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 코끼리 만지듯’이란 표현이 있다. 부분만 보고 전체를 알지 못함을 가리킨다. ‘장님 코끼리 말하듯’이란 표현도 있다. ‘말한다’라는 외적 행위를 취한다는 점에서 여기서의 ‘장님’은 뭔가 좀 더 우매하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한편으로 이는 ‘잘 모르면 잠자코 있어야지’, 주제넘게 나서는 자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이의 피로감과 탐탁지 않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기도 하다.
여섯 장님과 코끼리 우화에 관련된 관용어구는 ‘본다는 것'(seeing)과 ‘앎'(knowledge), 그리고 ‘권력(power)’의 문제를 결부시켜온 시각 중심의 문화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이는 ‘아는 것은 힘'(knowledge is power)이며, 그 힘은 바로 ‘시야'(sight)를 확보함으로써 얻는 ‘통찰력'(insight)에 바탕 한다는 것을 각인시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는, 촉각적 경험의 가치를 축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자’들을 향한 암묵적 편견과 차별의식을 담고 있다. ‘보이지 않는 자’의 말을 들을 가치가 없다는 뭔지 모를 권위의식과 함께, 세상을 알려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올라서고 볼 일이라는 공간정치의 논리까지 투영되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한 것들은 보지 못하는, 혹은 보고 싶은 것만 골라보려는 한 곳에 고정된 몸의 습관 문제이다. 내가 아는 세계의 테두리를 유지하려는 마음은,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불안감을 깔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존재적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말아야 할 것들을 구별하여 통제하고 그런 영향력을 체계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위치를 점령하려 애쓴다. 일단 한번 차지한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가 바로 기득권의 논리이고, 그 논리에 따라 자리와 몫이 할당되며, 특정 체제가 구성되고 작동하게 된다.
스펙터클의 시대에 ‘장님’의 위치가 과연 어디쯤 배정되어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만약 ‘장님’이 코끼리를 말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그 위치가 전복될 수도 있다.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 체제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을 깨는 일만큼 창의력과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일이 있을까? 중심과 주변, 상부와 하부, 주류와 비주류를 가르는 경계를 해체하고 재정의하는 일 만큼 상호 간의 소통과 이해가 절실할 일이 있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예술은 정치적이다.
언젠가, 사용되지 않는 수영장으로 초대된 6명의 시각 장애인들이 코끼리를 만지며, 그 느낌을 이야기하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흑백 영상물을 본 적이 있다. 의자에 일렬로 앉아있던 등장인물들은 한 사람씩, 피리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다, 맞은편에서 등장하는 코끼리와 맞닥뜨린다. 유순한 생명체를 쓰다듬고, 냄새를 맡고 체온과 움직임을 감지한다. 코끼리의 숨소리와 박동을 인지하며 코끼리의 기분을 살피기도 한다. 코끼리도 눈을 껌뻑이며 귀를 펄럭대고, 꼬리를 흔들며 온몸으로 반응한다. 등장인물들이 코끼리와의 조우를 묘사하는 방식은 공감각적이고 생생했으며, 코끼리를 둘러쌓고, 각자의 감정과 경험을 나누며 공유하는 방식은 성찰적이고도 통합적이었다.
뭔가를 열심히 쳐다본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게 되는 걸까? 여기서 ‘본다는 것’은 타자를 일방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상호 교감’하는 것이었다.
‘장님’들의 목소리를 통해, 코끼리를 인지하는 상황의 아이러니를 한창 맛보고 있는 와중에, 스크린 속 등장인물들은 코끼리와 헤어지면서 ‘또 보자~'(see you later)라는 말을 남기며 자리를 뜬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보이는 사람들’의 언어체제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시켜주는 순간이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의식이 시각 문화에 완벽히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드는 일로 밥벌이 하는 나. 이미 편견과 차별의식을 재생산하는 시스템의 한 부분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게 한다.
‘코끼리’가 실제 무엇인들, 몸의 한계를 극복해보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한다. 어떤 이는 ‘코끼리’를 좀 더 객관적으로 가늠해보기 위해, 기술적 수단을 개발하는 것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현상세계는 부질없다며, ‘코끼리’ 더듬기를 관두고 정신적 영역 안에서 이를 관념화하기도 할 것이다. ‘코끼리’를 경험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그 경험을 해석하며 말하고, 공유하는 방식의 차이는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도 할 것이다. 특정 방식만이 진실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며, 편을 갈라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고, 서열을 매길 수도 있을 것이다. 소통 방식은 복잡해지고 불투명해져 ‘코끼리’가 의자로 둔갑할 경우도 생길지 모른다.
넘쳐나는 정보 시대의 ‘코끼리’는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실제 ‘코끼리’가 있긴 한 걸까? 매체는 본 적도 없는 ‘코끼리’에 대해 말해준다. 매체에 많이 등장하는 ‘코끼리’가 보편적 진리라는 믿음을 심어주기까지 한다. 매체를 통해 ‘코끼리’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방법과 표현 형식을 학습한다. 매체가 재현한 ‘코끼리’는 무한한 상상력의 반영인 동시에, 상상력을 제한한다. 매체 속 ‘코끼리’는 처리되어있다. 편의에 맞게 ‘코끼리’의 형상을 재구성할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는가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미지 작업은 정치적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천으로 덮인 시체 사진 네 컷을 보고 있다.
(상단 좌측) 시체 이미지 하단에 돌덩이가 보이는 사진에는 ‘으깨진'(crushed)이란 단어가,
(상단 우측) 좌측에 물이 보이는 사진에는 ‘물에 빠진'(drowned)이라는 단어가,
(하단 좌측) 우측 모닥불이 보이는 사진에는 ‘탄'(burned)이란 단어가 곁들어져 있고,
(하단 우측) ‘추락한'(fell)이라는 단어가 명시된 사진에는 다리 교각이 포착되어 있다.
시체는 한 곳에 고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죽었다.’라는 사건은 네 가지의 상이한 관점으로 프레임 되어 있다. 맥락을 어떻게 구축하느냐에 따라 네 가지의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한 사건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파편 조각들을 놓고, 진실을 가려낸다는 것은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매체를 통해 특정한 부분이 드러나고 밝혀진다. 동시에 밝혀지지 않은 것들은 묻힐 것이다. 풍경이란 관망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는, 우리가 주체로서 발견해 나가는 것이다. 프레임을 통해 잘려나간 이미지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야 말로 보고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장님’일지 모른다.
백영주
현재 중앙대학교 공연영상창작학부 공간연출전공 교수이다.
뉴욕파슨스 디자인스쿨과 예일대학 드라마스쿨에서 연극과 디자인을 전공하였다.
주요 관심사는 사람, 공간, 매체 간 상호관계에 관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