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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디자이너 정진열

    철학을 전공한 디자이너의 인문학적 디자인 사유(思惟)


    인터뷰. 인현진

    발행일. 2013년 06월 13일

    그래픽 디자이너 정진열

    그를 만나기 전에 그가 쓴 글을 먼저 읽었다. 철학을 전공한 인문학도답게 논리적이고 명쾌하다. 그러나 뼈아픈 사유가 드러나는 부분에선 감성적인 부분이 드러나기도 한다. '음악 혹은 문화평론을 할 줄 알았지 디자인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는 언젠가 자신의 블로그에 썼다. 27살에 시작한 디자인, 남들이 보기엔 한참 늦게 시작한 길일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그에겐 인생의 한 지점에서 망설이지 않고 가고 싶은 길을 선택했던 그때가 가장 빠른 결정을 내렸던 때가 아니었을까.

    디자이너면서 국민대 교수로 계시는데, 학생들을 가르칠 때 어떤 교육적 철학이 있으신가요?

    교수가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지금도 하나하나 배워간다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거창하고 깊이 있는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공부는 스스로 하는 거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어요. 그것을 위해서 교수나 교육 시스템의 역할은 정보를 주는 것을 넘어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동시에 알고 싶어하는 욕망, 그리고 그걸 찾아가려는 동기부여가 중요한 것 같아요. 스스로 욕심을 갖고 계속 연구하고 파헤치고 생각의 꼬리를 물어가는 근성이랄까, 어떤 주제든 이게 왜 이렇게 됐는지 물으면서 파고드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 자세만 학생들이 체득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언젠간 자기 답을 찾을 테니까요.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겠네요?

    그런데 학생들이 그걸 잘 안 하려고 해요. 어떤 면에선 애들이 너무 똑똑해서 문제죠. 시험 치는 방식에 익숙하다고나 할까.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하기보다 선생이 뭘 원할까, 어떤 것을 해가면 좋아할까를 우선으로 고민하는 버릇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버릇들을 깰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하는데 쉽지는 않네요.

    학생 입장에선 익숙하지 않아서 가이드라인을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답이 분명한 과정들을 거쳐온 학생들이 처음 입학해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고민과 질문들, 예를 들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얘길 하면 혼란스러워하죠. A가 들어가면 D가 답이라고 명쾌하게 분석하는 익숙한 방식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왜 A가 D가 되는지를 다시 검증하게 하니까 괴로워해요. 거기에 많은 양을 과제로 주니까(웃음). 사흘 밤 정도는 새보면서 엄청나게 연습과 다양한 시도들을 해봐야 새로운 관점이나 방법들이 튀어나오거든요. 근데 과제에만 너무 시달리는 것 같아서 최근에는 선생님들이 그 부담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수업을 해보고 있긴 해요.

    꼭 디자인이 아니더라도 어떤 분야든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작업을 했을 때 어느 순간 사고의 변화가 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브레인스토밍의 예를 들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보통은 최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고 거기에서 고르자, 이러잖아요. 그게 아니라 원래 브레인스토밍 방법론은 아이디어를 더 이상 낼 게 없고 생각도 멈춰버린 때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거든요. 머리가 포화상태가 되어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끝까지 밀고 가야지 그다음에 다른 접근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 브레인스토밍이에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던 지점을 넘어설 때까지 몰아붙이는 거죠. 그래서 어디까지 몰아붙이느냐가 굉장히 중요해요.

    ▶ [좌] with namjunepaik  [우] Routine, but antinomically slipped
    ▶ [좌] 이미지의 틈  [우] 신로오타케
    ▶ apap2010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디자이너다. 그의 목소리는 생각의 힘에서 나오고 그 생각의 힘의 뿌리는 인문학이다. 그는 디자이너란 누구이며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끝없이 고민하며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그렇기에 기능적 표현자를 넘어 작업의 처음과 끝, 그리고 메타텍스트까지 아우를 줄 아는 디렉터로서의 눈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분명 그의 강점이지만 태생적으로 타고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직관에 덧붙여진 후천적인 훈련으로 갈고 닦은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력이 좀 특이하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요.

    학부에선 철학을 전공했는데 문화 예술 쪽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다른 일을 많이 했어요. 음악평론도 하고 다큐멘터리 집단에서 영상촬영도 하고 인터넷 방송국에서 기획팀장을 맡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콘텐츠에 관심이 갔는데 최종적으로 귀결되는 지점이 디자인이더라고요. 처음에는 겁도 없이 나 그것도 할 수 있어! 그런 느낌으로 시작했죠(웃음). 친구 따라 국민대에 편입 시험을 봐서 3학년으로 들어왔어요. 학부부터 다시 한번 해보겠다는 마음이었죠. 재미있었어요. 졸업 후 프리랜서로 일도 하고 회사도 다니다가 전공을 공부했던 경험이 짧아서 아쉬운 마음에 유학을 갔어요.

    전공 백그라운드가 디자인이 아니라는 점이 강점이 될 때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면도 있고 덫이 되는 면도 있어요(웃음). 저는 전제조건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요. 텍스트적인 전제조건 같은 것들, 그러니까 이것이 이야기되려면 성립되어야 하는 조건이나 키워드를 가지고 놀면서 접근할 때가 많죠. 그러다 보니까 그걸 뒤지는 재미는 있는데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에선 아쉬운 점도 있어요. 아직 넘어야 할 산도 많아요.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가 있다면요?

    논문 주제로도 썼던 건데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또는 상황이나 맥락 속에서 인간의 개별성이 어떻게 거세되어 가는가, 혹은 어떻게 차별화시키는가 하는 문제엔 계속 관심이 가요. 서울에도 세븐일레븐과 스타벅스가 있고 일본이나 뉴욕에도 있잖아요. 서울이든 도쿄든 뉴욕이든 환경과 그에 따른 경험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하거든요. 어디에나 고유한 문화적 환경이 존재하고 지역적 특색이든 문화적 특색이든 그런 게 반영되어서 ‘나’라는 사람이 되고 한 지역이 공동체가 되는 건데 효율성의 원칙만 따라가다가 그 개별적 특이성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건 안타깝죠.

    그런 관심이 디자인 작업에서는 어떻게 반영이 되었을지 궁금하네요.

    좁게는 제 개인 작업, 혹은 전시 작품들을 통해서 반영되고 실무를 하는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아이덴티티라는 주제에 천착하는데, 그것과 연관성이 꽤 있는 편이에요. 그러니까 그래픽디자인에서는 어떤 특정한 이야기를 갖다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이게 꽤 중요한 문제잖아요? 차별성을 발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테스트해보죠. 단지 보이는 것에서만 끄집어내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주변 정보들, 사람이 살아가는 스타일, 소비하는 패턴, 다른 사람과 만나서 교류하는 방식 등 여러 가지를 대입해보면서 실험해보고 있어요.

    ▶ [좌] 이면의 도시 포스터  [우] 플랫폼인기무사 포스터
    ▶ Sarajevo, Home sweet home
    ▶ 전후 서울의 변화
    창조적 작업은 언제 시작되는가? 한계에 도달했다고 두 손 두 발 다 들고 싶을 때, 그때 비로소 진짜 작업이 시작된다. 생각의 틀이 깨지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튀어나오고 억눌렀던 감정이 풀리면서 깊은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것들이 솟아오른다. 죽을 것 같은 고통 너머 광대한 자유가 있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그러나 창조성이란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 본 사람만이 갖게 되는 '고유한 경험'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창조적 작업은 테크닉이나 스킬뿐만 아니라 강한 정신력도 필요한 일일 것 같아요.

    각오가 필요하죠. 그 순간은 개인적이긴 하지만. 양적으로 많이 다양하게 접근해보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겠죠. 리서치 많이 하고 그것을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하거나 텍스트의 전제조건을 몇 번이고 다시 살펴보거나. 저는 일반적인 구성을 해놓고 반대로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접근도 한번 해봐요. 안전한 라인 하나는 갖고 가지만 도로 들어가서 모로 나오는 것 말고도 모로 들어갔는데 걸이나 윷이 되는 다른 라인도 몇 개 만들고, 그 안에서 상호교집합도 찾아보죠.

    작업도 그렇고 쓰신 글도 읽어보면 디자이너로서 굉장히 본질적인 질문을 놓지 않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렇게 보이면 다행인데(웃음), 그런 질문들은 평생 가지고 갈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서 고민하며 살아야 하는 거고 그 고민이 없으면 끝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기술이 발전한 덕분에 디자인의 기능 자체가 다가 아니라 기능을 어떻게 핸들링할 것인가가 점차 중요해지거든요. 물론 기술이라는 부분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고 그를 약간 간과했던 지점으로부터 지금 장인적인 접근 태도가 다시금 부각되기는 하지만, 큰 흐름으로 보자면 기능을 어떤 가치관으로 구현할 것인가가 예전에 비해 좀 더 중요도가 높아졌다고 봐요.

    여러 분야에서 위기라는 말을 하는데 디자인 쪽은 어떤가요?

    디자인계도 위기를 겪고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종래의 매체적인 직업이 매체의 변화에 따라서 사라지기도 하고 전통적인 업무로만 본다면 점차 관련된 직종들이 사라지고 있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흔들리기 때문에 디자인이 관여할 수 있는 지점도 많아지거든요. 종래의 직종만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고 봐요.

    정해진 길로만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같아서 희망이 느껴지네요.

    저희 학생들한테도 졸업하고 꼭 디자인 안 해도 된다고 얘기해요. 즉, 종래의 전통적인 직종으로서의 디자이너의 직업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에요. 점차 디자이너에게는 단순한 기능적 역할 이상으로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다루어야 할 대상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체계화시키는 능력들이 요구돼요. 이런 능력들을 갖추고 있는 디자이너라면 디자인의 좀 더 다른 가능성, 나아가서 살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조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재미있게요. 저도 꽤나 좌충우돌 살아온 셈이지만 무엇이 될지 정해놓고 사는 것보다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계속 질문하면서 새로운 기회가 왔을 때 선택을 하고 책임을 져보는 것이 훨씬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볕
    ▶ [좌] 박진영 ‘way of photography’  [우] 사그마이스터전 도록
    ▶ The 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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