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한 권
❶ 제목 | ❷ 저자 또는 차례 | ❸ 서문
딱 세 가지만 속성 소개
스물두 번째 책
프로-스펙스 브랜드북 『우리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
[프로-스펙스 헤리티지 프로젝트] 팀 지음, 아넥스, 2023
제목
1981년 론칭한 국내 스포츠 브랜드 프로-스펙스(PRO-SPECS)가 브랜드북을 펴냈다. 『우리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Our Race is Not Over)』라는 제목이다. [프로-스펙스 헤리티지 프로젝트] 팀이 총괄했고, 기획자·편집자 그룹 아넥스(Annex)가 브랜드북 기획 및 출판을, 스튜디오 마이케이씨(MYKC)가 북 디자인을 진행했다.
브랜드가 속한 시장과 시대 안에서 브랜드의 현 위치를 어느 지점에 배치하느냐, 이것이 이른바 ‘브랜드 홍보’ 실무자들의 고민일 것이다. 경쟁사들보다 월등히 뛰어난(뛰어나야만 하는) 리딩 기업으로 배치하는 방법이 있다. 꽤 수월한 카드다. ‘우리’ 얘기만 잘 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사(社史), 우리의 실적, 우리에 대한 호평을 전면에 내세울 때 리딩 기업으로서의 스토리라인―우리가 최고다, 라기보다는 ‘우리가 최고여야 한다’―은 세워진다. 더 원(The One)의 플롯이다.
또 다른 배치도 가능하다. 원 포 올, 올 포 원(One for All, All for One)의 플롯이다. 이 스토리라인에서 브랜드는 단독한 프로타고니스트가 되기를 양보한다. 시장과 시대 전체의 일부, 즉 수많은 일부들 중 하나로 스스로를 배치하는 것이다. 우리 얘기만 하지는 않겠다는 결심이다. 『우리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는 후자의 배치를 선택했다. 143쪽 분량을 읽어 나가다 보면 표제의 ‘우리’가 프로-스펙스만을 위한 대이름씨가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는 국내외 타 스포츠 브랜드 이름들을 꽤나 자주 언급하고, 프로-스펙스가 탄생한 1980년대 한국 스포츠 산업 환경을 선명히 스케치한다. 프로-스펙스 전현직 임직원들의 목소리(인터뷰)와 함께 디자인 및 패션 분야 칼럼니스트, 스포츠계 인사, 스포츠화 관련 업계 종사자 등 여러 외부인들의 이야기를 고루 배치한 점도 인상적이다. 브랜드북에 수록된 글의 소재, 필자, 인터뷰이, 그리고 독자 모두를 ‘우리’로 결속하는 구성이다.
차례
[OPENER]
좌담: 프로-스펙스, 2022
진행. 전은경(전 월간 『디자인』 편집장) / 발제·토론. 박세진(패션 칼럼니스트) / 좌담 패널. 오지윤(대한체육회 스포츠마케팅사업단장), 이근백(마더그라운드 대표), 이창우(29cm 창립자), 프로-스펙스 임직원
[ESSAY]
1980s, 스포츠 브랜드의 탄생
글. 김신(디자인 칼럼니스트)
[INTERVIEW: 대한민국 대표 스포츠 브랜드 프로-스펙스]
부산, 신발 그리고 국제상사
인터뷰. 문한아 / 인터뷰이. 부산경제진흥원 신발산업진흥센터 관계자
프로-스펙스의 탄생
인터뷰. 오상희 / 인터뷰이. 오동희(1969~1986년 국제상사 내수본부 전무이사로 근무)
OEM 기업, 스포츠화를 개발하다
인터뷰. 허영은 / 인터뷰이. 하용호(1982~1985년 국제상사 프로-스펙스 개발부 근무)
시대의 목소리를 담다
인터뷰. 허영은 / 인터뷰이. 이근상(마케팅·광고 기획 전문가, 프로-스펙스 ‘잘됐으면 좋겠어’ 캠페인 기획)
우리만의 기술력
인터뷰. 문한아 / 인터뷰이. 프로-스펙스 R&D센터 관계자
[ICONIC SHOES]
프로-스펙스 대표 제품
[ESSAY]
헤리티지의 의미
글. 박세진(패션 칼럼니스트)
[ESSAY]
지금 시대의 스포츠
글. 김도균(스포츠 마케팅 전문가)
[CHRONOLOGY]
브랜드 스토리
글·편집. 김그린(아넥스)
[ESSAY]
프로-스펙스의 헤리티지를 찾아서
글. 조형일(파인딩 에이드 대표, 브랜드 아카이브 연구자)
[STARTING LINE]
프로-스펙스, 새로운 도약을 꿈꾸다
인터뷰. 오상희 / 인터뷰이. 구은성(프로-스펙스 마케팅·상품 기획 총괄 담당)
『우리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는 좌담 한 편, 인터뷰 여섯 편, 에세이 네 편, 사사(CHRONOLOGY) 한 꼭지, 화보 섹션(ICONIC SHOES) 하나로 구성된 브랜드북이다. 바이라인으로 알 수 있듯 프로-스펙스 전현직 임직원과 외부 필진의 목소리를 풍부히 수록했다.
차례에서 유독 튀는(?) 글을 한 편 꼽자면 「프로-스펙스의 탄생」이다. 프로-스펙스 브랜드를 만든 국제상사(현 LS네트웍스)의 전 임원을 인터뷰한 글이다. 어디까지나 『타이포그래피 서울』 에디터의 추측이지만, 아마도 이 글의 게재 여부를 두고 브랜드북 제작진이 고심했을 것 같다. 프로-스펙스라는 브랜드의 홍보물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내용, 그러니까 브랜드에 대한 쓴소리가 있어서다.
프로-스펙스가 최근 신발 옆면의 로고를 수없이 바꾸거나 숨기기도 하고, 아동화의 경우 애매하게 두 개의 라인을 사용하곤 하던데, 이는 마치 사람 얼굴이 계속 바뀌는 것과 같다고 봐요. 옆면은 그 자체로 움직이는 광고인데 거기에 대한 기준점이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브랜드 누적 효과는 지속적인 노출과 브레인 워싱을 통해 지금의 소비자, 혹은 미래의 소비자에게 로열티를 심어주는 것인데 말이죠. (⋯) 프로-스펙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저조차 제품을 보면 프로-스펙스의 신발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많거든요. 소비자에게 그런 혼선을 주어서는 안 되죠.
본문 46쪽
책의 주인공인 프로-스펙스로서는 대선배에게 따끔한 충고를 들은 셈이다. 회사 ‘OB’에 대한 경의였을까, 어쨌든 이 인터뷰를 브랜드북에 실었다. 프로-스펙스는 완벽하지 않다, 라는 자기 고백으로 읽힌다. 전임자가 여전히 현역의 시제로, ‘우리’의 눈높이로 과거 근무처를 논하는 점도 흥미롭다. 『타이포그래피 서울』 에디터에게 이 대목은 ‘인간적’으로 독해되었다. 스포츠 브랜드 프로-스펙스가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서문
『우리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 서문(OPENER)은 좌담이다. [프로-스펙스 헤리티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22년 8월 “스포츠 마케팅, 브랜딩, 콘텐츠 기획·운영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발제와 토론을 통해 프로-스펙스의 현재를 보다 객관적으로 진단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고 한다.
서문을 통해 스포츠 브랜드로서 프로-스펙스가 가 닿고자 하는 지점, 그곳으로 향하는 데 수반되는 실무적 과제와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인터뷰만큼이나 서문 또한 굉장히 파격적(!)이다. 브랜드북 첫머리에서 타사 브랜드 얘기를 이렇게나 길게 하다니.
예전의 광고 캠페인은 인하우스 마케팅 팀이나 에이전시에서 만들어서 일방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나이키를 예로 들면, 2000년대 이전에는 마이클 조던이 하늘을 걸어서 덩크를 하는 이미지만으로 충분히 효과적이었죠. 2000~2010년대에는 광고에 텍스트가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스토리텔링으로 공감대를 일으키기 위해서예요. 최근의 광고는 우리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을 비추면서 “우리(나이키)가 너의 팬이 되어줄게”라고 합니다. 잘 만든 하나의 콘텐츠가 아니라 훨씬 더 쪼개진, 사용자들이 직접 만든 다양한 콘텐츠에 주목해야 할 시대인 거죠.
본문 15~16쪽, 좌담 패널 이창우(29cm 창립자)의 발언
또 이런 발언도 있다. “그밖에 프로-스펙스가 새로운 방향성을 정하는 데 있어 고려할 만한 사항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진행자의 말이다. 브랜드의 방향성 설정에 관한 조언을 좌담 패널들에게 청하는 것인데, 자칫 일부 독자들에게는 ‘이 브랜드는 자기네 방향성을 스스로 정하지도 못하는군’이라는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물론 기업은 경영진의 비전과 더불어 사외 전문가들의 조언을 수렴하며 정책을 짜고 방향성을 설정한다. 그런데 브랜드의 본격 홍보물인 브랜드북 첫 글에 이렇듯 외부 조력을 직접적으로 구하는 목소리를 기록한 것은 대단히 낯선 장면이다. 브랜드 내외부 모두와 ‘우리’로서 나아가려는 프로-스펙스의 태도와 고유의 가치관을 대담하게 드러낸 ‘편집의 묘’ 아닐까.
『우리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는 2023년 2월 10일 정식 출간되었다. 두 달이 지난 4월에 〈에어(Air)〉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1984년 나이키 영업직 임원이었던 소니 바카로가 미국 프로 농구 NBA의 스타 선수 마이클 조던을 영입해 ‘에어 조던’ 브랜드를 론칭하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국내 스포츠화 브랜드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커진 듯하다. 에어 조던의 첫 시제품 생산처가 우리나라 부산의 동양고무산업임이 재조명되면서다. 〈에어〉를 관람했다면 다음 코스로 『우리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까지 달려보는 건 어떨까. 모두를 ‘우리’로 품는 국내 브랜드 프로-스펙스의, 그리고 대한민국 신발 산업의 담대한 역사가 영화처럼 실감나게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