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집어내기의 방식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EverydayPractice, 권준호·김경철·김어진)이 첫 단독전시를 열었다. 2011년에서 2016년 사이에 작업했던 작품 70여 점을 모았다. 전시명은 〈운동의 방식(Ways of Practice)〉이다. 4월 10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창천동 탈영역우정국에서 관람객들을 만났다.
두 개 층 건물 1층은 포스터, 사진, 설치, 웹 작업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①〈Life: 탈북 여성의 삶〉(2011/2017), ②〈끝나지 않은, 강정: 너와 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2014), ③〈나랑 상관 없잖아〉(2013), ④〈그런 배를 탔다는 이유로 죽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2014), ⑤〈텍스트-이미지 변환 장치〉(2014), ⑥〈기지도 못하는데 날려고 기교를 부리는 것은 금물이다〉(2015), ⑦〈살려야 한다〉(2016), ⑧〈서울살이: LIFE IN SEOUL〉(2016), ⑨〈NIX.XXX〉(2016), ⑩『GRAPHIC』 제36호 ‘전단실천’(2015. 3)에 수록됐던 4개 포스터, 프로젝트 ⑪‘답변서’(2015)의 2개 포스터 등이 전시됐다.
관람객이 직접 작동시키는 것(①, ⑤)과 응시하는 것(②~④, ⑥~⑪)으로 구성된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글자’로써 작동되고 응시-독해되는 모습이었다. 이때 글자는 ‘사용된 것’ 또는 ‘쓰여진 것’으로 읽히기보다 ‘끄집어내진 것’처럼 보였다.
작품 ①의 경우, 수용소와 고문기계를 형상화한 약 3미터 높이의 목조 구조물이다. 기어를 돌리면 사면체 나무 기둥 13개가 동시에 회전한다. 각 면마다에는 한 줄씩 글자들(문장)이 있다. 탈북 여성의 증언을 기반으로 작성된 것이다. 관람객은 기어를 돌리는 동안 열세 줄짜리 글 네 편을 읽게 된다. 손과 팔을 움직여 ‘이면’의 글자들을 연속적으로 끄집어내 읽는 구조다.
작품 ②는 제주 강정마을 주민 다섯 명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있다. 2007년 제주해군기지(2016년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라는 이름으로 준공) 건설 결정 후에도 계속 강정을 지키며 살던 이들이다. 그림자 진 다섯 얼굴 위로 ‘너와’, ‘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글자(의 형태를 띤 빛―도록의 설명을 인용하면 “스텐실 종이에 빛”)가 일렁인다. 얼굴이 스스로 발하는 글자(빛)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끄집어내진 ‘너와 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가 드리워진 모습이다.
끄집어내진 글자는 활자로뿐 아니라 각종 일상의 재료들로 짜이고 조립되어 있기도 했다. 작품 ④(철재 펜스와 리본), ⑥(자작나무, MDF, 레이저 커팅), ⑦(각목)처럼 말이다. 2층 전시장에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3미터 이상 높이의 파이프 설치 작품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또한 그렇다. 이 네 작품은 몸체 자체가 한 문장이어서, 바라봄이 곧 읽음의 행위가 된다. 읽음/읽힘을 전제로 한 바라봄의 태도로 작품을 대해달라는 직접적인 호소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 호소가 퍽 설득력을 가졌던 이유는, 네 작품의 네 문장이 모두 누군가의 말 혹은 글이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한글 디자이너, 전 대통령, 시인이 남겼던 많은 말과 글 중에서 끄집어내진 ‘단 하나의 인용문’들은, 출처와 시기는 다르나 저마다 ‘지금’이라는 페이지 안에서 첫 문장이 될 만한 것들이었다.
김수영의 시구가 창천동 아파트촌을 배경으로 서 있던 2층(탈영역우정국의 옥상이기도 하다)에도 전시장이 마련돼 있었다. 일상의실천이 작업한 각종 인쇄물들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1층의 작품들이 가만히 서서 보거나 손으로 작동시켜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면, 2층에는 펼쳐보는 작품들(책, 잡지, 브로셔 등)이 많았다. 2층의 작품들은 ‘작업의 방식(Ways of Works)’이라는 타이틀로 소개돼 있었다.
방 3개 구조인 공간에는 널찍한 소파도 있어서 관람객들은 앉거나 짐을 내려놓기도 했다. 전시장 바깥에서 (전시조명이 아닌) 자연광을 받으며 사진을 찍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작품과 전시공간 분위기가 층별로 조금 달랐다는 걸 뒤늦게 느낀다. 물론 전 층의 테마는 ‘운동’이겠는데, 1층은 ‘실천’, 2층은 ‘일상’에 더 닿아 있었던 듯싶다.
전시 도록에는 일상의실천 세 디자이너의 대담도 실려 있다. 자체 프로젝트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김어진은 이렇게 자평했다.
“(전략) 우리 작업이 평면에서 점점 입체로 진화됐었던 느낌으로 본다면 김수영 작업[〈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2016)]도 어떻게 보면 현재형으로서의 ‘정점’에 다가서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 (중략) 그 완전한 평면의 작업에서, 점점 목재를 쓰고 쇠를 쓰고 3D 설계를 하고, 여기까지 진화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싶어.”
〈운동의 방식〉 전시 도록 중
작가는 평면에서 입체로 “진화”했다고 말했는데, 관람객으로서 느낀 인상은 평면에 있던 무언가가 입체의 공간으로 끄집어내졌다는 것이었다. 이때 ‘평면에 있던 무언가’는 대개 말과 글이었다. 이것들은 사진 속의 빛, 설치물, 작동형 구조물, 웹 등의 모습으로 끄집어내져 있었다.
끄집어내기는 ‘끄집기’와 ‘내기’의 과정이다. 일상의실천과 〈운동의 방식〉을 ‘일상-운동-끄집기’와 ‘실천-방식-내기’로 재배열한다면, 일상의실천의 ‘실천’과 〈운동의 방식〉의 ‘방식’ 모두 영어로 ‘Practice’를 쓴 점도 설명이 될 것 같은데 어떨까.
관련 정보
일상의실천 홈페이지
탈영역우정국 홈페이지
〈운동의 방식〉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