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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계’체 만든 디자이너 민본

    “깔끔하다, 세련됐다 같은 의견은 없었으면 합니다. 대신 ‘진심이구나’라는 반응은 아주 조금 기대합니다.”


    인터뷰. TS 편집팀

    발행일. 2014년 02월 07일

    ‘외계’체 만든 디자이너 민본

    '외계'라는 글자가 서울스퀘어 빌딩을 순간 장악했던 적이 있었다. '타이포잔치 2013' 전시 중 '무중력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시인 김경주의 시 <외계>를 타입 디자이너 민본이 미디어 캔버스를 통해 표현한 것. 이상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시와는 다른 매력으로, 이상하지만 웃음 짓게 하는 글자를 만든 사람. 민본을 만났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민본이라고 합니다. 일로는 지금부터 이야기를 나누면서 답할 기회가 더 있을 것 같고, 성격적인 것을 말씀드릴게요. 다소 이중 인격적인 성향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서 보통 착한 사람, 혹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상반된 얘기를 듣는 편이에요. 혹은 밝은 사람인 동시에 극도로 비관적인 사람이기도 하고요. (누구나 그런가요?) 따라서 이야기나 행동의 앞뒤가 안 맞는 경우가 있는데, 앞1-앞2와 뒤1-뒤2, 아니면 앞1-뒤2와 앞2-뒤1을 맞추어 보면 대개 말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미국 애플 본사에서 근무하시잖아요. 그곳에서 일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영국 레딩대학교라는 곳의 타이포그래피 학과에서 타입페이스 디자인 석사과정 중에 현재 폰트팀에서 학교로 인력 요청이 왔습니다. 회사 소개를 들어보니, 제가 평소에 관심 있던 다양한 언어가 뒤섞이는 타이포그래피의 접점이 바로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저 없이 지원하여 이 팀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앞으로의 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경험을 많이 하고 있다고 자족하고 있습니다.

    작년 타이포잔치 때 작업했던 <외계>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에요. 어떤 의미로 작업하신 건가요?

    가장 먼저 제 뇌리를 스친 것은 ‘타입 디자이너’의 아이덴티티를 조금이나마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했지요. 제가 참여했던 전시 ‘무중력 글쓰기’의 주제가 시인과의 협업이었는데, 시인이 말과 글을 통해 그림을 그린다면, 글자를 디자인하는 입장에서는 그 시인이 시 속에 그리려 했던 풍경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이미 시집의 인쇄 지면에 충분히 타이포그래피가 고려된 상황에서, 글자를 다루는 사람이 화면을 통해 무얼 할 수 있을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즉 시의 내용을 타이포그래피적으로 재해석(재현)한다기보다는, 동일 주제를 놓고 재료와 도구를 달리했을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고민한 거죠. 따라서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좇기보다는, 제가 평소에 하는 작업들과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하는 행위들을 이용해서 시의 주제를 뒤따라가려고 했고, 그 결과물이 <외계>라는 작품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외계>를 본 사람들 반응이 어땠나요?

    작업도 이곳에서 상영 화면을 상상하면서 했고, 전시 기간에도 제가 한창 바쁘던 시기라 직접 가보질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직접 보신 분들의 의견을 들을 기회도 별로 없었고요. 기대하건대, 깔끔하다거나, 딱 들어맞는다거나, 세련됐다거나 하는 의견은 없었으면 합니다. 대신 작품의 수준을 떠나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담았구나.’ 하는 반응은 아주 조금 기대하게 되죠. 제가 김경주 님의 시를 읽으면서 받았던 느낌은, ‘와! 이 분 진심으로 글 쓰셨구나!’였거든요. 굳이 기억나는 반응을 소개하자면, 부모님께서 비바람을 헤치고 서울역전에 가셔서 관람하신 후 (카카오톡을 통해) “이게 대체 뭐냐!”고 외치신 게 기억이 납니다. (내심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외계> 영상 보러 가기
    Tipometria 2010

    서체 회사에 근무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에스투디오 그루포 에레? 이름이 맞나요? 어떤 회사인지, 또 소속되어 있으면서 어떤 타입을 만드셨는지 궁금해요.

    네. Estudio Grupo Erre. 영어로 하면, R Group Studio쯤 되겠네요. R은 물론 오너이자 디자이너, 필사가인 리카르도 러셀롯(Ricardo Russelot)의 이니셜이고요, 그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예요. 또한, 서체 회사라기보다는 그래픽 디자인을 바탕으로 로고 타입과 약간의 스크립트 폰트들을 생산하는 회사였어요. 바르셀로나 대학교 석사과정 중에 학점을 인정해주는 일종의 인턴제도를 통해 이 회사에 한동안 몸담았는데요, 리카르도의 캘리그래피를 디지털화하는 프로젝트를 맡았었습니다. 손 글씨의 디지털화는 재미있는 작업이에요. 이미 존재하는 금속활자들을 배경 삼아서 새로운 디지털 활자를 디자인 하는 일과 다른 면이 요구되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손 글씨만이 가지는 더러움, 불 균질, 실수 등을 어느 선까지 정돈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 거의 매 순간 있었어요. 특히 펀치, 캐스터, 필름 등을 통해 만들어진 글자들이 가지는 ‘모듈’이라는 개념이 손 글씨에서는 다소 희박하여, 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했던 상황이 기억에 남아요. 이 타입은 리카르도 어머니의 성함을 따서 ‘클렐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요?

    작업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어떤 걸 골라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제게 기억은 아무래도 시간순이기 때문에 가장 최근에 진행했던 바르바리 한글-라틴알파벳 공용서체 제작이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레딩대학교 석사 과정에서 실제 타입페이스 제작 과정의 결과물이에요. 하나의 서체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해당 글자의 역사•문화적 전통을 이해하고 이를 반영하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이때 두 개의 글자체계를 위한 하나의 서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 글자가 가지는 전통을 이해한 후, 둘의 접점을 찾아 연결해야 해서 매우 까다롭죠. 제 경우에는 붓이라는 필기도구를 통일하여 가장 기초적인 콘셉트를 잡았지요. 붓이라는 필기구가 각 글자 문화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어요. 이 둘의 중간지점을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 바르바리 서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작업 스타일은 어떠세요?

    기획 단계에서 최대한 정성을 쏟고, 과정을 중요시하고…. 남들이 추천해주는 방식을 따라 하지 못해서 매번 몸이 고생이에요. 길을 걷거나 운전을 하거나, 의식 없는 행위를 반복하는 동안에 주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뇌가 둘로 나누어져서 한쪽은 도저히 100년 안에는 끝내지 못할 비현실적인 아이디어를 향해 치닫고, 한쪽은 마감일 이전에 끝내기 위해 아이디어를 깎아내는 작업이 병행됩니다. 솔직히 너무 고통스러워요. 이후 기한 내 완성을 위해 잘 깎여진 생각들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고요. 그리고 작업을 시작하는데, 아이디어는 다시 100년짜리로 뻗고, 현실적 난관들(작업 도구의 말썽, 시간문제, 각종 사건 사고)이 들이닥치고요. 이들과 싸우는 동안 마감일은 오고, 결국에 80% 정도의 성취만을 이룬 채 작업을 일단락 짓게 돼요. 반면에 80%밖에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는 경우에는 120%의 성취를 이루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20대 때 ‘80%100%120%’라는 블로그를 잠시 운영한 적도 있었어요. 100%를 계획해서 100%를 이루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궁금해서요. 그러나 그 해답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Clelia 2010
    Barbari Typeface 2013

    폰트에 대해,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어떤 생각, 어떤 고민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글자를 통해 무언가를 기록하고 보관하고 공유하는 행위는 인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역사도 길고 사람들의 의식,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된 행위 중 하나이지요. 그런 것을 일개 개인이 약간의 공부와 경험을 토대로 새로이 ‘디자인’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가끔은 인간의 오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요. 대신 ‘시청각 기술의 변화에 기존 글자를 적응시키는 것’, ‘문화적 교류가 증가함에 따라, 강한 지역성을 가진 글자를 보다 국제적으로 승화시키는 것’ 등은 우리가 모두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볼 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진보 중이라는 가정하에, 작은 단편이나마 우리의 현실에 대입하여 현 환경을 나아지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대개는 작업하는 것 같습니다.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이 작업을 사람들에게 공개해야 하는 경우에는 그 안에 담길 메시지를 가장 많이 고민해요. 하지만 솔직히 그저 메시지만 전달한다면 그건 유치원만 나와도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잘 갖추었는지 꼼꼼히 살피는 것이 제가 가장 잘 못하는 일 중 하나이고, 따라서 가장 중시하게 되는 거예요. 결론적으로는 그 메시지가 ‘조금 이상하지만, 웃음 짓게 만드는 것’이었으면 합니다.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있다면요?

    일단은 좋은 아빠가 되고 싶고요, 글자에 인생을 걸고 고민하는 세계의 타입 디자이너의 사회에서 한글을 배경으로 삼은 디자이너로서 조그마한 목소리를 보태고 싶은 마음이에요. 저는 한국적인 것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제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묻어 나오는 어떤 근원 같은 것들이 한국적이라는 사실에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한글을 원어민 이상으로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인데요, 이런 인간이 저도 모르게 뿜어내는 글자에 대한 감각과 생각들이 범국가적으로 소개되었으면 하는 꿈이 있어요. 대개는 그러기에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자괴감에 빠지지만, 만약 제가 능력이 부족하여 못다 한다면, 저보다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위해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도 자주 합니다. 진심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타이포 잔치처럼 한국 활동 계획이 혹시 있으신가요?

    직장을 미국에서 얻는 바람에 한국 활동에 제약이 많은 게 사실이에요.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지에 종종 글을 실을 기회가 있었고, 최근 타이포그래피 잡지 ‘히읗’을 통해 작업과 글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어요. 지금은 타이포그래피 서울과 인터뷰 중이고요…. 앞으로도 가능하다면 각종 국내 매체에 지속해서 글을 싣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만 있습니다. 이외에는, 글쎄요. 저를 찾아주시는 분들이 있을지요?

    Mould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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