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변했네.” 이런 말을 자주 하거나 듣지 않는가? 변했다는 말은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이는 인생에 있어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어르신들은 늘 “시간이 잘 간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는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무언가가 더는 없기 때문이다. 세월의 풍파를 다 겪으니 익숙한 경험만 남은 것.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경험은 떨림과 긴장을 안겨주지만 반복될수록 여유와 지루함이 생기는 것처럼. 이런 점은 우리가 항상 변화하고 도전할 이유가 된다. 비단 개인뿐 아니라 기업과 폰트시장도 마찬가지인데, 기업은 성장과 도약을 위해서 변화가 필요하다.
*이 기사는 윤디자인연구소 공식 블로그 ‘윤톡톡’에 포스팅한 글을 재구성한 것입니다.(원문 보러 가기)
지금부터 폰트시장에 불어온 변화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잠잠한 것 같은 국내의 폰트업계도 늘 지각변동이 있었다. 1980~90년대 처음 폰트 회사들이 하나둘 등장했을 때는 한글폰트의 종수가 적어 자회사 서체들이 주를 이뤘다. 이때만 해도 오래 쓸 수 있는 안정적인 폰트가 많았으나 2000년대에 웹 폰트와 모바일 폰트가 등장하며 꾸미기를 좋아하는 젊은 세대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시즌 이슈나 유행에 따라 화려하고 개성 있는 글자들이 여기저기 채워지기 시작했고 분야의 특성상 수명은 더 짧아지게 된다.
지는 해가 있으면 뜨는 해가 있다. 언젠가는 모든 게 바뀌는 것이 순환의 이치. 스마트폰 활성화와 SNS의 등장으로 당대 최고 인기를 누리던 웹 폰트와 모바일 폰트 시장이 현재는 소멸하거나 축소돼 전성기의 위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웹 폰트와 모바일 폰트의 활성화가 폰트업계의 1차 산업혁명(?)이었다면 2차는 최근 등장한 전용서체 콘텐츠이다.
전용서체란 커뮤니케이션 활동 전반에 걸쳐 문자정보를 통일된 스타일로 표현하기 위해 설정된 특정 서체를 말한다. 이는 통합된 브랜드 이미지를 확립하고 일반인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상징적 기능을 담당한다. 과거에는 기존 서체 중 특정한 서체를 자사용으로 선정해 사용하는 지정 서체가 주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신규로 개발한 전용서체를 통해 기업 이미지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강화하는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제작상의 비용을 감안하면 지정서체를 사용하거나 기존 서체를 수정해 전용서체로 사용하는 쪽이 유리하다. 하지만 타사와의 식별이나 기업의 개성적인 이미지를 어필하는 경우에는 독자적인 전용서체를 개발하는 쪽이 큰 강점이 될 것. 현재 기업, 단체, 신문사, 방송사, 지자체 등 분야를 막론하고 전용서체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더불어 한 가지 딜레마도 생겼다. 바로 개발이 완료된 서체를 개방(開放)할 것인가? 폐쇄(閉鎖)할 것인가?의 문제.
초기에 개방(배포)과 폐쇄(내부에서만 사용)의 두 가지 비중이 반반이었다면 지금은 무료배포 쪽을 더 선호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료배포를 하는 대표적인 이유는 무료공개를 통해 폰트를 알려 두루 쓰이게 할 수 있도록 하고, 기업의 사회환원 활동의 연장선으로 인식시키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긍정적인 이미지 창출도 가능하다. 그런데 개방을 하면 일반인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기업의 입장에서는 양날이 검이 될 수 있다. 개방은 폰트파일이 용도와 장소를 불문하고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우리 주변의 엉뚱한 곳에서 폰트를 만나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전용서체는 개발 방향이 해당 브랜드의 특징, 성격, 비전 등의 모티브를 담아 특징을 부각한 폰트이다. 그런데 이런 글씨가 아이덴티티없이 엉뚱한 곳에 마구 쓰인다면 개발 목적과 방향은 전혀 맞지 않게 된다. 애초 여러 사람에게 두루 쓰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개방이 정답. 최근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제작된 대한체나 네이버의 나눔 글꼴처럼 말이다. 만약 무료배포를 했는데 치킨집 전단지나 길가 현수막 등 여기저기 목적도 없이 쓰인다면 해당 폰트와 자회사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안타까운 일이 된다.
전용서체 개방이 답일지 폐쇄가 답일지에 대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과 대상에 따라, 사후관리에 의해 폰트는 화려한 주연이 될 수도, 이름없는 엑스트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 누구나 쓸 수 있도록 대중성을 우선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자사만 쓸 수 있도록 해 아이덴티티를 부각할 것인가? 이 두 가지 관점에서 무료배포에 대한 차이와 결정권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얼핏 포기에 두 가지 선택은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아주 중요하다. 폐쇄의 장점은 곧 개방의 단점이고, 개방의 장점은 곧 폐쇄의 단점이기 때문. 이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닌 ‘우선’의 문제이다. 제작된 특성과 목적, 사용될 환경 등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것. 한번 개방하면 폐쇄한다고 원래의 본질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중한 개인정보가 보안관리 소홀로 유출됐다고 해서 주민등록번호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폐쇄는 유출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면 언제든 개방할 기회가 한 번은 존재한다. 물론 끝까지 안 할 수도 있고. “남들이 하니까 우리도 무료 배포하자.”라는 식이 아니라 기업 내부에서 사용하다가 향후 배포로 전환하는 것도 절대 늦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껏 만들어진 전용서체를 보면 폐쇄적이지만 브랜드 이미지 상승 및 아이덴티티를 구축해나가는 폰트가 있는가 하면 폰트 유출로 네티즌에 의해 막무가내로 사용되는 폰트도 존재한다. 계열사 및 협력사가 많은 단체 및 기업일수록 폰트유출에 주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전용서체는 만든다고 끝이 아니라 철저한 관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체 글꼴이 지닌 잠재력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용하느냐에 따라 글꼴 마케팅의 성공 여부도 판가름나게 되니까. 특히 전용 서체는 기업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고객과 가장 가까이에서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게 해주는 특효약이지만 한 번 잘못 복용하면 되돌릴 수 없는 맹독으로 전락해버리는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