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부드러운 인상이다. 그녀가 말할 땐 배경음악으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나 <마술피리>의 음악이 흐르면 좋겠다. 책에 대한 사랑만큼 클래식음악에 대한 사랑이 각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람 자체가 유연하게 흐르는 음악과 닮았다. 북 디자이너이자 번역자, 타이포그래피 칼럼니스트이면서 작년보다 아트 디렉션이 강화된다는 내년 ‘서울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타이포잔치 2013)의 큐레이터를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유지원 디자이너를 만났다.
북 디자이너로서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어디인가요?
독자로서 신체적 동선에 대한 고려를 어떻게 했는가를 중요하게 봐요. 어떤 종이를 사용했는지, 손과 어깨와 목에 힘이 들어가는 요소들도 많이 보고요. 두꺼운 책이 쫙 펴지지 않는다거나 작은 책인데 들고 있기 힘들면 읽기 힘들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책을 읽는 건 누군가랑 살아보는 거랑 비슷한 것 같아요. 외모도 중요하지만 살다보면 성격이 맞아야 하듯 수용자 입장에서 생각해 마냥 멋있고 예쁜 책보다는 읽기 편한 책을 더 선호하게 되네요.
본문 디자인과 표지 디자인 중 어디에 더 치중하게 되나요?
타이포그래피 정신이 살아 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본문인 것 같아요. 커버는 광고디자인의 영역에 좀 더 가까운 것 같고요. 예전엔 본문만 인쇄하고 커버는 각자 취향에 따라 입혔기 때문에 장식적인 요소가 강했죠. 지금은 책을 하나의 오브제로 보면서 통합적인 부분이 강화되었지만 전통적인 북 디자인은 본문이라고 생각해요. 기록과 전파라는 책의 기본 정신에 충실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표지는 커뮤니케이션 성격이 강하다고 보고요.
어떤 작업이 가장 기억에 남으세요?
제 석사논문이요. 라이프찌히 그래픽서적 예술학교를 다녔는데 적어도 자기가 쓴 글을 디자인해서 만드는 게 당연하다는, 전문가로서의 요구를 받았어요. 하지만 독일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저는 모르잖아요. 사각도 많이 생기고. 역대 논문 중 제일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쌓아놓고 포인트 자로 행간, 자간, 활자체를 다 분석해서 공부했죠. 글자 하나씩 따라 그리고 연구해보면서요. 그때 실력이 굉장히 많이 늘었어요.
칼럼을 읽을 때마다 타이포그래피에 대해 굉장히 디테일한 시각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게 좀 마이크로한 부분이 있어요. 작은 것을 파고드는 일을 좋아하는 성격인 것 같아요. 독일 유학 중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요. 독일은 유럽 한가운데 있는 나라라 국경만 넘으면 문자부터 변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글자에 대한 취향도 나라마다 다양하고. 같은 독일권이라도 오스트리아랑 스위스는 도로 표지판이 다르거든요. 글자가 일상문화 속에서 생동하는 것을 느끼며 글자에 대한 관심이 확장되었죠.
음악과 문자는 닮은 데가 있다. 음들의 조화로 음악이 탄생하듯 글자들의 조합은 텍스트를 생성한다. 여백과 배열의 어울림이 주는 쾌감을 일찍 깨달았던 것일까. 음악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문자에 대한 사랑에 맞먹는다. 타이포그래피 칼럼보다 음악 칼럼을 먼저 썼다. 타이포그래피 이야기를 할 때 자연스럽게 음악에 비유하는 일이 많다. 디자인계에서 음악에 대한 칼럼을 요청받는 흔하지 않은 일도 종종 생긴다. 휴대폰은 모차르트가 태어난 공간과 시간과 관계 깊은 번호고 이메일 아이디도 오페라 여주인공 이름이다.
클래식음악에 특별한 애정을 지니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좋아했어요. 뜻도 모르면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따라 불렀죠. 덕분에 독일 유학을 갔을 때 말은 못하는데 발음만은 네이티브에 버금갔어요. 독일어 선생님이 보실 때 전 좀 ‘이상한 학생’이었을 것 같아요. 그 흔한 장미조차 독일어로 뭐라고 하는지 모르면서 물망초는 똑 부러지게 말하고, 책상이나 연필은 모르는데 ‘지옥의 복수심이 내 마음속에 불타오르고’라는 문장을 구사했으니 도무지 실력을 가늠할 수 없었던 거죠(웃음).
디자인과 음악은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고 생각하세요?
올해 음악에 대한 특강만 세 번을 했어요. 바흐의 필체에 대한 내용이나 악보 타이포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음악은 음을 시간에 기록하는 것이고 문자는 글자를 공간에 기록하는 것이잖아요. 시간과 공간이라는 매질이 다를 뿐 기록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비슷하죠. 악기 조율할 때 절대음감 있는 분들은 사분의 일음이 떨어지는 것 같다, 이런 말씀을 하시잖아요. 그런 부분은 마이크로타이포그래피의 세계와 통하는 부분이 있죠.
수업 때도 음악으로 비유를 많이 하시나요?
네. 학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웃음). 예를 들면 타이포는 문법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문법을 모른다고 의사소통이 안 되거나 시를 못 쓰는 건 아니죠. 하지만 문법을 알 때 좀 더 풍성하고 적확한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처럼 타이포의 맥락을 알고 쓰면 디자인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점이 있어요.
일에서 전달력과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떤 일을 하든 제가 일관되게 지키는 자세가 있어요. 적당하고 원만하게 잘 하려고 하기보다 끝장을 볼 때까지 확실하게 하려고 해요. 뭉친 실타래의 끝을 찾을 때까지 뽑아내는 성미가 있어서요. 그런데 록(rock)적인 게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글이나 디자인이나 아웃풋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 고민이에요(웃음).
인위적으로 뭔가를 이루기 위해 애쓰기보다 자신의 호흡에 맞춰 자연스럽게 삶을 유영한다. 흐름의 속도는 안단테 칸타빌레. 멀티 플레이어로 살아가지만 남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살지는 않는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편하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음악이 시간이 흘러도 감동을 주듯 유지원이라는 자연체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활동영역을 더 넓히고 싶다는 생각도 하시나요?
프런티어 정신이 별로 없어요(웃음). 수영을 처음 배울 때 여자들이 더 잘한대요. 남자들은 힘을 주느라 물에 잘 빠지는데 여자들은 힘이 없어서 오히려 물살을 잘 탄다고요. 그렇게 나가고 싶어요. 물살을 거스르지 않고 흐름을 타면서요.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하다보니 희소성 같은 것도 생기고, 찾아주는 분들도 생기더라고요. 사회 흐름은 많이 보고 있어요. 타이포 전반에서 어떤 것이 이슈가 되고 있는가, 주의 깊게 보고 있고요.
현재 관심을 갖고 보는 것은 무엇인가요?
다국어 타이포그래피와 웹 타이포그래피에요. 초기 웹 타이포그래피는 책보다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이 적었죠. 그런데 지금은 웹을 지면 디자인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인식이 퍼지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어요. 테크닉적인 발전에도 관심이 많고 기여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결국 디바이스는 계속 바뀌니까 지면에서 했던 즐거움을 화면에서도 재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볼드체나 흘림체에도 관심이 가고요.
디자이너로 활동하다보면 현장에서 동기들을 만나는 일도 있을 것 같은데 느낌이 어떠세요?
이재민 디자이너와 대학 동기에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 새롭게 알게 된 게, 전 그런 학생이 클래스에 한두 명은 꼭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1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학생이었더라구요(웃음). 선생님이 뭐 해오라 하면 한 달에 하나 하기도 힘든데 매주 해오는 거예요. 그것도 뛰어나게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요. 재민이 덕분에 저희 동기가 빈티지 학번이 되었죠(웃음). 동기들이 동료로서 현장에서 잘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서로 기분이 좋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볼드체 전시를 하고 싶어요. 입체적인 공간감을 지니면서 글래머러스한 풍만함이 있는 볼드체는 진짜 섹시하잖아요. 캐리커처처럼 특성이 과장된 재미도 있고 어안렌즈를 낀 것도 같고. 구형의 투명한 설치물에 물도 채워 넣고 수족관이나 물속에 있는 듯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면서 디자인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하지 않고 아, 이런 게 볼드구나! 라고 체험하게 하고 싶어요. 실현가능성은, 어제 숙성시킨 17년산 발렌타인이 출시되는 날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