파리진(Parisine)’체와 색을 파랑색으로 통일하여 노선의 색이 역 이름을 헤치지 않는다. Parisine체는 프랑스 타이포그래퍼 Jean-Francois Porchez가 설립한 Porchez Typofonderie에서 개발한 서체로 1996년부터 파리 자치 교통 공사에서 관리하는 모든 교통편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많은 그래피티를 보았지만 프랑스에서 본 그래피티들이 가장 재미있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관광지를 해치는 공해일 수도 있으나, 나에게는 하나의 타입놀이로 보인다. 특히 샹샤펠 성당 화장실의 그래피티는 어떻게 저 위에 올라가 그렸는지도 신기하지만, 성당과 그래피티의 조합이 엉뚱하고 재미있다. 위 사진 속 글들의 뜻이 궁금하지만 불어를 몰라 아쉬울 뿐.
퐁피두 센터에서 만난 [DIN] 서체
파리답지 않으면서 가장 파리다운 건축물로 에펠탑과 더불어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현대식 건물인 퐁피두센터는 건물 외벽으로 각종 배관을 용도마다 다른 색상으로 이루어졌다. 빨강은 에스컬레이터, 노랑은 전기관, 파랑은 환기관, 초록은 수도관을 나타내는데 외부에 노출시켜 그 자체로 미술적 조형미를 이룬다. 1969년 대중예술을 위한 문화정책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 건물을 제안한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퐁피두센터라고 부른다. 영화관, 레스토랑 등이 있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내부에는 1905년부터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퐁피두 센터의 위치를 못 찾는 일이 거의 없을 것 같다. 교통이 편리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퐁피두 센터의 외관은 눈에 뛸수 밖에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빨강, 파랑, 노랑 등의 다양한 색만큼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전시관과 도서관, 그리고 영화관까지, 이곳은 누구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파리는 도시의 경관을 위해 전봇대를 포함한 모든 전깃줄을 땅밑으로 감춰 놓았다. 이에 반해 퐁피두 센터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보인다.
퐁피두센터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강한 매력을 내뿜는다. 그 화려함 속에서 모든 것들을 조용히 아우르고 있는 아이덴티티는 바로 [DIN]체다. 1998년 퐁피두센터는 비주얼아이덴티티 작업을 도시의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루에디 바우어(Ruedi Baur)에게 맡겼다. 당시 여러 색의 중첩된 타이포그래피와 다양한 언어로 제작된 사인물은 퐁피두센터가 다양한 문화를 내포하는 국제적 이미지를 갖는 데 큰 역할을 했다.
[DIN]체는 독일의 공공환경의 통일을 위해 만든 서체로 독일산업표준협회(German Institute for Industial Standardization)의 약자다. 어떻게 보면 [DIN]체는 퐁피두 센터에 내포된 다양성의 측면에서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DIN]체는 그 안에서 질서를 지키며 당당히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자폭이 좁고 세로로 긴 형태를 가지고 있는 [DIN]체는 날씬한 세련미를 보여준다. 다양한 색과 디자인을 가지고 있는 사인물 속에서도 묻히지 않고 통일감과 균형을 이룬다.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다양한 문화가 독일의 이성적인 서체와 만나 완벽히 하나가 되었을 뿐 아니라 퐁피두 센터를 대표하는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이것이 나라와 언어, 전공을 초월한 디자인의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