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자세나 우아한 표정은 없다. 엉덩이를 쭉 빼고 다리를 제멋대로 꼬는, 마치 친구와 대화하는 듯한 자세와 눈빛. 때론 의뭉스럽게, 때론 의욕 없이, 때론 암울한 표정이 시선을 끈다. 알리스 닐의 그림 속 인물들이 그렇다는 얘기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인물 화가 알리스 닐. 자신을 ‘영혼의 수집가’라고 일컬었던 그녀의 그림이 이토록 사실적인 것은 모델에 대한 남다른 애정, 내면을 통찰하는 성실함이 동반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모델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면 마치 자신이 버려진 폐허가 된 느낌이라고 했을까.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사간동 갤러리현대 신관에서는 알리스 닐(Alice Neel, 미국, 1900-1984)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 <People and Places: Paintings by Alice Neel>이 오는 6월 2일까지 열린다. 1942년부터 1981년 작품까지, 전 시기에 걸친 작품 15점을 국내에서 처음 만나볼 좋은 기회이다. 알리스 닐은 활동 당시 미국 미술계를 풍미하던 미니멀리즘이나 개념주의에 동조하지 않고 자신만의 표현주의적 화풍을 고수한 화가로서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그녀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남성 작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4년 휘트니 미술관 회고전 이후 재평가되어 탄생 100주년에는 휴스턴 미술관을 비롯한 미국 주요 미술관에서 대대적 순회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알리스 닐에게 인물은 가장 좋아하는 주제이자 그녀의 예술세계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남성, 여성, 아이들, 연인까지 다양한 인물의 희로애락을 한 화면 안에 표현하였는데, 인물의 지위나 나이 같은 겉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내면과 살았던 시대를 담고자 하였다. 특히 여성을 예술가의 뮤즈, 전형적인 어머니상, 혹은 이상적인 누드화로 그리던 오랜 미술계의 통념에서 벗어나 여성으로서의 삶과 경험을 담아내며 감정이나 심리를 솔직하게 묘사했다. 그녀의 이러한 자유롭고 휴머니즘적인 행보는 마를린 뒤마, 엘리자베스 페이튼, 에릭 피셔와 같은 후대의 인물화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나는 한 번도 어떤 사조를 따른 적이 없다. 나는 어떤 작가에 대해 그 어떠한 것도 모방한 적이 없다. 나는 내가 휴머니스트인 것을 믿는다. 이것이 내가 세상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나는 자기중심적이다. 나는 화폭에 삶과 시대정신을 기록하기를 원한다. …(중략) 나는 인물들의 이미지가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 시대를 반영한다고 느낀다. _ 작가의 말 중에서
알리스 닐은 프랭크 오하라, 앤디 워홀, 로버트 스미슨 같은 예술가나 에드 코흐, 거스 홀 같은 유명 정치인 그리고 가족들 같은 주변 인물을 주로 표현하였다. 이와 관련해 화가 엘리자베스 페이튼은 “알리스 닐은 길거리에서 사는 사람이나 유명한 미술 비평가 모두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모델의 인간성을 나타내기를 원했고 그 인물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솔직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사명이었다.”라고 소개했다.
알리스 닐의 그림을 보고 느낀 인간성은 대체로 이런 모습이다. 때때로 보게 되는 엄마의 무기력함, 아이답지 않은 앙큼함(미운 7살이라는 표현이 맞겠지만 나이를 짐작할 수 없으므로), 더없이 나태한 모습의 여성, 약간의 허세가 우스꽝스러운 남자들, 다정하게 붙어 있으나 다른 생각을 하는 듯한 연인, 세상 모든 짐을 어깨에 얹은 듯한 우울한 중년까지. 결코 아름답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다양한 모습의 인간성이 깃든 것처럼 생생하고 또 생생했다.
누구에게도 영향받지 않은 독보적인 작가 정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대담함, 작품을 위해 자신을 비울 수 있는 희생, 대상에 대한 강한 애정. 이런 말들로 알리스 닐을 아우를 수 있을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이, 그 이상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전시이다. 희대의 인물 화가 알리스 닐을 지금, 서울에서 만나보자.
전시 정보
알리스 닐 <People and Places : Paintings by Alice Neel>
기간: 2013년 5월 2일(목) ~ 2013년 6월 2일(일)
장소: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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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요금: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