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창조성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보는 관점, 자신의 취향, 삶의 경험 등 이유가 많은 만큼 한 가지를 꼽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 명의 디자이너, 혹은 하나의 디자인 회사가 보여줄 수 있는 개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패션에서 시작해 그래픽 디자인을 하게 되기까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열정적으로 달려온 ‘폰그라픽(VON GRAFIK)’의 김지연 실장을 만났다.
이제는 중견 차라고 불릴 만한 디자인 회사인데 어떠세요?
디자인을 시작한 건 20년 전인데 회사를 시작한 지는 10년이 되었어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초기엔 패션 분야의 일이 많았는데 시장이 넓지 않은 편이라 한 다리만 건너면 거의 아는 사람인 경우가 많았어요. 1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패션 분야보다 비 패션 분야의 일이 더 늘고 있는 것 같아요. 종이와 관련된 문구류를 디자인, 제작하기도 하고요. 우연히 기회가 온 적도 있고, 지금 하는 일들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일들이 많아요.
압인기 하나만 봐도 단순히 공급용 제품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어 감성이 더 묻어나는 것 같아요.
예전부터 종이나 소품을 좋아했어요. 압인기도 레트로한 느낌이 나는 게 좋아서 한두 개 사두었던 건데 우연히 나간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많은 분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손 느낌이 많이 나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아예 주문 제작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죠. 이렇게 의도하지 않았는데 벌어지는 일들이 많아요. 무언가를 정해두고 따라서 가기보다는 상황에 맞게 열어두는 편이에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하는 면도 있고요.
폰그라픽만의 개성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폰(von)은 독일어로 ‘~로부터’라는 의미도 있고 귀족에게 붙이는 칭호이기도 해요. 저희는 ‘그래픽으로부터’라는 뜻으로 쓰고 있어요. 뒤에 315는 처음 사무실을 열었을 때 주소가 315호였어요. 굉장히 임대료가 저렴한 곳이었는데 그때 초심을 잊지 말자는 의미지요(웃음). 제가 패션 분야에서 그래픽 업무를 시작해서 그런지 감성 그래픽을 강조하는 성향이 있긴 해요. 밖에서 어떻게 보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작업물을 좋아하는 분위기 속에 오래 있었던 경험 때문인지 작업하다가 외부적인 여건과 부딪치게 되면 안 돼, 라고 수긍하기보다 왜 안 되지? 라고 생각할 때가 많거든요. 그런 점에선 일반적인 그래픽을 다루는 디자인 회사와는 다른 면이 드러날 수도 있겠네요.
패션 관련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요?
원래 제 전공이 의류학이었어요. MD 분야 일을 하면서 첫 직장을 다녔는데 숫자를 다루는 일이 별로 재미없더라고요. 어느 날 신촌에 있는 백화점을 지나가다가 디스플레이 해놓은 것을 봤는데 참 좋아 보였어요. 일도 재미있을 것 같고. 그래서 비주얼 머천다이징 코스를 1년 정도 배우고 다시 취업했는데 의류 디자이너가 하는 업무를 제외한 모든 일을 하는 부서였어요. 마케팅부터 다양한 일을 하는 게 정말 재미있어서 많은 일을 한 것 같아요. 독학으로 컴퓨터도 배우고 자료도 모으고 컬렉션도 찾아보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디자인 일을 하게 되었네요.
정형화되지 않고 자유로운 감성은 폰그라픽의 강점이라 할 만하다. 자유로움은 작업뿐만이 아니라 일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쉽게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아니다. 높은 기준을 갖고 있기에 쉽게 타협하지 않는다. 그만큼 수많은 가능성의 문을 열어둔다. 많은 시간과 깊은 정성을 들여서 쌓은 확실한 실력 위에 선한 의도와 의지를 지니고 최선의 결과를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이미지화한 것을 비주얼화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떤 훈련을 하셨나요?
하다 보니까 하게 된 것 같긴 한데…. 우선은 클라이언트의 말을 잘 경청하고 좋아하는 것들이나 성향을 파악하려고 해요. 대화를 나누면서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려보다가 질문을 통해 좁혀 나가고요. 맵핑으로 느낌을 잡는 방식이 저한텐 익숙한 것 같아요. 그래도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는 거예요. 컴퓨터 앞에서 계속 작업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장조사를 통해 생각하고 비주얼을 떠올리고 다른 브랜드나 경쟁 상대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조사를 충분히 하는 것. 이렇게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모아보고 맵핑한 후 멀리서 보면 윤곽이 점점 더 드러나는 것 같아요.
어떤 작업이 가장 기억에 남으세요?
컬렉션과 관련된 일이었어요. 뉴욕 컬렉션에서 ‘디 에어(The Air)’라는 주제의 패션쇼를 위한 에어캡 인비테이션을 작업했었는데 콘셉트에 부합하기도 했고 소재가 달라 보이는 효과도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방산시장에서 구한 저렴한 소재들이었는데 조합해보니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그리고 에어캡 인비테이션은 수작업의 묘미랄까, 하나씩 구겨서 넣는 작업이 즐거웠어요. 같은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계속 새로운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일 자체가 압박감이 클 것 같은데요?
괴로울 때도 많죠. 시간이 많이 주어진 게 아니라 한정된 시간 안에 해내야 하니까요. 좋아하지 않는 주제를 해야 할 때는 생각을 많이 해도 힘들 때가 있어요.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작업이 적성에도 맞고 즐겁기도 하지만 압박감도 분명히 있죠. 하지만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를 때가 가장 어려워요. 앞에선 괜찮다고 하고 며칠 지나서는 다른 것을 말한다거나, 그런 경우는 결과가 만족스럽긴 어려웠던 것 같아요.
막히는 순간엔 어떻게 아이디어를 떠올리세요?
잠시 눈을 감고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떠올릴 때도 있고, 아이디어가 없을 땐 방산시장이나 충무로 같은 데 가서 재료를 보면서 거꾸로 생각할 때도 있어요. 소재가 싸든 비싸든 매력적인 것들이 있거든요. 시장조사를 통해서 다른 영역을 서치하기도 하고. 하지만 일이 몰려도 밤샘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나이도 있고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웃음).
좋고 싫은 게 분명하다. 괜찮다는 표현보다 뭐가 좋고 뭐가 싫은지, 왜 좋고 싫은지 스스로 물어서 자신을 아는 것을 중요하다고 여긴다. 예스와 노를 명확히 하고 흘러가는 대답을 싫어한다. 자기주장을 강하게 펼치는 일을 조심스럽게 여기는 사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는 건 쉽지 않을 일일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자체가 개성이 되어 선명하게 다가온다. 모호하지 않고, 흐리지 않다. 투명한 얼음 같다. 그러나 불을 품고 있는 얼음이다.
패션 관련 디자인은 젊은 친구들도 흥미로운 분야일 것 같은데 무엇을 준비하면 좋을까요?
작은 것 하나도 지나쳐 보는 게 아니라 생각하면서 보는 습관이 중요해요. 시간 날 때 틈틈이 관심 있는 전시회도 보고 백화점이나 좋은 문화 공간이 있으면 찾아가서 구경도 하고 서점에 들러서 패션지나 책들도 보면서 시각적인 훈련도 하고 감성을 풍부하게 하는 거죠. 회사에 들어가서 만약 프로젝트가 주어진다면 다른 사람의 작업을 해준다는 식이 아니라 내 일이고 내 포트폴리오다 생각하거나 이 일을 의뢰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디자인할지 생각하다 보면 조금 더 명확해지는 것 같아요.
폰그라픽만의 기준이라고 할까, 함께 일할 때 어떤 걸 중요하게 여기시나요?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이 작업은 진짜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이대로 오케이야? 소비자가 좋아할까? 이거 살까? 왜 사겠어? 이런저런 질문들을 서로 던지다 보면 조금 더 솔직한 답이 나오거든요. 자기가 한 것을 붙여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듣는 건 정말 좋은 훈련이 돼요. 익숙해지기 전까진 놀랄 수도 있지만(웃음). 직원을 채용할 땐 일에 대한 마음가짐을 먼저 보지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인성이에요. 아무리 일을 잘해도 인성이 좋지 않으면 같은 공간에서 오래 일하긴 힘든 것 같아요. 인턴과정을 두는데 좀 두고 보는 편이에요.
작업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으신가요?
클라이언트가 가장 중요하죠.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게 우선이에요. 상대가 의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찾아주는 게 우리 일이니까. 첫 미팅 때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윤곽이 드러나야 작업을 할 때도 범위를 좁힐 수 있거든요. 작업할 때 필요한 부분과 의문스러운 부분에 대한 걸 생각하면 무엇을 물어보고 들어야 하는지 저절로 드러나지요. 대화를 나누면서 머릿속으로는 이미지들을 떠올려 봐요. 그리고 그것과 자기 생각을 맞추면서 작업으로 풀어요.
많은 일을 하고 계시는데 올해 계획은 어떤가요?
1층 매장 공간에서 전시회를 계속했었어요. 1회는 ‘블랙 앤 화이트’, 2회는 ‘블루’라는 주제로 그림 등 다른 작가분들의 작업물을 전시하고 판매도 했는데 반응이 좋았거든요. 그래서 컬러 주제를 계속하면서 레드를 생각했는데 올해는 레트로를 생각하고 있어요. 빈티지 감성이 나는 물건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많은 분이 관심을 보이세요. 그리고 지금 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죠. 앞으로 어떤 새로운 일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