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니커즈 언박스드 서울(Sneakers Unboxed Seoul)〉(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1·2관, 2023년 5월 31일 ~ 9월 10일)은 나이키, 뉴발란스, 리복, 반스, 아디다스 등 다양한 브랜드의 스니커즈 약 800켤레로 채워진 전시다. 전시품 중 하나인 나이키 ‘에어 조던’의 한 모델은 8,000만 원 가치를 갖는다고 한다. 나이키 임직원 몇 명을 위해 제작된 비매품이 리셀 시장에 풀려 거래되면서 그만 한 가격이 책정된 것이다.
국내 한 뮤지션은 손수 크리스털 비즈(beads)로 장식한 자신의 나이키 ‘에어 포스 원’을 전시품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사람의 핏방울을 부어 만든 모델이 있는가 하면, 중동의 성지 요르단강에서 길어 온 물을 첨가한 한정판 모델[제품명 또한 ‘지저스(Jesus)’다] 등 〈스니커즈 언박스드 서울〉은 그야말로 인간계를 넘어선 온갖 진귀한 스니커즈 컬렉션으로 가득하다.
‘스니커즈든 뭐든 그냥 다 신발 아냐?’ 주의자의 전시 관람
『타이포그래피 서울』(TS) 에디터는 친한 그래픽 디자이너의 추천으로 이 전시를 관람했다. 삼십 대 초반 여성인 그 디자이너는 꾸준한 리셀 거래로 품절 또는 한정판 스니커즈를 손에 넣고야 마는 열성적 컬렉터는 아니다. 여윳돈 생길 때 10~20만 원대 ‘신상’을 이따금 사는 정도의 소비자다. 이렇게 모은 스니커즈가 스무 켤레쯤 된다고 한다.
스니커즈는 신발이다. 이 명제는 스니커즈라 불리는 신발—밑창이 고무로 된, 그래서 구두처럼 또각거리지 않는, 소리 없이 가만가만(sneak) 편한 착화감을 주는 신발—의 본래적 용도, 태생적 특질을 상기시킨다. 그 어떤 문화적·사회적·유희적 함의를 부여하든, 아무리 어셈블리지 내지 오브제로서 바라보고 다룬다 해도, 좌우지간 스니커즈는 땅을 딛고 서거나 걸을 때 발에 신는 물건, 즉 신발이다.
관점이 이렇다 보니 TS 에디터는 이른바 ‘스니커즈 문화’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공감하기 어려웠다, 라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상대의 이런 성향을 익히 알았음에도 디자이너는 틈만 나면 이 전시에 관하여 얘기했다. 그럼에도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다가, 아래의 펀치 라인(!)을 계기로 결국 관람을 결정했다.
“스니커즈라는 게 ‘그냥 신발’이 아니라니까. 님도 피규어 모으잖아. 다 큰 어른이. 가지고 놀려고 사는 건 아니지? 설마⋯ 그런 거?”
디자이너의 지적대로 TS 에디터는 피규어를 수집한다. 중고 거래로 30만 원 주고 들여온 로봇도 있다. 재산이 넘쳐 흐르듯 많아지면 천만 원대 프리미엄급 피규어를 살 용의도 충만하다. 스니커즈가 일단은 신발이듯 피규어는 기본적으로 장난감이다. 신발을 모으든 장난감을 모으든 어쩌면 수집가로서 두 부류는 동질의 시선 또는 세계관을 지녔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지점까지 마음이 동했고, 디자이너가 의기양양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스마트폰으로 관람권 예매를 했다.
스니커즈 문화와 ‘거리 두기의 파토스’
〈스니커즈 언박스드 서울〉은 [스타일], [퍼포먼스], [지속 가능성], [서울] 등 네 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세 개는 스니커즈의 디자인·기능성·친환경 측면을 각종 도표와 기록 사진, 영상 자료 등과 함께 살펴보는 구간이다. 마지막 섹션은 ‘한국 스니커즈 문화’ 특별관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섹션을 순서대로 천천히 둘러보고, 역순으로 다시 한 번 관람하는 내내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전시가 표방하는 스니커즈 문화라는 주제에 이르는 길을 못 찾은 탓이다. 그래서 스니커즈 문화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왜 생겨난 겁니까, 이제 어디로 향합니까,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스니커즈 언박스드 서울〉 총괄 기획은 유튜브 채널 ‘와디의 신발장’을 운영하는 고영대가 맡았다. TS 에디터는 라이선스 패션지 『에스콰이어』의 기명 칼럼으로 그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스니커즈 전문 유튜버 와디로 소개된 그는 스니커즈 문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스니커즈 리셀 문화’에 대하여 썼다. 해당 현장에 있어본 사람만이 서술 가능할 생생한 사례들과 그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 논지가 인상적이었다. 수집가로서 스니커즈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비판적 시각까지 고르게 담은 글이었다.
‘스니커즈는 신발이다’ 주의자였던 TS 에디터는 전시장의 다종다양한 희귀 컬렉션들을 목도하면서도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스니커즈 언박스드 서울〉은 와디 고영대의 칼럼이 그랬던 것과 같은, 그러니까 ‘스니커즈 문화 커뮤니케이터’로서 일반 대중과 폭넓게 소통하려는 취지의 행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특정 관객을 확실하게 겨냥한 전시로 여겨졌다. TS 에디터처럼 ‘그냥 신발이잖아. 뭐가 특별하다는 건데?’라고 말하는 일종의 파티 푸퍼(party-pooper)들에게 오랜 시간 ‘유별난 사람들’로 오인 받아 왔을 모든 애호가들을 위무하기 위해 조성된 시공간이랄까.
전시장을 나오며 떠올린 인물은 뜬금없게도 니체였다. 말기의 저작 『도덕의 계보』(1887)에서 니체는 ‘거리 두기의 파토스’라는 개념을 주창했다. ‘남들과 다르고자 하는 소수자들의 열정’을 이르는 말이다.
‘좋음’이라는 판단은 (⋯)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좋다고, 즉 제일급으로 느끼고 평가하는 고귀한 사람, 강한 사람, 드높은 사람들, 높은 뜻을 지닌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에서 가치를 창조하고 가치의 이름을 새기는 권리를 비로소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선악의 저편 · 도덕의 계보』(책세상, 2002), 프리드리히 니체, 353·354쪽
거리 두기의 파토스 개념이 스니커즈 문화를 이해하는 데 과연 합당한 기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스니커즈 ‘알못’인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는 19세기 철학자가 만들어둔 생각의 교량을 횡단함으로써 〈스니커즈 언박스드 서울〉이라는 낯선 전시와 얼마간 친숙해질 수 있었다. 또한 TS 에디터의 피규어 수집 행위에 대한 자체적 격상도 이루어졌다.
그저 신발이었을 뿐인 스니커즈는 어느 틈엔가 그 기능적 쓸모를 초월했고, 그 결과 거리 두기의 파토스를 창조했다. 이 모든 걸 가능케 한 주체는 물론 스니커즈를 애호하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좋다고 (⋯) 느끼고 평가하는” 대중의 애력(愛力)이었을 테고, 이 힘으로 그들은 스니커즈의 “가치를 창조하고 가치의 이름을 새기는 권리”를 열정적으로 행사하게 된 것이다. ⋯⋯라고 〈스니커즈 언박스드 서울〉을 추천한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말해줄 참이다.
‘거리 두기의 파토스’에 근거할 때 일의적 가치를 획득한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맨 오른쪽 사진은 TS 에디터가 소장 중인 피규어들 중 고가의 4종만 모아본 것)
〈스니커즈 언박스드 서울〉 관람 전후 읽어 보면 좋을 글 — 「전설적인 스니커즈 한 자리에⋯〈스니커즈 언박스드 서울〉展, 31일 서울 세종미술관에서 개최」, 매일일보(2023. 5. 31.) — 「스니커즈가 파생상품이 된 시대」, 와디(고영대), 『에스콰이어』(2023. 5.) — 「신지도 않을 신발을 500켤레나 산 이유」, 동아일보(2023. 5. 19.) — 「멜랑콜리와 철학상담: 거리의 파토스」, 김동규,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스튜디오(2022.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