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지순함. 감각적인 스킬이나 노하우 보다 그 태도, 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그것을 먼저 배우려는 사람. 안그라픽스 북 디자이너이자 패션 창작 그룹 CY CHOI의 영상 디자이너 안마노. 묘하게 끌리는 작업에 매료되어 그가 궁금했지만, 단정하고 바른 태도에 한 번 더 마음이 간다. 북 디자인을 '청소'에 비유하고 영상에서 느껴지는 '몽환'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만들어내는 디자이너 안마노의 이야기이다.
이름의 뜻
저희 아버지가 워낙 한글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서 저희 두 형제에게 한글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사실 제 이름에는 확연한 뜻이 없어요. 원래 ‘마루(높은 곳)’라고 지으려 하셨는데, 지인 분과 이야기를 나누시다 ‘마노’라는 이름이 툭 튀어나왔대요. 당시 생각하셨던 게 제가 나중에 커서 제 이름의 뜻을 저 스스로 찾기를 바라셨다고 해요. 아직은 그 뜻을 비워 놓고 있네요.
내가 소개하는 나는
안그라픽스 북 디자이너. 개인적으로는 영상 작업을 하고 있어요. 사실 나이로 보면 ‘청춘 디자이너’는 아닌데, 작업적인 부분을 보면 모자람이 많아서 배우고 고민하고 부딪히고 그러면서도 재미를 찾아가는, 답을 써 내려가는 학생 같은 디자이너예요.
요즘 최고의 관심사
책 디자인을 하고 있는데, 직원이 많지 않다 보니까 디자인 외 멀티 플레이어처럼 일하고 있어요. 책 제작 전반에서부터 계약에 관한 것까지요. 그런 걸 배우면서 하고 있고, 최근에 큰일은 CY CHOI 프로젝트의 다음 시즌 라인이 출시돼서 그 이미지 북 촬영이 있었고요, 저는 그걸로 영상을 만들 예정이에요. 이 일은 6개월에 한 번씩 돌아오네요.
CY CHOI 프로젝트 소개
최철용이라는 디자이너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활동한 이후, 2009년 한국에 들어와서 만든 패션 브랜드에요. 매 시즌 컬렉션에서는 단순히 옷만 선보이는 것이 아닌 영상과 사진을 비롯해 시각 이미지, 퍼포먼스와 텍스트 등 다양한 분야의 협업으로 ‘옷’을 새롭게 표현하고 있어요. 패션 창작 그룹이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그래픽 디자이너 김도형, 일러스트레이터 오정택, 포토그래퍼 김권진, 인더스트리얼 디자이너 최근식, 그리고 영상을 맡은 저까지 팀을 이루고 있지요. 저는 세 번째 시즌부터 우연한 기회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서당개 삼 년’이라고 저도 이분들 틈에 지내다 보니 정신적인 부분, 문제의식 같은 것에 동화되고 교감이 되죠. 좋은 재료로 작업하니 신선하기도 하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
대학교 졸업 작품인 ‘스캔’이라는 영상 작업이에요. 졸업 전시를 위해 단편적으로 고민했던 것이 아니라 4학년 초에 잡았던 주제를 연결해서 쭉 했던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저 혼자 완주했다는 느낌으로 했던 작업이었어요. 스캔하고 복사하면서 이미지를 읽을 때 흔들리는 경우가 있잖아요. 처음엔 그 이미지에 매력을 느껴서 영상으로 만들면 어떨까라는 호기심으로 출발했죠. 당시 기술적인 노하우가 부족해서 굉장히 품을 많이 들였던 기억이 있어요. 일일이 한 픽셀 간격으로 화면을 자르면서 시차를 두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오는 또 다른 영감이 있더라고요. 거기에서 다른 방향으로, 또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또 발전하는 것을 반복했어요. 나중엔 그 과정이 제 디자이너로서의 작업에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깨달았죠.
영상 작업에서 느껴지는 몽환적 느낌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나
그런 느낌을 내야지 하고 만든 적은 없어요. 그런데 작업하다 보면 항상 결과가 그렇게 나오니까 왜 그럴까 저도 궁금했는데, 제가 비흡연자여서가 아닐까라는 조금 엉뚱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흡연해서 환각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아티스트는 환각에 대한 어떤 영감이 있는 것 같아요. 불법이지만, 간혹 대마초를 접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저는 그걸 직접 하진 못하니까 환각에 대한 영감이라든지 이미지를 내면화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요. 음악도 몽환적인 일렉트로 장르를 좋아하는데, 집중해서 차분히 듣는 편이라 그런 것들이 내면화되어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북 디자인을 할 땐 어떤 느낌인가
이건 영상 작업이 주는 느낌과 아주 다른데요, 북 디자인은 ‘청소’에 가까운 느낌이에요. 아직은 날것의 원고를 책 형태로 차곡차곡 예쁘게 정돈하는 느낌이랄까. 그런 것에서 재미를 느껴요. 청소도 잘하는 청소가 있고 못하는 청소가 있잖아요. 북 디자인은 ‘잘하는 청소’가 아닐까 생각해요.
작업 스타일이나 습관
흑백에 관한 절대적인 믿음(?) 같은 것이 있어요. 그 명료함이 주는 매력에 끌려요. 흑백에서 우울함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지만 전 그것보단 감성적인 것을 느끼죠. 그리고 발상을 할 땐 걷는 버릇이 있어요. 음악 들으면서 걸으면 생각의 순환이 되는 건지 공상에 많이 빠지게 되는 것 같아요.
영감을 받는 작업 혹은 아티스트
아무래도 디자이너이신 아버지에게 받은 영향이 커요. 작업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까지요. 모든 것에 쏟는 지극한 정성. ‘지고지순’하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살면서 그런 태도가 힘들다는 것을 점점 더 느끼고 있어요. 그건 디자인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닌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의 문제이죠. 안그라픽스에서는 제 위에 상사로 계셨던 김승은 디자이너에게 많이 배웠어요. 멋을 부리지 않는 간결한 디자인. 굉장히 잘하셨죠. 그리고 CY CHOI의 디자이너분들. 독창적인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사는 것. 디자인하다 보면 주변 상황에 휩쓸리거나 타협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유지하는 자세를 많이 배우지요.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매력 혹은 생각
아직은 타이포그래피라는 단어가 어색해요. 제가 글자를 적극 부리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하지만 디자인의 기본이고 큰 부분이라는 생각은 해요. 학교 다닐 때 수업 시간 중 바탕체 세 글자씩을 50개 본 따서 그리는 과제가 있었어요. 너무 많아서 끝까지 하지는 못했지만, 그때 한글의 유려함을 몸으로 느낀 셈이죠. 그리고 같은 글자라도 어떤 사람이 쓰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이 나는 것도 좋아요. 글자의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그 사람을 닮아 가는 것. 제가 표현하는 타이포그래피는 최대한 장식을 배제하고 담백하고 명징하게 접근하려고 하죠. 개인적으로 나쁜 서체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걸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한 거니까요.
궁극적으로 어떤 목소리를 내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나
아직은 막연하지만, 60대 70대가 돼서도 내 작업을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과는 다른 작업일 수도 있죠. 영상이나 편집이 아닌 또 다른. 예를 들어 음식점을 차린다고 하더라도 ‘작업’이라는 마인드로 지고지순하게 한다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 무엇이든 계속 정성을 들이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올해 계획
7월 중순에 삼원페이퍼갤러리에서 열리는 신진 디자이너 연합 전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간의 작업을 모아서 안마노라는 디자이너를 알리고자 계획하고 있지요. 그리고 두 달 전에 아기가 태어났는데요, 백일잔치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어요. 거창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 가족끼리 간소하면서도 기억에 남을만한 파티를 하는 거예요. 물론 본업인 북 디자인은 계속할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