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그린 디자인을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학부에선 회화를 전공했고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야 디자인도, 그린(green) 디자인도 처음 만났다. 그전까진 디자인에 대해선 정말 아는 게 없었다는 그녀. 그런 의미에서 윤호섭 교수와의 만남은 첫손가락에 꼽을 만큼 의미가 남다르다. 디자인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한 사람이 어떻게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책임의식을 지닌 디자이너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지만, 유난히 큰 울림을 주는 박현정 디자이너를 만났다.
스튜디오 이름을 ‘공장’으로 지은 이유가 있으신가요?
원래는 급하게 지은 거라 바꾸려고 그랬는데 시기를 놓쳐서 그냥 계속 쓰고 있네요(웃음). 쓰다 보니 환경적으로도 어떤 의미에선 되게 잘 맞더라고요. 공장은 물건을 만드는 장소(工場)이면서 한문으로 풀면 장인(工匠)이라는 의미도 있거든요. 저희가 지향하는 원론적인 뜻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희 브랜드하고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부르기도 편하고요.
그린 디자인을 하면서 예전의 삶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아무래도 삶에 대한 의식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희 어머니들은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시잖아요. 작은 것도 소중하게 여기고 물건 하나도 아끼고. 저희 어머니는 그 방면에 특히 지혜로운 분이셨는데 저절로 몸에 배어 있는 습관들이 있었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제게도 절약하는 습관이 있었고요. 그래도 의식은 하고 있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부분은 일을 하면서 개선된 점이 많죠.
디자이너로서 보람이 큰 만큼 어려운 점도 많을 것 같아요.
제품 하나를 만들어도 어떤 이유나 메시지가 반드시 들어가 있게끔 만들다 보니 일단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려요. 교보문고를 비롯해서 보편적인 시장에도 나가있지만 다른 브랜드랑 비교하면 템포가 느릴 수밖에 없죠. 그리고 저희가 소재 자체를 개발할 수는 없으니까 한정된 소재를 써야 한다는 점도 어렵네요. 국내에서 원래 쓰던 재생지가 단종 되는 일도 생기고요. 특히 시각과 메시지 양쪽 다 와 닿게 하는 일이 어려운 것 같아요.
시행착오도 많이 겪으셨을 것 같아요.
사진 촬영부터 난관에 부딪쳤죠(웃음). 처음엔 잘 모르니까 무작정 이것저것 해봤어요. 시간은 많이 걸리고 제품 하나에 컷 수만 천 개가 넘고. 사진 한 장 고르는 일만 해도 엄청난 일이었죠. 지금은 사진 찍는 포맷이나 순서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서 수월하게 하고 있어요. 늦게까지 야근하는 건 되도록 피하고 어지간하면 6시 반에는 일을 딱 끝내려고 해요. 일 끝나면 운동하러 가요.
공장의 제품을 생각할 때 가장 감탄스러운 부분은 제작 프로세스다. 물건을 디자인해서 생산 제품이 만들어질 때까지가 그 과정을 하나하나를 일일이 생각한다는 게 언뜻 생각하기에도 보통 일이 아닌 듯하다. 디자인에서 생산을 거쳐 유통과 판매, 소비에 이르는 전 과정을 생각하며 가능한 줄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줄이는 것은 '생각' 이상의 자발적 '정성'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환경을 생각하는 일도 딜레마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단칼에 베듯, 단순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제일 기억에 남는 제품이 있다면요?
그린 디자인과 들어가서 처음 만든 재생신문연필-펭귄요. 협력 업체 쪽에서 재생 신문지로 연필을 만들었는데 소재가 좋으니까 메시지도 같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윤호섭 교수님께 큰 도움을 받았어요. 교수님께서 인사동에서 헌 티셔츠에 환경 메시지가 담긴 펭귄, 돌고래 등을 그려서 나눠주시거든요. 교수님께서 그려주신 이미지를 제품에 디자인해서 함께 환경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제품연필 다섯 자루가 들어가는 패키지인데 남는 부분을 최소화하기 위해 본을 뜨는 것부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남는 부분은 교수님 명함을 만들어 드리고(웃음). 게다가 이음새를 접착제를 쓰지 않고 박음질로 했어요. 동대문에 옷 박아주는 데도 가보고 홈 미싱 하시는 분들도 찾아보고. 감사와 추억이 많은 물건이네요.
디자인은 물론 제품 제작도 직접 다 하시는 건가요?
함께 호흡을 맞추는 인쇄소와 업체는 따로 있지만, 이 일 자체가 아무래도 프로세스에서 컨트롤할 것들이 많다 보니 거래처를 선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할 일이 많아요. 디자인, 제작, 배송, 운영에 이르기까지 공정 전체를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공정 자체를 전부 다 알고 있다는 건 디자이너로서 특별한 경험이겠네요.
우선은 제품이 주는 메시지부터 중요하게 살펴봐요. 저희는 골수팬들이 있어서 본인이 제품을 사면 주변 분들께도 많이 권하거든요. 그 과정에서 제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도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게 의미 있는 것 같아요. 공정에선 소재를 최대한 사용할 수 있는 사이즈를 선택해서 디자인을 하고 잉크 사용량도 최소화하죠. 운송할 때도 규격에서 벗어나면 박스 수가 많아지고 결과적으로는 트럭 3대면 될 일이 4~5대로 늘어나 버리니까 이런 일도 염두에 두고요. 전체적으로 고민할 일들이 많아요. 100% 다 신경을 쓰진 못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래도 제작 전 과정을 생각해야 한다는 건 엄청난 일일 것 같아요.
고민이 많죠. 책 같은 경우 환경을 생각하면 코팅을 안 하는 게 좋지만 코팅을 하면 수명이 오래가니까 그게 오히려 환경적이 아닌가 싶고. 재생지만 해도 재생지를 만들기 위해 에너지가 더 많이 든다고 하니 어느 게 올바른 걸까 늘 갈등에 빠져요. 어쩌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그런 거죠. 소재도 남는 게 많거든요. 예전에는 그걸 다 모아서 거래처에 부탁해 쌓아두고 남은 걸로 메모지를 만들고 그랬어요. 조금이라도 자투리가 남으면 마음이 영 이상해요(웃음).
우리 삶과 환경은 따로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다. 생태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어느 종의 생명체가 결정적인 거멀못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민감하게 깨어 있는 생태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을 것,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신인류의 생존방식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삶과 환경이 하나이기에 삶에 대한 메시지가 곧 환경에 대한 메시지일 수도 있다고 한다. 공장의 제품 중에 밸런스라고 적혀있는 노트가 있다. 일을 하다 보니 자기 삶의 균형이 제일 중요하다는 깨달음이 왔고, 밸런스가 맞춰져야 환경도 아름답게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자기 삶을 돌아보고 그 안에서 밸런스를 찾아서 다른 사람들과 맞춰 살아가면 그것 자체로 환경적인 메시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협업도 많이 하고 계시죠?
화장품 회사인 스킨 푸드와 이니스프리, 그리고 차 전문업체인 하는 오설록하고 작업을 했어요. 그리고 최근엔 이응로 화백의 갤러리 아트 숍에 들어간 물건을 맡았어요. 이응노 미술관에서 원본을 변형하는 것은 가급적 피해달라고 하셔서 작품 전체 레이아웃을 살리는 것이 제품의 비율과 달라 작업이 조금 어려웠는데 이 아이콘을 보시더니 너무 귀엽다고 좋아하셨어요. 종류도 다양하고 품질도 좋게 나와서 만족스러워요. 환경적으로도 만족스러운 작업을 하고 싶어서 코팅하지 않는 저희 방식대로 만들었어요. 처음엔 의견이 분분했는데 결과가 잘 나와서 다행이에요.
외국에도 수출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미국, 유럽, 호주, 러시아 등에 수출하고 있고요, 최근 파리의 메르시와 계약을 했어요. 메르시는 파리에서도 굉장히 핫한 곳 중 하나인데 모든 생활용품과 패션 등 각종 디자인과 관련한 요소들이 모여 있는 곳이거든요. 환경적으로 의미 있는 것들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올해 4월쯤 매장에 샘플하고 브로슈어를 놓으면서 매니저한테 전해달라고 했는데 엄청 유명하신 두 분이 직접 한국을 찾아오셨어요. 서로 영어를 잘 못해서 의사소통은 간단히 했지만(웃음). 계약하게 된 일도 기쁘지만 도움이 되는 코멘트를 많이 해주시고 가셔서 감사드려요.
좋은 제품이니 좀 더 적극적으로 알려도 좋을 것 같은데 욕심이 별로 없어 보이세요(웃음).
욕심이 있으면 안 돼요(웃음). 감당할 수가 없어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규모에 맞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미국 시장이 크긴 하지만 월마트에 들어가서 판매하는 것은 저희 규모와는 맞지 않거든요. 어떻게 만드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디에서 팔리느냐도 중요하니까요. 저희는 템포가 느린 편이라서 다른 업체와 똑같은 방식으로 시장에 맞춰 제품을 디자인하고 생산하기는 어려워요. 한 가지 좋은 건 시장에 중점적인 초점을 맞추지 않고 저희가 가진 색깔로 밀고 나갔던 것이 결과적으로는 차별성이 되어 살아남는 것 같아요.
이 일을 하면서 어떤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끼세요?
저희가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많이 하거든요. 아까 말씀드린 명함 만드는 일도 프로젝트로 전환한 다음에 기부금을 만 원씩 받았어요. 모인 금액은 전액 기부하고요. 월드비전이나 기아대책 등 NGO 단체들과도 많이 협력하고 있어요.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는 제품을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프로세스를 인지하고 바꾸어주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해요. 이런 노력들이 결과물로 나와 좋은 반응을 얻었을 때 보람도 가장 크고요.
디자이너는 환경에 대한 역할이 매우 크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디자인이 결정되면 많은 수량의 제품으로 생산되잖아요. 소재의 선택, 생산과정, 그 제품이 폐기될 때까지 제품 수명 등 전 과정에서 환경을 고려한다면 제품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