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공포, 멜로, 스릴러, 드라마, SF, 블랙코미디…. 장르는 보는 이가 완성하는 것이다. 그의 내면과 작용하여 만들어진 장르는 변화무쌍하며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 구성된다. 지성을 건드려 자아내는 감성으로 카타르시스를 만들고, 예술에 대한 폭넓은 시야와 유연성을 제시한다.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미장센-연출된 장면들> 전이 바로 그것. 2000년대 현대미술 작품 중 영화적 연출을 보여 주는 국내외 작가 8인의 작품을 통해 영화와 미술과의 영향 관계를 조명하고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재고하는 전시이다.
미장센(mise-en-scene)은 원래 연극 무대의 장면 연출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영화의 미장센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도구로, 대사나 편집이 없이도 하나의 장면 속에 풍성한 의미를 담을 수 있다. 화면 속에서 인물의 몸짓이나 눈빛, 자세와 동선들은 그 자체로 수많은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것. 이러한 영화 속 장면 구성은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서술하는 서구 회화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있으며 현대미술에서 일상과 무의식을 탐구하거나, 미술과 영화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사용됐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영화적인 도구를 활용한 작가들을 통해서 현대미술에서 미장센 장면 연출의 가능성을 찾으려 한다.
아다드 하나(Adad Hannah, 캐나다)의 <1초의 절반>은 공간 구성과 영상의 관계를 설치 작업으로 더욱 복잡하게 꾸민다. 공간 안에 배치된 12개 모니터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영상에서 보이는 장면의 미스터리를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마지막 화면 자체가 연출된 무대임이 드러나면서 어디까지가 연출인지를 일부러 구분할 수 없게 하였다. 영상 속 장면은 그 강렬함으로 관객을 끌어들이지만, 이것들은 결국 꾸며 낸 연출이며, 우리는 영상과 무대세트를 보면서 이 장면에서 무엇이 허구이고 무엇이 실제인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레고리 크루드슨(Gregory Crewdson, 미국)의 대규모 사진 작품은 사진 한 장짜리 영화라고 불린다. 작가는 영화감독처럼 다양한 전문스텝의 도움을 받아서 세트와 조명, 소품을 준비하고 배우들을 섭외하여 작품을 촬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촬영한 사진은 사후에 디지털 가공을 거쳐서 작가가 원하는 완벽한 모습으로 다시 조정된다. 그의 작품 <장미 아래서 – 무제>는 일상적인 순간 같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장면을 통해 스릴러에서 멜로드라마까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이 속에서 장편극영화 한편의 줄거리를 읽어 낼 수도 있다.
양 푸동(Yang Fudong, 중국)의 작품 <다섯 번째 밤>은 7개의 스크린에 담은 흑백 영상으로 한여름 밤의 조용한 풍경을 보여 준다. 역사 깊은 상해영화제작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장면을 여러 카메라가 동시에 촬영한 작품은 전시장에서 17미터 길이의 장관으로 펼쳐진다. 자신만의 내면세계에 침잠한 듯한 사람들의 사연과 여러 화면을 오가며 이어지는 이야기는 차분한 외양에도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 하나의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여러 번 반복 감상하기 전에는 드라마의 일부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관객은 인물들이 교차하는 공간을 분석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스스로 구성해 낼 수도 있다.
진기종(한국)의 <미장센>은 축소모형을 통해서 장면구성의 인위성을 더 뚜렷하게 보여 준다. 레일을 따라 서서히 움직이는 카메라가 세트 모형들을 통과하며 만들어 내는 모니터 속 드라마는 남녀 간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통속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전시장에서 보이는 것은 다양한 재료를 모아 만든 수공 모형들의 나열일 뿐이다. 원래 모형은 완성작을 위해 미리 만들어 보는 준비 과정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 자체가 완결된 작품으로 끊임없는 카메라의 동작에 따라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밖에 그림과 영화의 역사를 활용한 작품들도 눈에 띈다. 벨라스케스의 명화를 알지 못하고 본다면 이브 수스만ㅣ루퍼스 코퍼레이션(Eve Sussman, 미국ㅣRufus Corporation)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 궁정을 배경으로 한 무대극의 한 장면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히치콕의 영화를 본 적이 없는 관객은 정연두(한국)의 사진에서 정교하게 연출된 이면화의 내용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림과 영화가 쌓아 온 시간의 무게들은 이렇게 기존의 명작을 빌어 온 현대미술 작품에 깊이를 더해준다. 러시아 작가 그룹인 AES+F가 고전문학을 소재로 만든 장관들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회화와 자본주의 광고 사진 같은 극단을 결합해 내며, 서구의 현대사가 담긴 기록을 재현하는 토마스 데만트(Thomas Demand, 독일)의 경우도 그 역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종이로 만든 모형일 뿐이다.
대규모 작품을 마주하여 도판에서 볼 수 없는 세부 묘사를 찾고, 전체 구성과 부분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감상은 제작 과정 못지않게 중요한 작품 일부이다. 미장센의 미학을 미술로 끌어들인 국내외 작가들의 독창적이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볼 수 있는 <미장센–연출된 장면들> 전. 이번 전시의 사진과 영상, 설치 작품은 영화 속 장면 같은 생생한 매력으로 관람객에게 다가가며, 자유로운 참여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주어 관람객이 자신만의 작품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영화적인 도구를 활용한 드라마틱한 현대미술을 만끽해보길 바란다.
전시 정보
미장센-연출된 장면들
기간: 2013년 3월 28일(목) ~ 2013년 6월 2일(일)
장소: 삼성미술관 리움
협찬: 삼성생명
관람 요금
성인 7,000원
청소년 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