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이 있다. 내가 꼭 필요했던 것, 어쩐지 나를 위해 디자인된 것 같아, 어쩜 이리도 나와 어울리는 지…. 그건 아마 그걸 만든 사람도 똑같은 생각과 느낌으로 만들었기 때문일 테다. 내가 쓰고 싶은 물건이기에 보이지 않는 속 재료까지 신경 쓰는 사람들. 디자인 스튜디오 서커스보이밴드(홈페이지) 오현석, 이준용 실장이다. 한 사람은 조용히 읊조리는 시처럼, 한 사람은 유쾌하고 영민하게 이야기를 이어 간다.
서커스보이밴드라는 이름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나요?
오현석(이하 현석)
처음 이름만 접하시면 음악 하는 밴드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것과 통하는 점이 있긴 있죠. 뮤지션들이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거나 좋은 영향을 주잖아요. 저희의 작업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밴드처럼 이름을 지었어요. 그리고 우리 사는 인생이 서커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 이유는 희로애락이 담겨 있어서이죠. 또 서커스는 곡예, 연기, 음악, 의상, 무대 미술 등이 합쳐진 종합예술이잖아요. 거기에선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놀라운 것이 많아요. 저희도 그런 걸 보여주면 좋겠다 싶었지요.
서로 소개해 주세요.
현석
사실 저희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았어요. 같은 미술학원에 다녔었고, 서커스보이밴드(이하 CBB)를 결성하기 전 mmmg에서 거의 10여 년을 함께 일했죠. 저는 그곳에서 11년을 일했고, 준용 실장은 8년 차에 그만두었으니까요. 지금 CBB에서는 기획을 함께하고 제가 디자인을 하면 그걸 현실화시켜서 제품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주로 맡고 있어요. 우린 다른 점이 많은 것 같은데, 일 적인 면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통하는 부분이 있죠.
이준용(이하 준용)
오현석 실장은 다재다능한 사람이에요. mmmg가 처음 4명으로 창업을 했는데, 그 창업 멤버이고 또, 11년 정도 근무하면서 전체적인 아트 디렉터 역할을 해 왔죠. mmmg를 이끌던 디자이너였고 지금은 CBB를 이끌어가는 사람이죠. 그가 크리에이티브한 면으로 치우쳐 있다면, 저는 현실적인 면에 가까워요. 그렇게 다른 둘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거예요.
잘 다니던 회사에서 나와 창업을 하려고 할 때 어떤 마음이었나요?
현석
조금 더 자유로운 작업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일러스트 작업을 좋아해서 많이 하고 싶었는데, 회사에 소속된 지라 한계가 있었죠. CBB를 시작하고는 일러스트 전시도 하고 이런저런 제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나둘씩 표현하고 있어요.
준용
mmmg를 오랫동안 이끌면서 본인이 만든 이미지임에도 부딪히는 순간이 왔어요. mmmg가 만들어 온 분위기가 아닌 또 다른 스타일도 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기대하는 스타일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모험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다는 것이 10년 차 시기에 맞물렸던 것이죠.
처음엔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준용
통인동에 ’52(오이)’라는 프로젝트샵으로 먼저 시작했고 다음에 CBB가 만들어진 거예요. ’52’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요, 당시 주소가 종로구 자하문로 7길 52번지였거든요. 52번째 건물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지었는데, 혹시 다른 지역으로 갈 때 번지에 따라 숫자를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만들었어요. 그런데 52라는 숫자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 많더라고요. 예를 들면 우리의 성인 ‘오(현석)이(준용)’의 의미라든가. mmmg는 당시 건물 지번이 51번이었어요. 51 다음 52라는 의미도 되고. 놀라운 것은 지금 운영하고 있는 ‘Shop 52’의 주소가 종로구 원남동 52-2번지에요. 이런 것들이 얽혀서 재미있는 스토리가 되기도 하죠.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현석
일이 다소 많아져서 여유롭지는 못하네요.(웃음)
준용
저희를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많아져서 지금은 둘이 하기에 벅차요. 그래서 함께하는 스태프도 늘렸지요. 상품과 디자인에 집중해야 함은 물론이고 운영과 영업도 저희가 직접 해야 하니까 배우면서 하고 있어요. 운영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랄까. 요즘 저희 내부 일 말고 외부의 일도 많이 하고 있어요. 저희보다 더 나은 프로세스를 가진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을 한다든가 저희 이미지를 활용한 기부사업도 하고 있지요. 아! 그런데 이렇게 바쁠 때에도 꼭 지키는 원칙이 있어요. 야근 금지! 업무는 업무시간에 집중하고, 그 외에는 자유롭게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거죠.
협업 프로젝트들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세요.
준용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상품을 만들면 어떨까 해서 도전해본 일이었어요. 젠틀몬스터라는 안경 브랜드와 함께 안경을 만들고 있죠. 6월 말쯤 론칭 예정이에요. 왜 안경이냐고 하신다면 우리가 사용해보고 싶었던 것이니까요. 이런 도전은 계속할 예정이에요. 가장 첫 번째 작업과 기억에 남는 작업은 무엇인가요?
현석
페이스 포켓이 가장 첫 번째 작업이자 가장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죠. 저희와 함께 시작했으니까. 페이스 포켓은 남은 원단이나 버려진 옷들 있잖아요. 예쁜데 입지는 못하고, 딱히 쓸 데가 없는 천들을 조합해서 만들어 본 제품이에요. 만들다 보니 애착이 갔고, 그것을 제대로 선을 보여보자 해서 CBB의 시작으로 한 것이죠. 포켓, 가방, 컵….
무언가를 ‘담는’ 제품을 주로 만드시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현석
쓸모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용도가 있는 걸 생각하다 보니 가방이나 컵, 파우치…. 노트도 결국 글을 담잖아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온 거예요.
준용
예를 들어 휴대전화나 아이패드를 새로 샀는데, 이걸 담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제품을 만들기 시작해요. 내가 필요한 건 남들도 필요할 테니까요.
일상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상상을 제품에 담는다고 하셨잖아요, 어떻게 쌓았다가 어떤 식으로 표출되는 건지 궁금해요.
현석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해 두는 편이에요. 여행지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지요. 순간순간의 이미지들이 자연스럽게 쌓여 합쳐지고 거기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도 해요.
준용
오현석 실장은 꿈을 일러스트로 표현해내는 능력이 있어요. 어느 날 꿈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어느새 그림으로 그려 있어요. 생생하면서도 새롭게. 아… 그때 그 꿈이구나. 어떤 사물을 머릿속에 넣고 그것을 드로잉으로 표현할 때는 또 다른 어떤 것이 되어있는 거죠. 그런 모습을 오랫동안 봐 왔어요.
현석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에게서 듣는 이야기, 그 사람이 신는 신발과 양말, 그 색의 조합에서 좋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어요. 책이나 사진집을 통해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장면과 이미지를 보고 영감을 받기도 하고요. 사소한 듯하나 일상에서 얻는 것은 정말 다양해요.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현석
오랫동안 애착을 갖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에요. 그러기 위해 부속이나 원재료의 질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최근 디자인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 많은데, 일부 브랜드에서는 퀄리티보다 재료비 절감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오랫동안 사용하기 어려운 제품들이 있어요. 참 안타깝죠.
작업할 때 사용하는 도구, 작업 버릇이 있다면?
현석
저는 일러스트 작업을 하니까 쓰던 팬만 주로 사용해요. 이름은 잘 모르겠네요.(웃음)
준용
얇은 제도용 로트링팬.
현석
나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았어?(웃음)
준용
어떻게 알긴.(웃음) 저는 실무를 하다 보니 뭐든지 쟁여놓는 버릇이 있어요. 재미있는 재료나 샘플이 있으면 1~2년 사용하지 않아도 계속 모으죠. 그래서 주변이 어수선하고 지저분해요.(웃음)
CBB는 궁극적으로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은가요?
현석
저희가 하는 작업이 밝고 좋은 느낌을 주는 작업이었으면 좋겠어요.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무언가라도 좋고, 그냥 기분이 좋아져도 좋고.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팀이었으면 좋겠어요.
준용
미소로 치자면 활짝 웃는 느낌보다는 약간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의 미소.
CBB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현석
정체되지 않고, 머물러 있지 않고, 과하지 않지만 조금씩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CBB가 되기를 바라요. 그렇게 계속 지속할 수 있는 흐름을 갖고 활동하는 게 목표에요.
준용
여러 디자인 문구 브랜드들이 거대 자본에 휩쓸리다 보면 본연의 것을 잃어버리고 팬시 브랜드처럼 바뀌어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와중에 소규모 스튜디오도 이렇게 잘 유지할 수 있구나…. 그런 롤모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Shop 52 같은 작은 가게에서도 수익을 내고 유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거죠. 개개인의 작은 브랜드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이 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