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를 봤을 때 정말 감동했다. 단순하면서도 강하고 진지한 북 디자인만으로도 소장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등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 흔적. 도대체 북 디자이너가 누구지? 민음사 미술팀에 있으면서 브랜드인 황금가지, 판미동, 민음인에서 출판하는 책을 맡고 있는 북 디자이너 김다희를 만났다.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워낙 많은 작업을 해오셨죠? 최근 근황은 어떠세요?
민음사가 졸업 후 첫 번째 회사이고, 지금까지 8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민음사 출판 그룹의 여러 가지 브랜드 중 황금가지, 민음인, 판미동에서 나오는 책을 담당하고 있고요. 책 만드는 게 좋아서 1년, 2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하다 보니까 쉬고 싶다는 생각 없이 달려온 것 같은데요, 여전히 매일 신사동으로 출근하고 책 만들고…. 그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민음사에선 어떻게 일하게 되셨나요?
학교 다닐 때부터 글꼴과 편집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어요. 당시에는 폰트를 디자인하고 싶은 건지, 내가 디자인한 폰트로 다른 작업을 하고 싶은 건지 결정하기가 힘들었는데요, 잡지사에서 인턴 생활도 해보고 폰트랩으로 글자도 만들어보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하다 보니까 제일 즐거운 게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통해 편집물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마침 스튜디오 ‘바프’에서 프로젝트 인턴을 하면서 직접 다양한 아트북을 제작하고, 그것을 모으고 촬영해 다시 책으로 출간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 작업이 참 즐거웠던 터라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독자들과 책을 매개체로 소통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도 이 일에 매료된 큰 이유였던 것 같고요.
당시 민음사 미술부에 다니고 있던 학교 선배들로부터 회사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평소에 민음사 책들을 많이 읽었던 터라 졸업 전시회를 한 후 지원하게 되었고요.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출판사에 북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어떤 점이 가장 좋으세요?
늘 책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다양한 책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어요. 학생 때는 나는 디자이너다, 디자인을 잘하고 싶다, 이런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던 것 같은데, 출판사에 7년 넘게 다니다 보니 디자이너라는 정체성보다 책을 만드는 사람, 출판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더 커졌지요.
그 연장선에서 책을 만드는 전반적인 프로세스, 국내 기획물과 번역서의 차이, 제목과 부제를 선택하고 카피를 뽑는 과정, 제작과 유통에 대한 것까지 관심이 많아졌고요. 물론 북 디자이너로서 우선 디자인을 잘해야 하고 그 부분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만 디자인만 좋다고 좋은 책이 되는 건 아니기에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고 책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책이 나오면 온오프라인으로 홍보를 하고 지면에 광고도 하고 매년 도서전에도 참가하는데요. 최근에는 전자책 업무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기 때문에 출판사에 소속한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책 전반에 걸친 시야를 넓히는 게 실무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만든 책을 끝까지 책임지고 싶은 마음도 강해지고요. 이런 전반적인 과정이 있기에 보람이나 성취감 같은 것이 크다고 생각하고요.
개인적으로는 『파운데이션』 전집 북 디자인이 참 좋았어요.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완전판을 기다리던 독자들이 많았기에 잘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던 것 같아요. 내부에서도 오랫동안 기획을 했고 편집부와는 물론 마케팅부, 제작부와 끊임없이 소통했던 작업이고 그만큼 공도 많이 들였고요. 멋진 그림을 그려준 백두리 작가와 회사 내 다양한 부서와 협업하는 과정이 참 재미있었어요. 결과가 나온 후 다행스럽게도 독자들 반응이 좋아서 저도 애착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책은 어느 한 사람의 특별한 재능으로 이뤄지기보다 여러 사람의 일손과 정성이 들어가는 협업의 결과물이다. 김다희는 미술전공을 한 북 디자이너면서 동시에 에디터 혹은 출판인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책 만드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다. 그녀는 종이와 제작비, 띠지에 이르기까지 ‘좋은 책 만들기’에 관한 한 거의 모든 고민을 한다.
작업 시간 외에도 책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은데요.
선배, 동료 편집자하고 평소에 점심 먹으면서도 앞으로 이런 책을 낼 건데 이게 어떤 책이냐 하면…. 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나누죠(웃음). 본격적인 작업이 들어가기 전부터 이런 일상의 대화를 통해 그 책은 어떤 모습이면 좋겠다 미리 생각하고 있고요. 독자 중에는 정말 애타게 그 책이 출판되기를 기다리는 분들도 있고 저도 그 마음을 알기에 그 원고와 저자의 얼굴이 되어줄 북 디자인을 어떻게 하면 더 돋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 더 매력적으로 만들까, 늘 그 고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은 작업을 하셨는데, 내용을 다 읽고 작업을 하시나요?
주변에 정말 많은 분이 그 질문을 하시는데요(웃음), 신입사원 때는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출간권 수가 늘어나고 홍보물까지 함께 많아지면서 모든 원고를 다 읽기는 불가능해졌고요, 다만 간추린 텍스트를 읽더라도 담당 편집자와 많은 대화를 통해 원고를 충분히 이해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하는 편입니다.
책이 나오고 시간이 지난 후에 돌이켜보면 텍스트를 다 읽었다고 꼭 좋은 디자인이 나오는 것도,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표지가 다 좋은 것도 아니지만,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나도 모르게 샀다는 독자들의 의견을 들으면 디자이너로서는 더 힘을 내요.
편집자와 생각을 나누는 일이 중요할 것 같아요.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시나요?
같이 서점을 다니거나 구매한 책을 보고 의견을 나누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데요, 같은 책을 봐도 관점에 따라 다른 의견이 나오니까 대화 자체는 늘 재미있어요. 경직된 상태로 우리 이 책에 대해 회의해요, 이러기보다 평소에도 좋은 아이디어 생각나면 바로 알려주고, 좋은 사이트 있으면 링크 걸고, 친구처럼 이야기를 많이 해요. 한 직장에서 오래 봐온 분들이라 손발이 잘 맞는 편이죠.
마감 기간은 충분치 않은데 디자이너에게 편집자가 시안을 여러 가지로 부탁할 때도 자주 있어요. (어떤 디자이너들은 이 부분에 있어 부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저 같은 경우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는 편입니다. ‘내가 만약 이 책의 편집자이고 디자이너에게 내가 담당한 원고의 디자인을 맡긴다면 어떤 부탁을 하게 될까?’ 저라도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디자인을 비교해보고 싶을 것 같고 다수가 어떤 걸 좋아할지 궁금할 것 같거든요.
신입사원 때는 제가 미는 디자인이 선택 안 되면 낙심을 하기도 했는데, 편집부, 마케팅부 등 과정을 두루 거치면서도 살아남는 시안이 결과적으로 좋은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어떤 건가요?
작년에 했던 작업 중에는 『파운데이션』(아이작 아시모프/김옥수 번역, 황금가지, 2013) 완전판이 작업 기간도 길고 공도 많이 쏟아서 가장 마음에 남고요, 그 전에 했던 작품 중에선 『주석 달린 드라큘라』(브람 스토커, 레슬리 S. 클링거/김일영 번역, 황금가지, 2013)라는 작업이 소스 하나 고민하면서도 설레며 작업할 정도로 흥분했었어요. 두꺼운 양장본으로 무섭지만 아름다운 책을 만들자는 게 목표였었죠.
『파운데이션』 때 같이 작업한 백두리 작가와 최근에 민음인에서 나온 논픽션 시리즈(『사람들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질까』, 『슬픔이 멈추는 시간』, 『차마 울지 못한 당신을 위하여』)를 함께 했는데요. 시리즈 작업이라 그림의 톤을 결정하는 일부터 색과 서체를 선정하는 기본적인 일까지 결정해야 할 사항이 많아서 더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어진 대로 일을 하기보다 스스로 즐겁게 하는 법을 찾는다. 단순히 디자인만 하는 게 아니다. 피오피부터 홍보까지 책 전체 과정을 보기 때문에 일의 양으로 따지면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늘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기본적으로 많이 듣고 생각을 나누는 것이다. 여전히 실전에서 배우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편집자와 의견이 다를 땐 어떻게 하세요?
담당 편집자와 이야기를 많이 나눠요. 안 될 길을 내 고집대로 무리해서 가기보다 이 방향이 맞는지 생각하죠. 그 책과 저자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애정이 있는 사람은 편집자라는 믿음이 있거든요. 대화를 하다 보면 길이 좁아지고 밝아지니까 맨 마지막에 멋있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혼자서 가지고 있기보다는 과정 중에 보여주고 더 좋은 의견을 듣기도 하면서 갱신하고, 더 나은 작업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미술부에서 좋아하는 시안과 편집부나 마케팅부에서 좋아하는 시안이 다를 때도 있고요. 각자 방법이 다를 텐데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의견을 많이 구하는 편이에요.
북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면 어떤 자질을 키우는 게 좋을까요?
우선은 글꼴과 편집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야 이 길을 선택하겠지만, 이 길을 생각한 이상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싶어요. 책 자체를 좋아하고 많이 읽고 가까이 하다 보면 독자의 입장에서 본문 폰트는 이 정도 크기에 이 정도 여백이 좋겠다, 종이는 이것보다는 저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 기준이 생겨서 디자인하는 데도 감이 많이 생기거든요. 나 스스로가 독자가 아닌 디자이너에만 갇히게 되면 잃는 것도 많아요. 그리고 책이란 것이 역사와 문화 전반을 다루다 보니 다양한 것에 호기심이 많으면 좀 더 즐길 수 있을 것 같고요.
지치고 않고 계속 작업을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즐겁게 사는 것(웃음). 지금 당장 만족스럽게 살지 않으면 10년 후라도 다를 것 같지 않거든요. 힘들고 지치는 상황에서도 장점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아요. 이왕이면 같이 작업하는 사람의 좋은 점을 많이 보려고 하고요. 어떤 일을 하든 큰 곳에서 일하든 홀로 작업하든 어디에나 갈등이 있고 문제점은 있거든요. 그러니 순간을 즐기면서 일하는 태도가 늘 필요해요. 그리고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이라고 생각하고 너무 몸을 혹사하면서 작업하기보다는 적당한 휴식과 계획을 통해 꾸준하게 해나가는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북 디자인도 트렌드가 있는 것 같은데 최근엔 어떤 흐름을 보이고 있나요?
늘 신선한 아이디어나 특이한 걸 찾지만, 책은 본연의 임무를 성실히 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것에 끌릴수록 기본에도 충실해야 하는데, 이점이 아직도 어려운 것 같고요. 제목이 잘 보이면서도 내용을 왜곡해서 담지 않고 완성도 있는 디자인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신선한 부분도 있어야 하기에 늘 어렵죠. 시기에 따라 표지에 캘리그래피, 일러스트, 사진 크게 한 컷, 이런 시기가 있었죠. 지금은 다각도로 실험해보는 시기예요. 출판사와 브랜드의 이미지를 디자인으로서 어떻게 차별성을 줄까 고민하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