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사이에 서양에서 어떤 사상적 변혁이 일어났다고 회자한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관점이 난립하고, 한쪽에서는 여전히 논의 중이며, 어떤 이는 화가 났고, 다른 이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봐서는 ‘변혁을 일궜다’는 식으로 최근의 흐름을 단순하게 분석할 수 없다. 사회학, 문학에서 일찍이 단물 빠진 유행어가 된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후기구조주의와 같은 용어를 그래픽 디자인 분야가 차용하기 시작할 무렵, 지긋지긋한 모더니즘의 망령을 벗어 던진 당시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저항의 힘을 얻고자 지성을 갖추기를 열망했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미스터 키디 <좀비 모더니즘> 중
미스터 키디는 지금은 버젓이 하나의 유행처럼 자리 잡은 후기구조주의 그래픽 디자인을 퍼뜨리는 저항군이었다. 이 저항은 이성과 합리성으로 대표되는 20세기 디자인 가치관을 깨부수고자 정면으로 들이받는 일이었다. <지금, 우리의 그래픽 디자인>은 이러한 시대의 한가운데를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살아간 경험을 기록한 저술이다. 기성세대의 권위에 도전하는 젊음!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지 않는가. 맞서야 할 적이 있으므로 생각은 매섭고 필체는 날렵하다. 참고로 미스터 키디는 미국의 디자이너이자 글꼴 디자이너, 저술가, 교육자다. 본명은 제프리 키디, 1980년대 포스트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흐름을 주도한 크랜부룩 예술학교를 졸업한 제프리 키디는 1985년부터 지금까지 캘리포니아 예술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Cal Arts)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미스터 키디와 그의 동료들이 돌을 던진 기성세대, 즉 디자인 모더니스트가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급진적 성향을 표출하는 젊은 세력이었다는 점은 이 분야의 극심한 유동성을 시사한다.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모더니즘이 주류에서 벗어난 지는 오래됐다. 그렇다면 이를 대신할 사상이나 담론이 등장했는가? 또는, 그런 담론 따위 필요치 않은 것인가? 갈 길을 찾지 못하는 그래픽 디자인 학계의 연구와 뜨뜻미지근한 저술은 아무런 답도 내지 않는다. 혁신, 창의, 컨버전스, 도시브랜딩 등과 같이 듣기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유행어를 내뱉는 사람들은 디자인이 경제 회복의 열쇠라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내뱉는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연구하고 배우는 사람으로서, 산업 현장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사람으로서, 디자인을 관찰하고 논하는 우리는 디자인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디자인이 문화를 반영하고 재생산하는 중요한 행위라는 사실을 되도록 많은 사람이 인식하고 이를 지지해 주길 바란다. 만약 이런 바람이 진심이라면 우리는 디자인이라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그에 따른 결과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마땅하다. 작성한 지 20년이 지난 글을 담은 이 책은 특유의 신랄한 관점을 통해 묻는다. 그동안 어떤 발전을 이뤘느냐고, 2014년을 앞둔 지금 디자인 분야는 학문으로서 제 위치를 찾아가는 중이냐고.
역설적으로 디자이너는 뭔가를 디자인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정치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끔찍한 환경, 사회, 문화적 골칫거리를 디자인해서 세상에 내놓는 누군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고양이보호연대 홍보 포스터를 예쁘게 만들어서 약간의 좋은 효과를 낼 수는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진 못한다. 포스터에 쓰이는 글꼴이나 색깔이 다소 못났다고 한들 크게 잘못될 일은 없다. 그보다는 500페이지짜리 하드커버 잡지를 만들지 않는 것, 혹은, 하이에나 같은 기업에게 양의 탈을 씌워 어린아이들에게 배달하는 웹사이트를 만들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미스터 키디 <히스테리> , 글 출처: 스테파노 반델리
책 정보
지금, 우리의 그래픽 디자인: 미스터 키디 명문집
저자: 미스터 키디
역자: 이지원
출판사: 스테파노 반델리
출간일: 2013.11.1
가격: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