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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텍스트를 끊임없이 부술 것’ 디자이너 김병조

    “작업의 끝은 제작이 아니라 콘텍스트를 세우는 것. 다만, 제작 전까지 콘텍스트에 의존하지는 말 것.”


    인터뷰. 인현진

    발행일. 2013년 05월 31일

    ‘콘텍스트를 끊임없이 부술 것’ 디자이너 김병조

    심플하다. 유난히 선 몇 개로 이뤄진 작업들이 많다. 살과 피를 남기고 뼈만 남겨둔 듯 필요 없는 부분이 살뜰하게 제거된 느낌. 직선으로 가는 길을 안다면 굳이 곡선을 선택해 에두를 필요가 없다는 듯. 차가운가? 딱히 그런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연필이 떨어지는 것을 연속 동작으로 보는 것처럼 재미있고 때로는 장난스럽기까지 하다. 가볍나? 묵직하진 않지만 둥둥 뜰 정도로 가볍지도 않다. 쉽게 한 듯 보이지만 작업마다 레퍼런스를 달아둘 만큼 과정에도 충실하다.

    작업을 보면 맥락화에 익숙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소위 디자인계는 작품과 디자이너가 함께 소비되는 세계에요. 작품보다 콘텍스트의 힘이 클 때도 있죠. 작품을 제대로 본 적 없는데 말로 유명한 분들도 있잖아요. 타이포그래피 서울을 비롯한 여러 디자인 웹사이트, 비엔날레, 전시, 워크숍 등은 작품의 콘텍스트로 디자이너를 소비하게 하는 매체라고 볼 수 있어요. 이런 세계에 서식하는 저에게 말씀하신 ‘맥락화’는 작품 제작의 일부예요. 작업의 끝은 제작이 아니라 콘텍스트를 세우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주의점 두 가지. 제작 전까지 콘텍스트에 의존하지 말 것, 콘텍스트를 끊임없이 부술 것.

    타이포그래피에 대해선 어떤 관점을 갖고 계신가요?

    관점이라고 할 건 없고, 제 작품에 바라는 건 있죠. 시간을 이길 것. 저는 시간이 지나도 제 작품이 민망하지 않았으면 해요. 제가 대학에 다닐 땐 해체 타이포그래피가 유행했는데, 지금 보면 민망한 작품이 많아요. 그런 반성이 있기에 저는 어떤 흐름을 목격하고 그 흐름을 타고 싶은 욕구가 일어도 신중하게 움직이는 편이에요. 그리고 하나 더. 언어를 넘을 것.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도 제 작품을 소비할 수 있기를 원해요. 한국어와 한글을 잘 부리는 것과 한국어에 갇히는 건 다르거든요.

    특별히 출판 편집 일에 애착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편집 디자인에 특별한 애착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일에 비해 부담을 많이 느끼는 거죠. 개인 작업이 아니라, 누군가 오랜 시간 치밀하게 준비한 텍스트를 편집하고 디자인해서 많은 사람이 읽게 하는 일이니까요. 소소한 재미도 있어요. 글 편집이나 배열이 마음에 안 들면 조금씩 고치는 걸 재미있어했는데, 요즘은 편집자도 암묵적으로 허락해 주더라고요. 큰 권한을 주신 거죠(웃음).

    자신의 작업 스타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제 작품이 고전적이라고 말한 분도 있었고 학구적이라고 말한 분도 있었는데 저는 모르겠어요(웃음). 단순하다는 말은 자주 듣는데, 그런 걸 좋아해서가 아니라 아직 제 통제력이 부족해서 그래요.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제가 하려고 했던 건 굉장히 기초적인 거예요. 모든 요소의 제 형태와 위치를 찾아서 정확하게 말하기. 지금은 이것도 벅차요. 그래서 곧장 가는 길이 보이는데 굳이 어렵고 복잡하게 돌아가진 않아요.

    ▶ [좌] 30: 2002-2011  [우] /: “Midway upon the journey of our life”
    ▶ (왼쪽부터) From Text to Typography, “Wille”, 31: ding dong daeng dong ddaeng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 나뭇가지를 타고 뿌리에서부터 우듬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에서 벗어나지는 않지만 하나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고 또 다른 이야기로 뻗어 가서 어느새 훌쩍 새로운 화제로 넘어간다.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숨김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진짜 이야기는 행간 속에 숨겨놓은 책 같기도 하다.


    영향을 받으신 디자이너가 있으신가요?

    요스트 호훌리나 볼프강 바인가르트를 사숙했으나, 직접 곁에서 배운 건 안상수 선생님이죠. 안상수 선생님 밑에서 몇 년 동안 도제식으로 배웠으니까요. 무엇보다 선생님이 읽었던 책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제자는 스승의 책장을 보고 자라잖아요. 지금 제 책장은 선생님 책장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어요. 많은 걸 배웠죠. 그리고 저는 젊은 디자이너 안상수가 아니라 퇴임을 앞둔 안상수 선생님에게 배워서 더 좋았어요. 제가 앞으로 할 일, 선생님 나이가 되었을 때 저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었거든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살아요. 몇 년 뒤에 외국으로 이사할 생각은 있어요. 굳이 대한민국에 살 이유도 모르겠고, 어순이 다르고 존댓말이 없는 문화에서 살아보고 싶어서요. 잘 될지는 모르겠네요. 본격적인 활동은 빨라도 5~6년 뒤가 될 것 같아요. 지금은 활동량이 매우 적은데,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때쯤 활동량을 늘리는 게 적절한 것 같아요.

    디자인은 계속하실 건가요(웃음)?

    아마도. 이미 버린 눈이라(웃음). 아직 저 스스로 만족한 작업이 없어요. 만족스러운 작업을 하기 전에 그만둘 수 없어요. 디자인이 싫어져서 다른 일을 할 수는 있지만,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 정도로 멘탈이 약하진 않아요. 단, 인쇄 매체만 다룰 생각은 없어요. 사진, 영상, 설치 등 매체는 자유롭게 다루고 싶어요.

    하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요?

    방금 말씀드렸듯이 제가 만족하는 작업이요. 아쉽게도 아직 없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제 작품, 제가 했던 말, 제가 쓴 글, 강의록 등을 모아서 책 한 권을 만들면 좋겠어요. 아니, 그런 책을 만들 수 있게 살았으면 해요. 한 사람의 성장 과정을 차곡차곡 쌓은 두껍고 치밀한, 보존될 가치가 있는 책을 남기고 은퇴하길 원해요. 이건 대학생 때부터 했던 생각인데 지금도 작업할 때 이 작품이 그 책의 어디쯤 들어갈지 상상해요.

    ▶ 2009 Young Architect Award
    ▶ [좌] 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  [우]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연구논문집 글짜씨
    한 사람의 삶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맥상통하는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을까? 어디에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이미 그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마른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꽃이 피고 잎이 나서 녹음이 우거지며 변화하는 시간에도 나무는 여전히 나무이듯, 완성한 작업보다 아직 시도하지 않은 가능성이 훨씬 더 크게 남아 있는 그는 아무 수식을 붙이지 않은 채로, 디자이너다. 그리고 학생들이 만나면 틀림없이 도움이 될, 좋은 교육자이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강의는 어떤 식으로 하세요?

    표면적인 강의 목표는 타이포그래피 전문가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거지만, 실제 저의 목표는 학생들의 사고력과 미감을 높이는 거예요. 단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많이 알아도 사고력과 미감이 개선되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책을 열심히 읽어도 후지게 디자인하는 이유가 그거죠. 그런데 20년 넘게 산 사람의 사고력과 미감을 높이는 게 쉬울 리 없잖아요? 그래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죠. 단기간에 멋진 결과물을 만드는 건 신경 쓰지 않아요. 물론 늘 다른 강의 결과물보다 나았지만(웃음).

    엄격하게 가르치시는 편인가요?

    ‘엄격하게’보다 ‘솔직하게’에 가깝죠. 특히 고학년의 모의 실전 강의에선 학교 밖에서 남의 작품을 대하듯 가혹하게 비판하죠.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웃음). 조만간 저와 같은 업계에 종사할 사람이라면 그 정도 비판은 이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엄격하게 지키는 건 예절이에요. 학문이 직업인 학생이 그에 걸맞은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비난해요.

    강의 준비는 어떻게 하세요?

    강의록과 강의 자료를 준비하고 혼자 녹음 테스트를 해요. 눈으로 읽는 것과 말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그리고 실제 강의도 녹음해요. 지금까지 한 강의는 대부분 녹음했어요. 강의 당일 녹음 파일을 듣는데 굉장히 민망해요(웃음). 강의 녹음 파일을 들으면 학생 관점에서 제 강의를 평가하게 돼요. 그러면 빠지거나 왜곡된 부분, 저의 나쁜 버릇이 선명하게 드러나요. 이를 바탕으로 강의록과 강의 자료를 다시 고쳐요. 강의 준비는 이 과정의 무한 반복이에요.

    수업 때 디자인 말고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면요?

    좋은 독자가 되는 것. 책을 고르고 읽고 요약하고 폴더 정리하는 공부법을 강조하는 편이죠. 좋은 책을 고르고 제대로 읽을 줄 안다면 좋은 타이포그래피를 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편집 디자이너의 다른 모습은 좋은 독자라고 생각해요.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이 남이 읽을 책을 디자인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기술력. 학생들에게 디자인 프로그램의 고난도 기술을 다루길 요구해요. 기술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디자인을 안 하거나 남의 손을 빌려 디자인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요. 머리는 크고 손은 작은 디자이너 아닌 디자인 선생들. 기술을 알수록 디테일이 보이고 표현 범위도 넓어져요. 그래서 저는 학생들의 인디자인 파일을 직접 열어봐요.

    ▶ [좌] Hangeul Baejae, really? [우] 2003-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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