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인 견고함. 거장의 그것은 드러남의 아름다움보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실체와 소통의 철학적 사유로 더욱 빛났다. 우리나라 설치미술 1세대인 임충섭 작가. 1960년대 말부터 현재에 이르는 그의 화업 전반을 보여주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임충섭: 달, 그리고 월인천지> 전이 바로 그것. 국내 국•공립미술관 최초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의 또 하나의 분파인 ‘해외 거주 한국 작가’의 미술을 국내 관객에게 환기시키는 의미 있는 기회이다. 작가 개인의 삶과 미술사적 세계관, 예술적 성취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를 들여다볼 수 있다.
1941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출생한 임충섭은 1970년대 초 뉴욕으로 이주한 이후 뉴욕 화단에서 가장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 작가이다. 그의 작품 외형은 1970년~1980년대 후반까지 미국을 풍미한 미니멀리즘과 연관이 있지만, 작품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서의 기억과 경험, 그 시절 어머니의 죽음, 그로 인한 그리움과 갈망으로 채워져 있다. 한국적인 정서를 내포하면서도 현대적인 성격을 표출하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 이와 더불어 한국과 미국이라는 이질적인 문화 접점에 놓인 작가의 상황은 창작의 또 다른 영감이 되어 끊임없이 기존의 관습적 시각과 태도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이번 전시에는 평면, 드로잉, 설치, 오브제, 영상 등 그간 작가의 다양한 매체 실험과 조형 방법의 활용을 연대기적으로, 주체적으로 총망라해서 보여준다. 장르적 융합과 혼성이 자주 나타나는 그의 작품을 시기별로 구분하면, 1970~80년대는 반추상•탈추상의 실험기, 1990년대는 공간 드로잉•설치작업, 199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대로 이어지면서는 ‘발견된 오브제’를 활용한 ‘화석풍경’, ‘앗상블라주’ 시리즈, 그리고 2010년을 전후해서 전개된 단색의 덩어리 오브제•고부조 오브제 등으로 나뉜다.
최근 20세기 이후 아방가르드 미술에서 주요한 주제로 이용돼온 ‘빛’을 작품의 물질적 주제로 이용하여 호평받고 있는 임충섭.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제작한 대규모 설치, 영상 복합 작품인 <월인천지>를 공개했다. 실타래, 달 영상, 한국 건축 구조 등의 복합 구성을 통한 작가 예술관의 총체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나의 작업은 자연과 문명을 가로지르는 경계를 비춤과 동시에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 있다.”
“한 개인(의) 노스텔지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정서에 에너지가 된다.”
전시관 한쪽에는 임충섭의 미학을 알 수 있는 메모들도 볼 수 있다. 캔버스를 뚫고 나온 빛, 벽과 벽 사이를 통과하는 자전거, 전시관 벽을 넘어 끝없이 펼쳐질 자연, 화석처럼 굳어진 오래된 물건들, 화석이 모여있는 풍경, 폐의자를 조각조각 붙여 만들어 흡사 로봇처럼 보이는 딱정벌레…. 깊고 깊은 곳에서 표출된 것들이었기에 어렴풋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작품 세계가 뚜렷해지는 느낌이랄까. 세상 그 어떤 명언보다 강렬하다. 사물에 대한 직관과 통찰력이 가져온 이 연구자적 감성은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맹렬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원동력이리라. <임충섭:달, 그리고 월인천지>에서 여전히 활발하고 영민한 거장의 모든 것을 만나보자.
전시 정보
임충섭: 달, 그리고 월인천지
기간: 2012년 12월 12일(수)~2013년 2월 24일(일)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제 2 기획전시실
주최: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