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깔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래픽디자이너가 있다. 디자인계와 무관한 일반 대중에게도 얼마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시네필Cinephile들, 그중에서도 열성적인 굿즈 컬렉터들 사이에선 퍽 유명하다. 그들의 수집 품목에는 맛깔손이 디자인한 블루레이, 영화 관련 도서 및 전시 포스터가 아마도 한 점쯤은 있을 것이다. 올초 한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 차트에도 오른 『〈기생충〉 각본집 & 스토리보드북 세트』도 맛깔손의 작업이다. 맛깔손은 디자인 에이전시에 다니다 독립한 프리랜스 디자이너다. 독립 햇수만 따지면 올해가 3년째다. 얼마 전 그는 새 사무실을 마련했고, 작업량이 늘어나면서 지난해부터는 동료 디자이너와 함께하고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3년 만에 이 정도로 견실히 자리를 잡다니’라는 평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맛깔손의 커리어는 회사 생활까지 더하면 8년쯤이다. 그는 “회사를 오래 다녀서 그런지 [···] 엄격한 자기 기준이 있는 편”이라고 자평한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보람과 재미를 느끼는 부분은 정말 사소하고 짧은 찰나에 가깝다”라는 말도 한다. 이런 발언들을 고려해볼 때, 맛깔손은 확실히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는’ 작업자는 아닌 듯하다. 동어 반복 같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려고’ 프리랜서가 된 건 아니라는 의미다. 인터뷰어가 맛깔손에게 묻고 싶었던 바는 대단히 원초적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 수 없는 와중에도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기필코 엄수 및 헌신해야 하는 것들, 에 관한 물음 말이다. 맛깔손은 자신의 표현처럼 “‘FM’이고 보수적”인 답들을 남겼다. 이를테면 “자유로운 생활 양식과는 정반대로 살 수밖에 없다” 같은. 틀을 깨기, 자유로워지기, 독자 노선 걷기 등등이 누군가에겐 창의성의 정의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 반대 양식 또한 어떤 크리에이터에게는 코어가 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 맞는 루트를 취하면 될 일이다. 다만, 양쪽 모두의 전개 양상은 간략하게나마 파악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후자 쪽을 고려 중인 ‘예비 독립자’라면, 맛깔손의 이 인터뷰를 든든한 지침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디노마드가 주최한 「YCK(Young Creative Korea TALKS) [LIVE]」라는 행사에 프레젠터로 참여하신 적이 있지요. 타이틀이 몹시 장렬(?)했습니다. ‘2018 1-2분기 생존 신고’였잖아요. 사실, 강연자가 ‘맛깔손’이었다는 걸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알았어요. 2년 전에는 제목만 일별하고선 ‘굉장한 사투(!)를 벌인 인물이 등장하나 보다’라고 저 혼자 감탄했더랬습니다.
2018년이라면, 그래픽디자이너 맛깔손이 5년간 다닌 회사를 퇴사하고 독립한 지 1년이 채 안 된 해입니다. 바로 그 시기에 무려 ‘생존 신고’를 한 셈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2년이 지났습니다. 맛깔손은 여전히 생존해―물론, 생물학적 생존이 아닌 ‘디자인계’에서의 생존을 의미합니다―있고요. 만약 현재 시점에서 자신의 ‘2020 1-2분기’를 신고해본다면, 그 신고서의 제목을 어떻게 붙이고 싶으세요? 이를테면 성장 신고(디자이너로서의 성장), 확장 신고(디자인 영역의 확장)처럼 말입니다.
당시에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디자이너로서, 제가 느꼈던 감상을 자조적으로 표현해본 것이었어요. 특히 그 자리에는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 분들이 많았거든요. 단순한 포트폴리오 리뷰보다는 작업 과정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PDF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지 않고, 제 외장하드를 노트북에 연결해서 폴더 하나씩 열어보면서 작업 주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이야기했었어요.
어느새 독립 후 3년이 됐네요. 2019년을 기점으로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가 생겼고, 단독으로 사무실을 마련하기도 했고요. 디자인 작업 영역, 클라이언트 풀도 조금씩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올 상반기를 신고해본다면, 제목은 ‘2020 1-2분기 코로나19: 버티기-굳히기’ 정도가 되겠습니다. 상반기는 코로나19 영향이 컸어요. 제 프로젝트 대부분이 “여기에 오세요! 보세요! 모이세요!” 하는 속성이거든요. 코로나19 같은 자연재해에 가까운 상황에서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더라고요.
우울할 때도 있었고, 이런 시기에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하는 고민도 많아졌어요. 커미션 작업뿐 아니라 자체 콘텐츠 기획에 대한 필요성이 간절했습니다. 올해를 계기로 저 스스로를 북돋을 수 있는 즐거운 프로젝트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FDSC(Feminist Designer Social Club)의 팟캐스트 방송 ‘디자인FM’에 출연하셨었잖아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인터뷰어로서 반성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픽디자이너 맛깔손에 대해 제가 갖고 있던 대표 이미지는 ‘자유분방함’이었거든요. 세상의 구조틀에 맞추기보다, 자신만의 프레임을 하나하나 착실히 직조해나갈 법한 인물상이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방송을 듣고 나니 제가 단단히 오해했던 듯합니다. 뭐랄까, 자기 관리가 굉장히 엄격한 분처럼 느껴졌어요. 아침 기상 시간은 늘 일정하다, ‘프리랜서’ 하면 으레 연상되는 자유로운 생활 양식을 지양한다, 마감 기한과 클라이언트가 나를 발전시켜준다, 같은 말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배트맨 비긴즈〉라는 영화가 개봉했을 때, 연출자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주연 배우 크리스찬 베일을 무척 칭찬했었어요. ‘self-devoted’라는 표현을 쓰면서요. 디자이너 맛깔손 역시 ‘자기 헌신적’ 태도가 확고한 듯합니다.(방송에서 “잠을 안 자도 좋으니 큰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라는 발언도 남겼지요.) 그래서 한 번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디자이너로서, 절대 어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불문율 같은 것들이 있나요?
FDSC 라디오에서 진지하고 ‘노잼’인 사람이라고 어필하고 왔는데, 나중에 후기를 찾아 보니 다들 웃기다고 하시더라고요. 디자인 잘한다는 칭찬보다 더 듣기 좋았어요.(웃음)
아무래도 회사를 오래 다녀서 그런지 ‘FM’이고 보수적이랄까, 엄격한 자기 기준이 있는 편이에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보람과 재미를 느끼는 부분은 정말 사소하고 짧은 찰나에 가까워요.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잘 들여다보면, 자유로운 생활 양식과는 정반대로 살 수밖에 없거든요. 복잡한 의사 결정과 변수들에 잘 대응해야 하니까요. 얽혀 있는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고려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신경써야 하고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클라이언트를 비롯해 협업자, 제작자 등 모두를 이끌고 프로젝트를 끝까지 잘 성사시켜야 할 책임이 있어요. 물론 클라이언트와 의견 차이로 사소한 언쟁이 생기기도 하고, 제작에 문제가 생겨서 급하게 수습해야 할 때도 있고, 별의별 일 다 있죠. 그래도 아직은 과정이기 때문에 아쉽고 미숙한 부분이 있어도 다음 프로젝트에서 개선하려고 노력합니다.
‘진심으로 대하자’. 낭만적인 말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저로서는 어기지 않으려고 매번 되뇌는 에피그램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않고, 진심을 다해 열심히 했을 때는 결과와 무관하게 후회가 없더라고요.
〈젊은모색〉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신진 작가 발굴을 위해 운영하는 전시 프로그램으로 1981년 〈청년작가〉전이 그 전신이다.
지금은 거장 반열에 오른 사진가 구본창의 작품도 1992년 〈젊은작가〉전에 소개된 바 있다.
그래픽디자이너 맛깔손의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비약일 수 있겠습니다만, 상당한 다작가라고요. 다작을 하는 이유는 당연히 일이 많아서일 겁니다. 그런데 맛깔손의 경우엔 뭔가 또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았어요. 좀더 근원적인 이유라 불러야 할까, 아무튼 그런 게 느껴졌습니다. 문자로 전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서(서면 인터뷰의 한계일 테죠), 불가피하게 비유법을 빌려야겠습니다.
손목시계로 치자면 왠지 디자이너 맛깔손은 ‘쿼츠’보다 ‘오토매틱’ 쪽인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쿼츠는 건전지로 작동됩니다. 오토매틱은 건전지를 끼우는 대신 주기적으로 태엽을 감아주어야 하고요. 그러니까, 디자이너 맛깔손은 ‘외부의 자극이나 동력원 말고 어떻게든 자신의 물리력으로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사람’ 같습니다. 디자이너로서의 시간이 단속적이지 않도록, 틈이나 오차 없이 계속 스스로를 ‘돌리는’ 사람 말입니다. 물론 저의 어림짐작에 불과합니다. 디자이너 맛깔손은 어떤 태도와 생각을 갖고 작업에 임하는지 궁금해요.
비유해주신 문장이 상당히 철학적이면서도 멋진데 조촐한 답변밖에 못 드리겠네요···. 사실 별 생각이 없습니다. 다작을 하는 특별한 이유도 없고요. 운이 좋아서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최근 작업이 가장 만족스러워야 한다.’라는 목표가 있기는 한데, 사실 좀 무서운 생각이죠.(웃음)
1940년대생 영화감독인 조지 밀러(George Miller)나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같은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 다수의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도 최신작이 전작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디자인 작업 자체만 따로 떼놓고 작품성을 운운하고 싶지는 않지만, 프로젝트의 과정과 결과가 ‘완벽했다!’라고 자족할 때가 오지 않을까 저 스스로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이런 기대감이 작업 동력이에요.
때로는 ‘내가 보고 싶고 갖고 싶은 작업을 해보자’ 같은 단순한 생각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제 작업이 누군가에게 레퍼런스가 되거나 영향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저는 주위의 디자이너 후배, 동료, 선배들을 보면서 많은 힘을 얻거든요. 그들과 업계에서 오랫동안 좋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활동하고 싶습니다.
디자이너 박럭키와 협업
‘맛깔손’이라는 이름이 디자이너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알려진 계기가 『〈기생충〉 각본집 & 스토리보드북 세트』 아닐까 싶습니다. 북디자인을 담당하셨잖아요. 그래서인지, 왠지 맛깔손 하면 영화 관련 작업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실제로 다양한 작업들을 진행하셨고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sia Culture Center, ACC) 시네마테크, 영화감독 박찬욱과 현대미술가 박찬경 형제의 전시 〈파킹찬스(PARKing CHANce)〉, 영화 〈낮은 목소리〉 블루레이 디자인 등등에 참여하셨지요.
『〈기생충〉 각본집 & 스토리보드북 세트』와 관련해 한 경제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이 책을 계기로 좀더 대중적인 디자인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요. 또 비약일지 모르겠는데, 왠지 이 말은 ‘디자이너 맛깔손은 대중성을 진지하게 원하고 있다’라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영화 쪽 작업들을 계속 진행하는 맥락이 혹시, ‘대중적인 디자인 작업을 하고 싶다’라는 점과도 이어져 있는 것인지 궁금해요.
영화와 사진 매체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관련 작업들을 계속하고 싶어요. 한때 뮤직비디오 감독이 꿈이어서 영상을 전공하기도 했었고요. 『〈기생충〉 각본집 & 스토리보드북 세트』 같은 경우에는 영화 개봉 6~7개월 전부터 이미 작업에 들어갔었어요.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책이 대형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뉴스에도 나오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이전에는 주로 문화 예술계, 특히 미술계 쪽 프로젝트가 많았거든요. 콘텐츠 경향이 아무래도 일반 대중에게 쉽고 친근하게 이해될 만한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기생충〉 책자를 여러 독자들이 읽고 피드백을 해주셔서 참 반가웠어요. 이 작업을 계기로 대중적인 디자인 프로젝트를 더 해보고 싶어졌고요.
예전에 방송국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자기 일의 어떤 점이 좋은지 물어봤습니다. “시골 사는 할머니 댁에서도 TV는 틀면 나오지 않냐. 그래서 좋다.”라고 답하시더라고요. 저도 공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볼수록, 디자이너로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확률도 커지겠죠.
박찬욱·박찬경 형제는 자신들의 공동 연출작(〈파란만장〉, 〈오달슬로우〉, 〈청출어람〉 등)에 일종의 브랜드 마크로서 ‘파킹찬스’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아카펠라(A Cappella, 無伴奏)〉, 〈악의 손길(Touch of Evil)〉, 〈늑대의 집(La Casa Lobo, The Wolf House)〉
에디터 유지원이 공동 기획한 책 『뷰어스(VIEWERs)』 출간 기념전 아이덴티티 디자인, 2018
‘맛깔손’은 한 그래픽디자이너의 활동명이자, 그가 한때 살았던 자취방 근처의 한식집 상호이면서(‘디자인FM’에서 들었습니다), 그의 전 스튜디오 이름입니다. 디자이너 맛깔손도 한식집 맛깔손도 그대로인데, 스튜디오 맛깔손만 이제 ‘MHTL’이라는 새 문패를 달았습니다. ‘More Heat Than Light’의 약자라고 하셨지요. ‘새 스튜디오’라 표현해도 괜찮을까요?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왜 ‘빛보다 열’인지도 궁금해요.
새 사무실로 옮긴 기념으로 포스터를 하나 샀는데, 거기에 ‘More Heat Than Light’라는 문구가 있었어요. 사전을 보니까 전구나 전등에서 빛에너지보다 열에너지가 더 많이 분출된다는 뜻이더라고요. 실질적 성과보다 부차적인 것들을 부각한다, 라는 의미도 있고요. 디자이너로서 지양해야 할 바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뭐라 속단할 수 없는 미묘한 뉘앙스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튜디오 이름으로 결정했고요. 다만, 사람들이 회사명을 한 번에 잘 외우질 못해요.
MTHL, MLTH, 이런 식으로 잘못 호명하는데, ‘모어히트댄라이트’라고 한글 병기를 해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웃음)
앞으로도 ‘맛깔손’이라는 제 활동명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업자명을 MHTL(More Heat Than Light)로 변경하면서 실장 직함을 달았는데, 개인이 운영하는 독립 스튜디오로 비춰지기보다는 ‘디자인 그룹’ ‘디자인 회사’로서 발전시키고 싶어요. 문화 예술계 작업뿐 아니라 다양한 산업에서 활동하며 디자인 영역을 확장하고 싶은 바람입니다.
맛깔손은 2018년 1월 DJ YESYES(‘DJ ㅇㅇ’, 박다함)와 함께 공연했다.