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디자인은 공공기관이 조성·제작·설치·운영 및 관리하는 공간·시설·용품·정보 등의 심미적·상징적·기능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행위와 그 결과물을 말한다. 공공이라는 개념은 서구 사회의 사회적 구조와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으로 사회 각 계층 간의 이해관계에서 개인의 이해보다는 공공의 이익, 즉 공익적 가치가 우선시되는 것이다.
타이포그래피는 공공디자인의 성격을 구현해 주는 중요한 시각적 디자인 요소로서 문화적 가치를 드러내면서 그 사회의 태도(Attitude)와 품격(Dignity)을 나타내고 있다. 이 연재는 우리보다 앞서 있는 선진국의 공공디자인에 나타나 있는 타이포그래피를 탐구함으로써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새겨보고자 하는 데 있다.
그 첫 번째로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베트남 전쟁 기념관을 선정하였다. 이 기념관은 일반적으로 인식되어온 전쟁 기념관 같은 건축물이 아니고 건립 당시부터 파격적인 콘셉트로 말미암아 굉장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기념비적인 조형물이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참전하여 유일하게 패배한 전쟁으로 다른 전쟁 기념관 같이 지상에 솟아 있는 하얀 대리석 건물이 아니라 오히려 땅 밑으로 꺼져 내려가 있고, 검은색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인류의 비극적인 전쟁을 참회하고, 서로 화해하며, 이를 통해 평화를 기원하고자 하는 추상적인 콘셉트를 바탕으로 건립되었다.
서구의 역사 속에는 전쟁을 기념하여 문자를 새겨 놓은 많은 기념 건축물이나 기념비가 존재하고 있지만, 이러한 새로운 형식은 현대적인 기념비의 형식을 주도하여 수많은 유사 디자인의 기념비를 파생하였다.
기념관(The Memorial)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The Vietnam Veterans Memorial)은 베트남 전쟁에서 군 복무 중 목숨을 희생한 남녀 군인들을 위한 미국의 경의와 보답의 상징으로 세워졌다. 검은 화강암으로 된 벽에는 목숨을 바치거나 실종된 58,19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기념관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전쟁에서 조국의 부름에 응했던 모든 이의 ‘의무와 국가를 위한 용기, 희생 그리고 헌신’을 기리기 위해 헌정되었다.
역사(History)
베트남 전쟁에 보병으로 참전하여 부상당하고 훈장을 받았던 얀 C. 스크럭스(Jan C. Scruggs)가 이끄는 참전용사 그룹에 의해 1979년 4월 27일에 설립된 비영리 자선 기관인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 기금(Vietnam Veterans Memorial Fund Inc.)은 1980년 7월 1일 미국 의회로부터 기금을 모으고 워싱턴 D.C.에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을 인가받았다.
1980년 10월, 참전 기금은 18세 이상의 미국 시민이라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는 전국적인 기념관 디자인 공모전을 발표하였다. 1981년 3월 31일 마감한 결과, 모두 1,421 작품이 응모되었다. 1981년 5월 1일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예술가들과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1등 상을 발표하였다.
당선작은 21세의 예일 대학생인 마야 잉 린(林瓔: Maya Ying Lin)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1982년 11월 13일 기념비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주재한 기념식에서 미국 국민에게 헌정되었다. 개관된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 기념비는 미국 수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으며, 1년에 4백만 명 이상이 다녀가고 있다.
각각의 벽은 75.21m 길이로 되어 있으며 전체 길이는 150.42m다. 두 벽은 125도 12분의 각도를 이루고 있으며, 각 벽의 끝은 워싱턴 기념비(Washington Monument)와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을 향하고 있다. 벽은 암반 위에 세워진 140개의 콘크리트 파일에 의해 전체 길이가 지지가 되고 있다. 벽의 제일 높은 지점은 3.12m이다.
벽면, 안전 경계석, 보도의 돌은 인도 뱅갈로어(Bangalore) 인근에서 채석된 검은 화강암(Black Granite)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을 자르고 가공하는 일은 버몬트(Vermont)주 배어(Barre)에서 행해졌다. 돌의 색깔과 텍스춰는 광택 처리하거나 숫돌로 갈거나 열처리하는 등 서로 다른 마감 기법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디자인(Design)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 기금은 기념관을 세울 공간으로 크고 공원 같은 지역에 탁월한 사이트를 갖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기념비를 세울 대지로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National Mall)에 있는 컨스티튜션 가든스(Constitution Gardens)의 서쪽 끝을 요청하였다.
마야 잉 린은 그 자체로 조용하고 보존되는 장소로서 컨스티튜션 가든스의 전체적인 평면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공원 안에 공원을 창조한다는 디자인을 착상하였고, 이 효과를 구현하기 위해 표면이 광택 처리된 검은 화강암을 선택하였다. 화강암의 거울 같은 표면에는 주변의 나무, 잔디, 기념관 등의 이미지가 반사된다. 기념비는 워싱턴 기념비와 링컨 기념관을 향하고 있어 미국의 기념관 맥락과 연결되고 있다. 참전용사의 이름은 전투가 벌어졌던 연대순으로 새겨져 있어 개별적인 인간 희생의 연속을 보여주고 있으며 역사에서 각각 이름을 특별한 장소에 기록하게 하고 있다.
기념관의 원점은 이 사이트의 대략 중간 지점에 있다. 200피트 길이로 길게 뻗어 나간 양쪽 끝은 워싱턴 기념비와 링컨 기념관을 향하고 있다. 벽은 땅의 양쪽 면으로 되어 있어 원점에서는 10피트 길이 아래로 내려가 있으며, 양쪽 끝이 완전히 땅과 만날 때까지 높이가 점진적으로 줄어든다. 이 벽면은 단단하고 광택 처리된 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단순한 옵티마(Optima) 체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름(Names)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 디자인의 핵심 요소는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남녀 병사들의 이름이다. 이름 명단은 꼭짓점에 있는 최초로 전투가 벌어졌던 연도 표시 아래부터 시작되며, 동쪽 벽의 끝 부분까지 계속된다. 명단은 서쪽 벽 끝 부분부터 다시 시작하며, 꼭짓점의 마지막 사망 연도에서 끝난다. 시작과 끝이 만나면서 미국 역사에서의 주요 시대를 알리고 있다.
각 벽면은 70개의 독립된 이름이 적힌 패널로 이루어져 있다. 제일 큰 패널에는 137줄의 이름이 적혀 있고, 가장 작은 패널에는 1줄의 이름이 있다. 1줄에는 평균 5명의 이름이 있다. 각 패널에는 아랫부분에 1에서 70까지 번호가 적혀있다. 서쪽 1번 패널과 동쪽 1번 패널은 꼭짓점에 있으며, 각각 동쪽과 서쪽 70번 패널까지 뻗어있다.
최초 전투에서 희생된 이름은 동쪽 1번 패널에 ‘1959’라는 연도 표시 아래 적혀있다. 전투 연도에 따라 숨진 이름은 책의 페이지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줄 한 줄 순서대로 각 패널의 아래쪽으로 내려왔다가 오른쪽 패널의 맨 위쪽 첫 번째 줄로 계속되며 70번 패널까지 이어진다. 서쪽 패널은 70번부터 시작하여 꼭짓점에 있는 1번 패널까지 계속된다. 맨 마지막 전투는 서쪽 1번 패널에 ‘1975’라는 연대 표시 위의 맨 아래 줄에 적혀 있다.
최초에 작성되었던 57,939명의 이름과 묘비명은 테네시(Tennessee)주 멤피스(Memphis)에 있는 빈스왱거 글래스크래프트(Binswanger Glasscraft)사에서 사진 처리를 거쳐 만들어진 스텐실과 산업장비에 의해 금속 분말 분사 방식으로 새겨졌다. 이름들은 미국 국방성에서 제공한 월남전 전투 목록이 들어 있는 컴퓨터 테이프로부터 전투 날짜에 따른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조지아(Georgia)주 애틀랜타(Atlanta)에 있는 데이터랜틱(Datalantic)사에서 사진 식자가 이루어졌다. 사진 식자는 헤르만 자프(Herman Zapf)가 디자인한 옵티마(Optima)체의 디지털 버전을 사용하였다.
1982년 이후에 벽면에 추가된 이름은 이전과 같이 사진 처리된 스텐실 방식으로 콜로라도(Colorado)주 덴버(Denver)시에 있는 그레잇 패인스 글래스웍스(Great Panes Glassworks)사에서 알루미늄 옥사이드 분말을 이용하여 휴대용 분말 분사 장비로 새겼다. 각 글자는 1.35cm 높이에 대략 0.38mm의 깊이로 새겨졌다.
이름 탁본하기
수많은 미국인이 매년 참전 기금으로부터 이름을 탁본할 수 있는 도구를 무료로 받는다. 매주 자원봉사자들이 수십 년 전에 목숨을 희생한 미국의 영웅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연필과 종이를 벽으로 가져온다. 무료로 제공되는 연필과 종이를 받으려면 참전 기금에 전화((202)393-0090)로 연락하든지 이메일(vvmf@vvmf.org)을 하면 된다.
전쟁 기념관은 승전한 측의 영웅적인 면모만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전쟁이라는 인류의 비극을 참회하고 서로 용서하며 화해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설계자의 콘셉트를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콘셉트를 구현하기 위해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은 용맹한 군인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조각보다는 평화라는 키워드를 표현하는 추상적인 조형 요소로 문자를 선택했다. 수많은 문자 가운데 기본적으로는 현대적인 고딕 형태를 지니면서도 우아하면서도 품위 있는 명조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는 옵티마 서체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베트남 전쟁 기념관의 심플한 조형미와 문자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설계자의 콘셉트가 보다 명료하게 전달되고 있다.
홍석일
현재 연세대학교 디자인예술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디자인센터 소장,
강원도 디자인강원위원회 위원직을 맡고 있다. 한국공공디자인학회 부회장,
서울시 디자인위원회 위원, 한국디자인학회 이사,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