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자마자 단박에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첫인상의 강렬함은 사람뿐 아니라 폰트의 세상에서도 만난다. 윤고딕이 바로 그렇다.
끊임없이 자기혁명을 계속해온 윤고딕 시리즈. 새로운 윤고딕 700은 윤디자인 연구소 19명 폰트 디자이너가 거의 다 투입되다시피 하며 기획부터 출시까지 꼬박 2년이 걸렸다. 인쇄 환경은 물론 디스플레이 환경에 적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윤고딕 700에 대한 이야기를 윤디자인 연구소의 박윤정 이사님, 최은규 차장님, 황지원 영업지원 팀장님에게 들어보았다. 글. 인현진
윤고딕 정신
1980년대만 해도 사식폰트를 손으로 직접 그렸어요. 식자집에서 필름에다 찍는 방식이었죠. 사용 환경이 바뀌면서 폰트 붐이 불었는데 국내 폰트 회사들은 기계적으로 식자 라인만 따서 오퍼레이터를 했어요. 하지만 윤고딕은 기존의 형식을 깨고 완벽하게 새로운 것을 창조했죠. 안정되고 탄탄한 윤고딕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고요.
고딕혁명
예전 고딕 서체엔 세리프가 있었어요. 윤고딕 100을 처음 만들면서 의미 없는 세리프나 돌기를 모두 잘라내고 직선화시켰죠. ㅅ꼴 삐침도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거의 수평화했고요. 다른 고딕과 글립감이 다를 수밖에요. 크기도 더 커 보이고. 훨씬 더 선명해 보이는 효과까지 생겼으니까요. 새로운 고딕의 탄생이었죠.
100에서 700까지
번호 대마다 애정이 달라요. 정말 뜨겁게 고민했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죠. 크게 변화가 있는 일이 아닌데도 폰트작업엔 매력이 있어요. 성장한다는 느낌이랄까. 반짝 하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내는 게 아니라 장인정신을 갖고 자신과 끊임없이 싸움을 해나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하지만 보람도 크죠. 인쇄든 미디어플레이어든 윤고딕이 전방위로 쓰이는 걸 보면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기뻐요.
윤고딕의 장점 중 하나는 뛰어난 가독성이다. 정보전달 인지력이 단연 발군이라고나 할까. 지금까지도 간결하고 단순한 정신은 계속된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정이 없다는 느낌도 든다. 너무 깔끔하고 똑 떨어지기 때문이다. 기계적이라는 평도 더러 듣는다. 그러나 이번 700 시리즈는 단순과 간결이라는 기본 느낌에 인간미가 더해진 느낌이다.
700. 과감하게, 더 대담하게
윤고딕은 국내 고딕 계열 폰트 중 유일하게 두께 단위를 6개까지 갖고 있던 서체군이었어요. 이게 강점이니 700에서 더 살려보자고 9종에 도전했죠. 힘들어도 필요하다면 가자! 라는 정신으로요(웃음). 두께 단계 폭은 윤고딕 700이 최고일 겁니다. 두께를 놓고 보면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죠.
간결하게, 더 단순하게 710은 좀 더 간결한 특성을 살렸어요. 예를 들어 도를 보면 720부터 790까지는 ㄷ과 ㅗ 사이를 떨어뜨렸는데 오직 710에서만 붙였죠. 미세한 차이가 오히려 군더더기가 될 것 같아 더 단순하게 갔죠. 일반 사용자들이 그런 부분까지 섬세하게 인지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딱 봐서 왠지 좋다, 라는 느낌이 들면 좋겠더라고요. (그림) 710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글자 ‘도’.
굵게, 더 강하게 가장 볼드한 790은 작은 포인트로 쓸 것 같진 않아서 과감하게 굵기를 대폭 넓혔어요. 현재 서체 중 가장 굵을 거예요. 790도 710처럼 이것에만 있는 특징이 있어요. 획일적이지 않게 바꿨거든요. 대신 너무 부담스러울까봐 따뜻한 터치를 넣었어요. 예를 들면 ㅅ이 가운데에서 이렇게 내려와요. ㅆ은 또 다른 느낌을 주고요. (그림) 790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ㅆ’
특수문자. 넓게, 더 많게
특수문자는 한 가지 굵기였는데 이번엔 710부터 790까지 고유 번호에 따라 개별적으로 굵기를 맞췄어요. 그동안 한글은 노하우가 많이 쌓였지만 특수문자는 한글만큼 자신 있게 내놓진 못했기에 공을 많이 들였죠. 그만큼 많이 배우고 공부하는 시간이었어요.
글자폭. 다르게, 더 다양하게
기존의 한글 폰트는 폭이 같았어요. 글자가 가늘든 굵든 동일한 공간을 차지했죠. 그러다보니 굵은 글자가 커보여야 하는데 오히려 작아 보이는 등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었어요. 폭이 고정된 편집툴이었거든요. 그런데 최근 자유롭게 폭을 적용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면서 두께별로 글자폭을 다르게 했어요. 비유하자면 몸집이 큰 애한테 좀 더 큰 방을 줄 수 있게 된 거죠. 폭에 대한 틀을 깬 것도 700에서 처음 시도한 거네요.
폰트 디자이너로 산다는 것
숫자 하나 때문에 몇 시간을 고민한다. 한 달 동안 작업한 결과를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도 있다. 한글, 영문, 숫자, 특수문자. 게다가 710부터 790까지 세트별로 작업을 따로 한다. 그야말로 도를 닦는 시간이다. 울화가 치밀어도 글자 하나하나를 매만지고 다듬다보면 정화가 된다는 폰트 디자이너들. 그들의 뼈에서 나올 사리는 그들이 사랑한 폰트를 닮지 않을까.
바꾸자! 떼자! 정말요?
『박윤정 이사(이하 박)』 굵기 작업이 거의 끝난 상태였어요. 주변 지인들 피드백이 기존의 고딕보다 두꺼워서 좋긴 한데 좀 더 두꺼워도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최은규 차장(이하 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에요. 바꾸려면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스태프들이 매달려 2만자 가까이 작업한 결과가 전부 사라질 수도 있는 일이거든요.
『박』 그러니 어떡하나, 참 못할 짓 하는 것 같고. 출시 시간도 고려해야 하고. 하지만 사용자 입장에서 다시 생각했죠. 고생은 잠깐 하면 지나가지만 폰트는 영원히 남으니까요. 과감히 말했죠, 시크하게. “바꾸자!”
『최』 (완전 화들짝 놀라며) “네? 정말요?”
『박』 “쌍시옷도 너무 인위적인 느낌이야. 떼자!”
『최』 (아까보다 더 놀라며) “네? 정말요?”
『박』 생각해보세요. 자소 하나만 수정하는 걸로 끝나는 일이 아니거든요. 710부터 790까지 모두 손봐야 하니까. 하지만 결국 바꾸는 걸로 결정을 내렸죠.
『최』 이전 패밀리는 제 작업파일 속에 고이 잠들어 있답니다 (웃음).
팔 때문에 미치겠다
『최』 세 시간을 8과 싸운 날이 있었어요. 어제는 예쁜데 오늘은 안 예쁘고. 8 때문에 죽겠다고 하니까 스태프 중 한 명이 그러더라고요. 8은 차장님을 사랑합니다! 정말 8에게 격하게 사랑받았죠(웃음).
『박』 곡선 표현에 심혈을 기울이며 고민한 만큼 8이 정말 예쁘게 나왔어요.
『최』 대신 제 팔이 좀 고생했죠(웃음). 단순하게 원 두 개를 붙여 만든 게 아니니까요. 결과요? 만족스러워요. 8의 미묘한 허리 라인이 진짜 예술이거든요.
블랙 앤드 화이트
『박』 폰트는 기본적으로 흑백 세상이에요. 그래서 더욱 여백을 보는 게 중요하죠. 검은 건 글자요, 하얀 건 여백이라고 농담으로 그러는데 초보 땐 글자만 보다가 어느 정도 눈이 트이면 여백이 보이기 시작해요.
『최』 맞아요. 같은 시옷이라도 중성이나 종성에 따라 공간감이 달라지니까요.
숫자 너머의 열정 고딕 작업을 할 때는 온 세상의 글자 중 고딕체만 보인다. 서체디자이너의 열정은 온도계 숫자 너머에 존재한다. 그만큼 작업 결과에 대한 만족도도 높고 성취감도 크지만 어려움도 있다. 아이를 키우듯 한 글자 한 글자 어렵게 만든 것에 비하면 인터넷 상에서 너무 쉽게 풀리는 것도 안타깝다. 그 또한 윤고딕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척도라고 볼 수 있지만 개발자의 노력이 제대로 존중받길 기대해본다.
즐거운 폰트 중독자들
『박』 처음 윤디자인 연구소는 지하에서, 디자이너 세 명으로 출발했어요. 이름도 없고 규모도 작았지만 제 꿈의 날개를 펼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죠.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고 갔는데 모든 게 신기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미친 듯 일했죠. 지금도 질리지가 않아요. 폰트 중독이죠.
『최』 한글은 조형적으로 참 예뻐요. 명조는 명조대로 고딕은 고딕대로 개성이 다르죠. 명조가 따뜻한 공기라면 고딕은 차가운 공기랄까, 엄마와 아빠 같기도 하고. 일은 인내가 필요하죠. 획 하나만 달라져도 전부 달라지는 거니까.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신선함과 기쁨이 있어요.
좋은 건 기본,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힘의 원천
『박』 윤고딕 좋은 건 이제 기본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최』 늘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하니까 부담을 느낄 때도 있죠.
『박』 전 가족이 큰 힘이에요. 그리고 공연이나 전시를 많이 보고 여행도 가고. 정체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리프레시를 자주 해요. 오후 반차 내서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기도 하고요.
『최』 역시 술과 웃음이려나?(웃음) 사랑을 주세요
『박』 작업해온 글자를 보면 사랑을 많이 줬구나, 안 줬구나, 알 수가 있어요. 아, 이 작업 누가 했구나, 라는 것도 알고요.
『최』 사람이랑 글자랑 닮아가거든요. 신기하게도 그래요.
『박』 일반 사용자들이 섬세한 부분까지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작업하는 사람으로서는 글자 하나하나가 사랑받을 수 있도록, 사랑을 갖고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자에 후광이 비칠 정도로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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