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뷀트포메트(Weltformat)〉는 스위스의 젊은 그래픽디자이너들이 기획, 운영하는 포스터 전시다. 2009년부터 시작된 이 연례 행사는 초기엔 루체른을 비롯한 스위스 전역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러다 점차 독일 베를린, 일본 도쿄, 러시아 모스크바, 중국 상하이 등지로 개최지를 확장했다. 올해는 〈뷀트포메트 코리아〉란 타이틀과 함께 서울에 전시를 펼쳤다. 1인 스튜디오 N&Co를 운영하는 디자이너 박경식, 디자인스튜디오 MYKC 대표 김기문·김용찬이 한국 전시의 기획을 맡았다. 노원구에 자리한 복합문화공간 ‘플랫폼창동61’에는 2월 22일부터 3월 22일까지 74점의 포스터들이 전시됐다. 주제는 ‘관광 포스터의 재조명(Rethinking Tourism Posters)’이었다. 김가든, MYKC, 크리스 로(Chris Ro) 등 국내 디자이너 및 디자인스튜디오 23팀(26점), 뷀트포메트 공동 창설자이자 그래픽디자이너인 에리히 브레흐뷜(Erich Brechbühl), 지난 2014년 윤디자인그룹 갤러리에서 열린 〈101 스위스 모던 포스터 콜렉션〉에 참여하기도 했던 마티아스 호프만(Matthias Hofmann) 등 스위스 출신 작가 24팀(24점)은 ‘관광지’라는 소재를 포스터 안에 담았다. 이 밖에도 국내 12명, 스위스 11명의 학생 작품 24점도 선을 보였다.
2003년부터 스위스 루체른 현지의 그래픽디자이너 몇몇은 〈100 Best Posters – Germany Austria Switzerland〉라는 일종의 독일어권 포스터 디자인 대회를 진행해오고 있다. 에리히 브레흐뷜은 2009년에 이 프로젝트의 집행위원이 됐는데, 당시 멤버들과 함께 〈뷀트포메트〉를 기획했다고 한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초기의 〈뷀트포메트〉는 루체른 중심의 소규모 로컬 이벤트 성격이 강했다. 참여작가 또한 이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다 점차 다국적 디자이너들과 교유하는 지금과 같은 전시 및 포럼 형태로 발전했다.
에리히 브레흐뷜은 2016년 『LIGATURE』라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풍부한 그래픽디자인 문화를 갖고 있는 만큼, 우리 스위스 디자인계는 반드시 다른 나라의 디자이너들을 만나고, 또한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연례 교류의 장을 가졌으면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설명은 〈뷀트포메트 코리아〉 리플릿에 밝힌 “결코 없어지지 않을 포스터라는 매체를 더 깊이 탐구”한다는 방법론과 “(포스터의) 시각매체로서의 가능성을 시험해봄으로써 시각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자 한다”는 지향점으로 부연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 전시는 포스터‘로써’가 아닌, 포스터‘로서’를 고민해보는 자리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이러한 〈뷀트포메트〉의 기획 의도는 이번 한국 전시에서 두 가지 측면을 통해 퍽 선명히 전달됐다. 그둘을 짧은 열쇳말로 축약해본다면, 우선 그 첫 번째는 ‘보기’다. 이와 관련해 가장 인상적이었던―어쩌면 전시 자체보다 좀 더 이 전시의 방향성을 명확히 파악하도록 해주었던 것은 전시 부대행사 중 하나인 세미나였다.
토요일 한나절 동안, 정확히는 3월 4일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이뤄진 이 세미나의 타이틀은 ‘뷀트 토크 디자인 세미나’였다. 기자가 생각하기에 ‘뷀트 디자인 토크 세미나’가 아니라 ‘뷀트 토크 디자인 세미나’인 데에는 의도가 있을 듯싶었다. ‘토크’를 ‘디자인’이 아닌 ‘뷀트(Welt, 독일어로 ‘세상’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뒤에 배치한 점이 흥미로웠던 것이다. ‘세상을 이야기하는 디자인 세미나’로 읽히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타이틀에 대한 이런 독해(혹은 오독)는 세미나 내용과도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4명의 그래픽디자이너[강구룡, 강주현, 에리히 브레흐뷜, 안나 하스(Anna Haas)]와 1명의 디자인 저술가(전가경)는 각기 다른 강연 토픽을 들고 나왔지만 그 펼침새는 ‘포스터-보기’에 관한 것이었다. 이때의 ‘보기’는 게시(부착)된―poster의 어원인 postis(고정된 것)로서의―포스터만을 줌인하는 매크로가 아닌, 포스터의 놓임새와 그 놓임자리의 전경, 즉 세상을 프레이밍하는 광각의 관점에 가까웠다.
강구룡은 아돌프 무롱 카상드르의 1929년작 포스터가 부착된 2000년대 일본 긴자 거리의 풍경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193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해외 포스터들 중 자신이 가장 아낀다는 작품들을 선별해 보여주었는데, 각 포스터에 대한 조형적 분석을 덧붙이기보다는 해당 작업들이 제작됐던 시기의 분위기와 문화를 짚어갔다. 포스터가 시대를 관통하며 어떻게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는지를 리뷰해보는 강연이었다. 이를테면 〈Bob Dylan〉(밀튼 글레이저, 1967) 포스터에 나타난 사이키델릭한 이미지를 통해 60~70년대 미국 젊은 층들의 시대 반항적 정서와 혼돈을 읽고, 〈Public Theater〉(폴라 셰어, 1995) 포스터가 어째서 가장 뉴욕적인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는지를 해설하는 식이었다.
30대 중반의 강주현은 바젤디자인학교 유학 시절, 1960년대 스위스 타이포그래피 스타일을 좇던 자신을 “바깥 사람”이라 칭했다. 또 그는 “60년 전의 흔적과 현재의 잔여물을 내 속에서 적절이 섞는 중”이라고도 했다. 자국의 전형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현재의 스위스 ‘안’에서, 유학생인 ‘바깥 사람’이 그 ‘안’과 대척되는 과거라는 ‘밖’을 보게 되는 셈이다. 그의 강연 타이틀은 ‘바깥 사람이 안에서 밖을 들여다보기’였는데, 밖을 ‘내다보기’가 아니라 ‘들여다보기’라는 점에서 (강연 내용과는 무관할지언정) 포스터를 만드는 디자이너의 태도를 짐작해보게 했다. 포스터 디자인 의뢰를 받았을 때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가 속한 문화의 ‘바깥 사람’이다. 이런 디자이너는 (작업 기간 동안) 클라이언트의 세계와 문화를 학습하고 그 안에 머문다. 그러면서 자신의 포스터가 보여질 ‘밖’을 들여다보며 디자인의 방법을 고민하는….
에리히 브레흐뷜과 안나 하스의 강연은 〈뷀트포메트〉 기획위원들이 포스터를 단순히 디자인적 산물이 아닌 문화 층위의 일부로 보(려)는 관점을 기본적으로 공유하고 있음을 보다 선명히 밝혀주었다. 안나 하스는 동아시아의 60갑자 문화를 소재로 작업한 12간지 포스터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는 〈뷀트포메트〉가 단지 ‘디자인’으로서뿐 아니라 다층적 문화의 모티프로서 포스터를 대하고 있음을 방증해주는 듯했다. 에리히 브레흐뷜이 소개한 초기 〈뷀트포메트〉 3개 프로젝트 또한, 포스터를 문화 모티프로서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주었다. 이 세 프로젝트는 루체른 지역 내 폐쇄됐거나 공터나 다름없는 건물 세 곳―유스호스텔이었던 트라이브하우스(Treibhaus), 도축장이었던 슈드폴(Südpol), 수영장이었던 노이바드(Neubad)에서 진행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마치 문화가 지워져가는 곳에 디자인(포스터)이 입혀짐으로써 생성될 수 있는 변화를 실험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 번째 열쇳말은 ‘이미지성’이다. 앞서 4명의 디자이너들을 통해 설명된 ‘보기’ 측면과도 이어지는 맥락일 것이다. 〈뷀트포메트 코리아〉 출품작 74편은 공통적으로 일러스트레이션적 요소를 부각하고 있었다. 주지해볼 만한 점은 이 같은 이미지성의 발현이 한글, 한자, 알파벳 등 문자의 적극적인 운용을 통해 이루어진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명동굴〉(조중현), 〈동명항〉(스튜디오 호호호), 〈서울 강남〉(강구룡), 〈ANDERMATT〉[‘안데르마트’, 뷰로컬렉티브(Bureau Collective)], 〈Hoch-Ybrig〉[‘호흐-이브릭’, 캐스퍼-플로리오(Kasper-Florio)] 등이 그러한 작품들에 속한다. 문자 자체를 이미지적 오브제로 차용한 듯한 이 같은 작업들은,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의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도 두드러지는 경향이다.
예시로 든 작품들 중 〈동명항〉은 속초 바다의 방파제 위에 거울 재질의 3D 구조물 같은 ‘好’(호)를 앉혀놓은 모양새다. 작업자의 코멘터리가 궁금해지는 대목인데, 〈뷀트포메트 코리아〉 오프닝 행사에서 그 일부를 들을 수 있었다. 〈동명항〉 작업 뒷이야기를 전한 스튜디오 호호호 소속 디자이너 알파는 “정사각형 안에 가장 꽉 차 보일 수 있는, 면적을 거의 낭비하지 않고 가독성을 높일 수 있는 好자를 만들었다”, “좋을 호(好)에 좋은 풍경을 담는다는 의미로 거울이라는 재질을 택했다” 등의 설명도 덧붙였다. 포스터의 기획 및 제작 단계부터 이미 문자 자체를 중핵의 이미지 요소로 염두에 두었고, 그에 따라 특정 재료 구입까지 진행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이미지성’, 구체적으로 ‘문자의 이미지성’에 대해서는 ‘뷀트 토크 디자인 세미나’ 중 전가경의 강연 내용을 참고해보면 좋을 것이다. 그는 몇 해 전 「타이포그래피의 새로운 목소리: 2010년 이후 한글 타이포그래피 포스터」라는 글을 통해 포스터에서 한글 문자가 이미지적 요소로서 두드러지는 현상을 주목한 바 있다. 이 글은 2010년 이후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특징을 한글의 “전면화와 이미지화”로 명명하며, “왜곡과 비틀기”, “한글 자소의 해체 혹은 풀어쓰기”, “한글 레터링”, “비규범적인 서체의 사용”과 같은 범주로 세분화했다. 전가경의 이번 강연은 이 글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그는 마생(Robert Massin)의 『Letter and Image』(1970)에 수록된 방대한 ‘이미지적’ 문자 자료, 동양의 문자도(文字圖) 등을 예로 들며 이미 오래전부터 인류의 문자 다루기 안에 ‘이미지성’의 시선이 녹아 있었고 여전히 그 흐름이 이어지는 중이라고 개론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이후 문자 자체가 경제성을 띠게 되면서 문자를 중심으로 유희성과 이미지를 만들어내던 전통이 비제도권적 영역에 속하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문자를 이용한) 효율적인 소통이 필요하지 않는 맥락에서는 계속 유지되고 지속돼왔다”라는 것이다.
‘뷀트 토크 디자인 세미나’는 객석의 사진 촬영이 자유로웠기에, 화면 속 시각자료를 스마트폰에 담으려는 셔터음이 끊이지 않았다. 전가경의 강연 때 특히 잦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한글 문자 운용으로써 표현된 공감각적 이미지성, 즉 구술성에 대해 언급했는데, 예시작으로 소개한 포스터들―〈오리온 극장〉(김보휘, 2016), 〈짜친다〉(정새우, 2015) 등이 그런 셔터음들의 피사체였다. 물론, 세미나 참석자들이 포착한 건 ‘이미지성(시각자료)’뿐 아니라 ‘구술성(강연)’도 포함될 것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막스 갈로(Max Gallo)는 『The Poster in History』(2002)에서 “빼어난 시각성을 가진 형태로, 포스터는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정치적 관점을 인식하게 하며, 특정 행사에 대한 참석을 유인할 뿐 아니라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유도하기까지 한다”라고 썼다. 포스터는 거칠게 말하면 2차원의 규격화된 지면일 텐데, 이것이 정보 전달, 프로파간다, 캠페인 등의 목적성을 통해, 그리고 포스터를 보는 사람의 인식작용을 거치며 입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 점을 상기해볼 때, 〈뷀트포메트〉와 이번 〈뷀트포메트 코리아〉의 열림새는 포스터‘로써’ 표현되는 수단적·디자인적 일면 너머의, 문화 모티프‘로서’ 포스터의 다면으로 향해 있다. 이는 충분히 다시 보기 되고 논의될 만한 것이 아닐까.
* 〈뷀트포메트 코리아〉 전시리뷰는 계간 『the T』 2017년 봄호(통권 제10호, 혁신2호)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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